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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치고 하룻밤 자고 싶다..가야산 원효봉(元曉峰)

백수.白水 2016. 11. 16. 12:38

 

2016. 11.15() 

 

 

 

원효봉자락에는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원효암터, 원효대사가 해골에든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진다)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득도굴과 은술샘, 의상암터와 의상굴, 금술샘 등이 전해지고 있다.

 

 

 

 

45번 도로 덕산면 대치리·광천리에서 북쪽 산을 올려다보면 쌍봉으로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가 있으니 가야산의 주봉인 가야봉(678m, 왼쪽)과 원효봉(605m, 오른쪽)이다

원효봉은 가야봉에서 불과 1.72km의 거리에 있지만 수덕산-뒷산-가야봉-석문봉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코스에서 벗어나 있어 연계산행이 잘 되지 않는 봉우리로 늘 꼽고만 있다가 오르게 되었다.

 

 

 

 

내일 영하로 떨어진다기에 무를 뽑아 땅에 묻는 등 일요일에 할 김장을 미리 준비를 해주고 11시 30분쯤 집을 나섰는데 너무 서두르다가 들머리를 잘못 찾았다

시량리 아람아파트 근처에서 등로(登路)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인 착각으로 선진사료물류센터 근방에서 찾았던 것젊고 건장한 음식점주인에게 원효봉 오르는 길을 물으니 이곳에는 진입로가 없고 임도가 있는데 중간에 길이 없어져 자기도 올라가다가 포기했다며 회목고개 가는 길 따라 회목고개에서 원효봉을 오르면 된단다.

내가 그냥 임도로 올라가보겠다고 나서니제대로 된 길을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부탁하기에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출발했다.

 

 

 

 

 

한낮인데도 낙엽 진 산길에 나무그림자 내려앉아 쓸쓸하고 으스스하다설마 길이 없을라고... 

제법 괜찮은 임도를 따라서 한20분 올랐나임도가 계곡을 건너더니 바로 끊겨 버렸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건너온 계곡을 다시 건너 산비탈을 타기로 했다

되돌리기엔 걸어온 길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골이 깊고 급경사 비탈이라서 스틱은 무용지물, 나뭇가지와 바위를 잡고 거의 기다시피 파란하늘이 빼꼼하게 보이는 위쪽을 등대삼아 올랐다오르기는 해도 도저히 내려갈 수없는 험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무가 잎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시야가 트이고 산객(山客)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고행이었다인간사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아야 다시 품을 수 있다는 자연의 가르침이다.

 

 

 

 

 

 

 

 

 

 

 

 

 

 

 

 

 

 

생강나무가 금방 꽃눈을 터트릴 듯 부풀어 올랐다.

 

 

 

 

 

아름다운 문양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으로 보인다.

 

 

 

 

 

출발한 후 한 시간쯤 지났을까어찌하다보니 산줄기 능선에 올라섰다

흐릿하지만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나타난다왼쪽 계곡 너머로 가야봉이 보인다정상이 멀지 않았다

산비탈을 헤매지 말고 진즉 능선으로 올랐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가야봉

 

 

 

 

 

정상으로 오르면서 눈 아래로 가까이 보이는 풍경을 느긋하게 즐긴다.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정상에서 사방으로 툭 트인 전망에 벅찬 감흥이 인다.

들머리에서 만난 식당주인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참 대단하단다.

막힘없는 아득함 끝에 대기가 만들어내는 저 신비한 평선(平線)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평선(雲平線)?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여명과 아침저녁으로 벌겋게 물 드는 노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날 좋은 날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내고 싶다. 좋은 자리를 봐 놨다.

오르고 내릴 때 한 사람의 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누가 보면 장엄한 봉우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타는 흰머리 흰 눈썹의 나를 산신령으로 보지나 않을는지...

 

 

 

 

 

 

 

 

 

가야봉이 뒷산으로 뻗어 내리는 줄기

 

 

 

 

 

서산으로 가는 45번 도로가 갈라지는 곳이 광천1리.. 그 오른쪽 봉우리가 뒷산.. 뒷산을 쭉 타고 오르면 가야봉이다.

 

 

 

 

 

앞에 수덕산.. 그 뒤 왼쪽이 용봉산.. 수덕산 정상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비껴선 봉우리가 백월산.

 

 

 

 

 

논 있는 곳은 덕산면 둔리.. 그 뒤로 용봉산 줄기가 쭉 뻗어 내려왔고.. 그 줄기 너머가 내포신도시(도청).

 

 

 

 

 

옥계저수지..덕산시내..드넓은 삽교평야.

 

 

 

 

 

 

서원산

 

 

 

 

하산은 시량리 입구로

 

 

 

 

 

 

하도 자주 찍어 올려서 웬만하면 다 알거다. 팥배나무.. 가야봉.. 석문봉..옥양봉

 

 

 

 

 

 

 

 

 

불원간에 옥양봉도 올라야 하고

 

 

 

 

 

서원산 너머는 고덕.. 더 멀리는 당진

 

 

 

 

 

 

 

 

 

 

뒷산 뒤에 삼준산.. 삼준산 오른쪽 봉우리는 연암산.. 그 너머에 천수만.

 

 

 

 

 

 

 

 

 

 

 

 

 

 

 

 

위쪽에 있는 원효암 암자터

 

 

 

 

 

 

 

 

 

 

 

 

원효대사(617-686)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 지방인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으로 추측)에서 태어났으며, 세속에서의 성은 설()씨였다

그는 특별히 한 스승을 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널리 배움을 구하였고 한다

그러던 중에 앞서가는 불교를 배우려고 그 무렵에 문화의 중심지로 불교가 융성하던 당 나라로 떠나기로 하고 일곱살 아래인 의상 대사와 동행하였는데, 고구려 국경을 넘다가 그곳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오르는 구도심을 잠재울 수 없었던 원효 대사는 의상 대사와 함께 다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는데 처음과는 달리 바닷길로 가기로 하고 가다가 어느 날 원효와 의상은 날이 저물어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과 한기를 피하여 무덤 사이에 잠자리를 구하고 잠을 청하였는데 잠을 자던 원효가 몹시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떠보니 캄캄한 밤중이었다

물을 찾아 주위를 살펴보니 어둠 속에 바가지 같은 것이 있어 다가가 보니 물이 고여 있었다

물맛을 보니 굉장히 달콤하였다. 스님은 단숨에 그 물을 들이키고 안락한 기분으로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이 마신 바가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무덤 주위에는 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해골만 뒹굴고 있었다

스님이 바가지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해골이었으며, 달콤했던 물은 그 해골 안에 고여 썩어 있던 빗물이었다

스님은 갑자기 뱃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하였다그 순간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도 물맛이 달콤하고 감미로웠는데,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그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마음이 멸하면 감()과 분()이 다르지 않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모든 현상이 또한 식()에 기초한다.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밤사이에 원효의 곁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의상은 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고 있는 원효에게 물었다.

"아니 스님. 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당 나라에 유학길을 떠난 것은 무엇을 하기위한 것입니까? "

"그야 물론 도를 구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도를 구했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지요."

원효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그 길로 신라로 되돌아와, 무덤에서 깨달은 법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님의 높은 덕은 신라 땅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으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한 대학자 설총이었다

대사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가지고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말에서 무애를 따다가 무애무(無碍舞)라는 춤을 추고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며 다녔다

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뜻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행함으로서 귀족사회와 상류층에서만 신앙되던 신라의 불교를 널리 대중화시켜 누구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출처: http://hompy.buddhapia.com/...>

 

 

 

 

원효대사 득도굴

 

 

 

 

 

 

 

 

 

 

 

 

 

 

 

의상암터

 

 

 

 

 

 

 

 

 

 

 

 

 

 

 

 

 

 

 

 

 

 

 

 

 

 

 

 

 

 

 

 

 

 

 

 

 

 

 

 

 

 

 

 

 

오래된 묘 하나

 

 

 

 

 

 

 

 

 

 

 

 

 

 

 

 

 

 

 

 

 

 

 

 

 

 

 

하절기에 찍은 금술샘 모습  http://blog.naver.com/tjdan6161/220832282593 

 

 

 

 

 

 

 

 

 

 

 

 

 

 

 

 

 

 

 

 

떨어져 내린 단풍잎이 꽃밭을 이루었다.

 

 

 

 

 

늦가을을 지켜내는 장미꽃 한 송이가 애잔하다.

 

 

 

 

원효암 나들목은 대치교차로 근처에 있다.

 

 

 

 

 

헤매면서 걸은 길이 6km쯤 되고 3시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