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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 고려시대에 번성했던 백제사찰, 보원사지(普願寺址)

백수.白水 2016. 11. 24. 07:47

 

예산상가리에서 고갯길을 따라 2.5km쯤 오르면 대문동 쉼터에 도착하는데이곳에서 퉁퉁고개에 이르는 1.8km의 구간은 오르내림이 없는 평탄한 길이다.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아늑하고 평평한 이 구간은 마치 분지(盆地)같고,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파주 감악산의 고위평탄면지형처럼 오래전에는 사람이 터 잡고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대문동(大門洞)이라는 옛 지명이 이를 대변해주며, 지금도 이곳에서 북쪽방향인 서산 원평리로 내려가는 긴 계곡을 따라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서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퉁퉁고개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다른 지방의 유사한 사례를 보면 바위에 올라가서 발을 구를 때 퉁퉁 소리가 난다는 등 모양이 아니라 어떠한 소리에서 기인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퉁퉁고개를 넘어 내리막길, 자연휴양림이 있는 용현계곡을 따라서 3Km쯤 내려오면 보원사지가 나온다.

 

보원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통일신라고려 시대에 번창했던 사찰임은 분명하다

한 때 고란사라는 이름이 있었다하고, 조선시대에는 강당사(講堂寺)라 불렸다고도 한다.

 

정확한 폐사(廢寺)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일대에 아흔아홉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두 불이나 버렸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세월의 영화를 말없이 전하는 3만평의 절터에서 옛 자취를 더듬으며 천천히 거닐었다.

 

http://blog.daum.net/ybm0913/4400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이 잠든 곳, 보원사(普願寺)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기슭의 보원사(普願寺)는 서산 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에 가깝게 위치해 있는 고려 시대의 절터이다고려 시대의 절터라고 말하는 이유는 현재 이 절터를 지키고 있는 당간지주, 오층석탑, 법인국사탑, 법인국사탑비 모두가 고려 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이들 여러 시설물의 시기는 대체로 고려 초 광종 대가람경영의 산물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광종 대에 왕사와 국사를 지낸 고승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이 있다.

 

백제 금동불에서 신라, 고려의 철불까지

 

현재의 보원사 터는 기본적으로 고려 초의 가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지만 절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그 이전 백제 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절터의 위치가 백제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서 백제 시대의 금동불이 수습된 적도 있기 때문이다.

1968년 봄 절터 남쪽 조선시대 부도부근의 밭에서 발견된 금동불은 높이 9.4의 작은 크기로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양식상 서산 마애삼존불보다 선행하는 것이어서 만일 이 불상이 원래 보원사의 것이었다고 한다면 보원사의 역사는 서산 마애삼존불보다 앞서는 시기의 백제 시대로 소급된다.

 

통일신라 이후 보원사의 불전에는 철불이 모셔져 있었다보원사에서 옮겨진 것으로 전하는 철불은 2구인데, 그중 시기가 빠른 것은 석굴암의 본존상을 연상시킬 만큼 매우 세련되고 안정감 있는 높이 1.5m의 좌불상으로 되어 있다철불의 잔존사례로서는 매우 이른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통일신라시대 보원사는 이미 중앙과 연결되는 규모 있는 가람이었을 것이다이것은 최치원(崔致遠)법장화상전에 화엄10찰로서 계룡산 갑사(甲寺)와 함께 웅주 가야협(伽倻峽) 보원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부합한다고려 초의 중창은 이 같은 신라 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원사에서 옮긴 또 하나의 철불은 고려 초에 제작된 것이다. 1918년 서산 보원사지에서 옮겨진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이 불상은 좌상의 높이가 2.6m에 달한다장륙입상의 높이가 4.8m 크기라는 점에서, 강우방은 이 불상을 장륙철불좌상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이 철불이 고려 초라고 한다면 현재 사역(寺域)에 남겨진 탄문의 유적을 비롯한 일련의 불적(佛蹟)들과 시기가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법인국사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탄문은 광종즉위에 즈음하여 석가삼존금상을 만들고 953(광종 4)에는 불사리를 법당에 봉안하였다이같은 불사(佛事)의 결과 광종은 중국으로부터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유신(維新)의 큰 뜻이 빛났다고 탄문은 밝히고 있다여기에서 탄문이 봉안하였다는 석가삼존금상이 바로 보원사의 철불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원사의 이 철불은 크기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원주 철불 2구와 외양이 매우 흡사하다원주 철불은 82.494크기인데 불상의 흡사함 때문에 동일한 장인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원래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남한강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철산지이다. 충주 일대에 철불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 같은 지역적 특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그렇다면 보원사의 철불도 원래는 충주 부근 남한강 지역에서 제작한 것을 배편으로 옮겨 보원사에 안치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 역할을 아마 국사 탄문이 담당하였을 것이다.

 

탄문과 광종과의 각별한 인연은 광종의 생모인 태조의 비, 신명태후 유씨와 연결된다유씨는 충주를 지역적 근거로 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원주 철불과 유사한 철불이 보원사에 안치된 것은 탄문과 충주를 거점으로 하는 신명태후 유씨와의 연관에 의하여 파악할 수 있다.

 

탄문은 왜 보원사에서 열반하였나.

 

서산 보원사지에는 많은 석물이 있지만 역시 가장 상징성 있는 중심적 요소는 절 뒤편에 나란히 자리한 법인국사탑과 법인국사탑비이다팔각원당형의 탑은 높이 4.7m의 큰 외형을 가지고 있고 그 옆에 화려한 조각을 수반한 탄문의 탑비가 세워져 있어서 보원사에 있어서 국사 탄문의 위치와 비중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글을 지은이는 김정언(金廷彦), 글씨는 한윤(韓允)의 솜씨라 하였다.

 

탄문은 고려 태조 이후 광종 대까지 국사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력한 인물이다그는 968(광종 19) 10월 왕사가 되고, 972(광종 23) 태자인 경종을 위해 천불도량에 들어가 축수하였으며, 975(광종 26) 정월국사에 봉해지게 되었다광종 대라고 하면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의 추진으로 인하여 정국이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은 격동의 시기였다이러한 광종의 개혁배후에 국사 탄문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주목되는 점이 있다비석의 글에는 탄문과 광종의 각별한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만년에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 탄문은 76세의 나이에 이곳 서산 보원사에 입적하였고, 이 때문에 국사의 유해가 깃든 법인국사탑, 그리고 법인국사탑비가 보원사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국사 일행이 가야산사에 이르니 그 승도들이 선악(仙樂)을 갖추어 부처를 영접하듯이 했다. 이에 번개(幡盖)가 구름처럼 나부끼고 바라(鉢螺)가 번개처럼 울렸으며 교선(敎禪)1천여 인이 맞아들여 절로 들어갔다고 당시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광종 대 고려의 대표적 지성(知性)이었던 탄문은 어떻게 보원사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우선 탄문이 보원사를 선택한 것은 화엄종의 대표적 승려였던 탄문의 불교적 경향과 깊은 연관이 있다보원사는 개경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전통있는 화엄종 사찰의 하나였다탄문은 중앙에 있을 때 보원사를 지원하고 거점화하였으며, 따라서 그가 중앙에서 은퇴하였을 때 보원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던 것이다.

 

탄문과 보원사와의 관련에 대해 옛날 보원사에 있을 때 삼본(三本) 화엄경(華嚴經)을 받들어 매번 한밤중에 불전(佛殿) 돌기를 수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또 탄문이 만년에 보원사에 들어갈 때, 광종은 탄문이 보원사로 돌아가려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는 탄문의 활동기에 이미 가람이 경영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오층석탑에 숨겨진 백제

 

978(경종 3) 탄문은 열반에 들었다때로는 자상한 가르침의 아버지이고, 때로는 방황하는 길손의 안내자가 되었다. …… 자비하신 그 모습 언제 다시 만나리. 슬피 우는 눈물은 비오듯 흐르는데 ……

법인국사 탄문에 의하여 보원사 가람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역시 오층석탑의 존재이다. 오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영향으로 매우 안정감 있고 세련된 구도를 보여 주고 있으며, 탑신석에 부조한 악사상(樂士像)은 통일 신라의 전통이 재현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석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백제석탑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지만 판판한 옥개석을 사용하여 5층을 올린 전체적인 모습이 백제탑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지척에서 백제금동불을 포함하고 있었던 보원사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화엄종의 거찰로 발전하면서도, 옛 백제의 풍모와 전통을 남모르게 간직한 채 그 종교적 전통을 이어 갔던 것이다.

 

보원사는 신라 시대 이후 중앙의 정치 세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짐으로써 사세(寺勢)가 번창하고 유지되었다. 따라서 중앙 세력과 연결된 불교적기반이 무너지면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내포 지역의 다른 대찰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 이르자 보원사도 더 이상 거찰의 운영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서산 보원사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2006년부터 12년 계획으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면, 보원사의 역사적 성격이 보다 분명히 확인되고, 아직 남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해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출처: 디지털서산문화대전-법인국사 탄문이 잠든 곳, 보원사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