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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우리제국, 유목·수렵·농경 혼재된 유목통합국가로 규정

백수.白水 2012. 11. 1. 07:35

반만년 정신사의 맥을 찾아서. 김중태 / 재야사학자

 

<5> 구시(九寺)의 창시자인 광개토대왕(2)

 

유목생활과 그 조직의 특성
한대(漢代) 이래 금지되어 왔던 무관의 삼공직등용은 수대(隨代)에 이르러 병마를 총관리하는 좌복시(左僕寺)의 삼공(三公)회의(오늘의 국가안보회의와 비슷) 참여로 결말이 내려졌음은 이미 지난호에 지적한 바이다.
“구시”제도를 중앙정부조직으로 채택한 당제국은 척발씨의 북위→우문(于文)씨의 북주(北周)→보육여(普六茹; 수서(隋書) 제기(帝紀)에 수문제 양견의 아버지 양충이 본래의 선비족 성씨인“보육여”로 되돌아갔다는 구절이 있고 문제의 황후도 북주 팔주국(八柱國)의 하나인 독고(獨孤)씨임으로 수제국은 명백히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씨의“수”로 계승되어온 선비족 유목민 계통의 정치·군사조직을 물려받아 이를 활용한 것이라 말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유목민생활과 그 조직의 특성을 항목별로 논해보자.

 

① 유목민은 계절에 따라 새로운 초원과 물을 찾아 철새처럼 항상 이동한다. 사람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과 함께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 사람과 가축의 비율은 대락 1 : 10이다. 즉, 사람 천 명이면 가축 만 마리, 사람 만 명이면 가축 10만 마리가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데 어떤 조직이건 덩치가 너무 크면 민첩성이 떨어지고 기동력이 약화된다. 따라서 이동의 기동성과 신속성을 살리기 위해 사람 만 명에 가축 10만 마리의 이동단위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부락(部落)이란 명사는 유목민에서 유래한 말로‘부’는 사람 만명 가축 10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락’은 유목민의 이동가옥인 텐트(몽골어 겔, 파오)를 말하므로“부락”은 사람, 가축, 텐트의 합성어인 이동마을을 뜻한다.

5호16국시대의 오호(五胡)는 흉노족, 선비족, 갈( )족, 저( )족, 강(羌)족이고 이들 민족은 각각 그 밑에 평균 5개 정도의 부락을 두었는데, 이 시대 가장 왕성한 활약을 한 선비족의 5부는 척발(拓跋)부, 우문(于文)부, 모용(慕容)부, 걸복(乞伏)부, 단(段)부이다.

 

② 이동가축 중 양과 소와 말의 비율은 6 : 1 : 3정도이다. 양은 유목민의 주식원이고 소는 식용으로도 대용되지만 주로 짐을 운반하고 밭을 가는 농우로 사용되며 말은 다른 가축을 보호하고 다른 부족들과 초원쟁패전을 벌일 때 전마(戰馬)로 사용된다. 초원의 풀은 말과 소가 먼저 먹으며 양의 순번은 맨 나중이다. 말과 소는 가위로 머리카락 자르듯 풀을 잘라 먹지만 양은 머리털 뽑듯 풀뿌리까지 뽑아버리기 때문이다. 소와 양은 목초만으로 키울 수 있지만 말은 목초만이 아닌 사람이 먹는 곡식을 먹어야 하기에 전마의 먹이로 초원과 인접해 있는 보리나 콩을 경작할 수 있는 얼마간의 농경지도 함께 확보되어야만한다. 중세유럽의 획기적인 농산물 증산은 십자형 슬라브쟁기를 소보다 두배 빨리 일하는 말에 매달아 밭갈이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소위 말하는 북방기마민족 불패의 신화는 양고기와 결정적 함수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만리장성 남쪽 농경족의 군대와 북쪽 유목민 군대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농경족의 군대는 쌀, 보리를 위시한 군량미를 후방으로부터 계속 보급받아야 하며 밥을 짓거나 만두를 쪄먹을 무거운 무쇠솥을 다량으로 짊어지고 전선까지 가야 한다. 진영을 세우게 되면 밥지어 먹을 아궁이부터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고 땔감도 수시로 확보해야 하며 전선이 확대되어 본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게 되는 본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게 되는 치열한 전투 중에도 최소한 하루 한 번씩은 솥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어야 한다. 밥해먹고, 대변보고, 식곤증에 밀렸던 피로가 한꺼번에 닥쳐와 잠시 휴식하는 시간을 대략 2시간으로 친다면 이때가 바로 위기의 순간으로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潰滅)적 타격을 입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편 유목민 군대는 초원에 풀이 나지않는 겨울철에 양고기를 말려 육포(肉包)로 만들어 식량으로 저장하는데 30kg의 양을 잡아 육포로 만들면 무게는 1/10로 줄어든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병사 1인당 약 10kg정도의 육포화된 식량을 가죽부대에 넣어 말안장에 매달아 육포를 질근질근 씹어가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먹는 유목민의 기마병 앞에 농경족의 군대는 그야말로 고양이 앞에선 생쥐꼴과 같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한고조 유방을 산서성태원에서 포위하여 굴욕적 강화조약을 유방에게 강요한 후 동방세계를 제패하였던 흉노의 묵돌대선우(冒屯大單于), 5호16국시대의 실질적 패자(覇者)였던 광개토영락호태열제,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역사상 유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 군대의 불패신화는 바로 유목민 특유의 육포화된양고기의전략적승리라말할수있다.‘ 징기스칸’군대의 유럽정복을 군사전술 면에서 깊이 연구한 또다른 군사천재 나폴레옹이 육포화된 양고기의 유럽판이라 할 수 있는 통조림을 발명하여 군대의 식사시간을 대폭 단축하고 기동성을 증가시켜 유럽의 패권자로 군림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③ 유목민에게 있어 초원과 물의 확보가 생명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임자없이 방치되어 어떤 특정 유목민 집단만을 기다려 주는 초원과 물이 있을 턱이 없다. 따라서 이미 다른 부족에 위해 선점(先占)되어 있는 초원과 물을 빼앗으려는 측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측 사이에는 목숨을 건 전투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초원과 물을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일진일퇴 악순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의 생활화, 약탈의 습관화가 유목민의 생활방식으로 정착된다.

「사기」흉노전에나오는구절을보자.“ 흉노족은 유목, 수렵을 생업으로 삼는바, 어린아이는 양을 타고 활로 다람쥐 따위를 쏘아잡고 어른은 말을 타고 큰 짐승을 사냥하며 누구나 말달리고 활쏘는 데 능숙하였다. 주민 전체가 자연적으로 잘 훈련된 이동군대이며 상황에 따라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퇴각하면서 항상 이동하였다”.
고려 원종당시 삼별초의 반란을 몽고군과 함께 진압한 초토사(招討使) 김방경(金方慶)이 몽고군의 잔학상을 힐난하자 몽고대장군 힌도( 都)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인들은지나아이들[漢兒]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열심히 믿어 살생을 싫어하면서 속으로 우리 몽고족을 업신여기고 있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부여한 습속(習俗)은 살육과 약탈이오. 고려인들은 우리를 잔인하다 비난할지 모르나 우리는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부여한 신성한 사명을 묵묵히 실천할 따름이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고려인과 지나인들이 우리의 노예노릇을 하는 까닭이요”.

 

④ 초원과 물을 놓고 유목민 각 부족끼리 벌이는 전투는 쌍방에 엄청난 인명손실을, 특히 잘 훈련된 전투요원들의 손실을 가져온다. 따라서 전사한 병사들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신병이 필요하게 되고 병사는 건강한 젊은남자의 몫이기에 여자와 노인은 홀대받고 소년과 청년은 우대된다. 여기까지는 당시 세계 어느 농경국가에서도 공통되는 남아선호사상의 보편적 발로로 보아 유목민생활의 특성이라 구분짓기는 곤란하다. 하지만「사기」흉노전에 나와있는 유목민의 결혼풍속은 확실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상식의 궤도를 완전히 이탈한 별(別)난 것 중의 별난 것이라 규정지을 수 있다. 흉노족은 가열(苛烈)한 전투행위를 치르는 와중 아버지나 형, 동생이 전사하게 되면 자신을 낳아준 생모이외의 모든 여자, 즉 아버지의 처첩(妻妾)이나 애인, 형수, 제수까지도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살을 섞는 기이한 풍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교윤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근친상간
(Incest)의 굳건한 터부 위에 문명존립의 근거를 두는 프로이드적 사회심리학에 비추어 분명히 이단적논리이다. 그렇다면 형수, 제수는 물론 심지어 아버지의 애인마저도 자신의 처첩으로 만들어 근친상간의 전통을 제도화시켰던 유목민의 풍속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류역사상 크고 작은 모든 모험적 시도는 항상 현실적 필요에서 출발한다는 역사인식의 바탕 위에서 해석해 볼 때 유목민의 근친상간적 결혼풍속은 전투능력을 가진 남자아이를 한명이라도 더 생산하겠다는 집단 내의 묵시적 합의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들에게 있어 지고의 가치는 지속적인 전투요원의 확보를 통하여 초원쟁탈전에서 승리하는 것이며 전투요원이 누구의 씨인가는 묻지 않는다. 징기스칸의 큰아들“쥬치”는 약탈당한 징기스칸의 아내가 적장의 씨를 임신하고 돌아와 낳은 아들이다. 문제는 유목민집단이 중원에 들어와 농경국가의 대제국을 세운 이후에도 그 고약한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수제국과 당제국의 역사적 실례를 들어보자.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수(隋) 왕실의 본래성(姓)은 선비족의 보육여(普六茹)에서 한대(漢代) 태위(太尉)벼슬을 지낸 양진(楊震)의 14대손으로 족보를 조작하여 지나식 성인“양(楊)”씨로 바뀌었고 당(唐)왕실의 본래성(姓)도 선비족의 대야(大野)씨에서 서량(西凉)왕 이호(李昊)의 7대손으로 엉터리족보를 만들어 지나식 성인 이(李)씨로 바꾸었다. 589년 수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였던 진(陳)을 멸하고 마지막왕 진숙보(陳叔寶)의 누이 선화(宣華)공주를 잡아 자신의 애첩으로 만들었다. 604년 수문제가 몸져 병상에 눕게되자 평소부터 선화부인을 사모하던 황태자 양광(楊曠: 후일 수양제)이 선화부인을 범해
자신의 애첩으로 삼고 심복 장형(張衡)을 시켜 문제의 등을 꺾어죽였다. 626년 당태종 이세민은 궁궐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서 자신의 형인 황태자 이건성(李建成)동생인 제왕(濟王) 이원길(李元吉)과 10명의 조카들을 철퇴로 때려죽이고 아버지인 고조 이연(高祖李淵)을 윽박질러 황제에 오르고 동생 원길의 비(妃)인 양(楊)씨를 빼앗아 자신의 애첩으로
삼았다. 같은 선비족계통의 장손무구(長孫無垢) 황후가 죽자 태종은 제수인 양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시도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637년 이세민은 무조(武照: 후일의 측천무후)라 이름하는 미인을 불러들여 자신의 애첩으로 삼았는데 649년 당태종이 죽자 선황제를 모시던 후궁들은 순장(殉葬)되거나 머리를 깎아 여승으로 만드는 왕실의 법규에 따라 무조는 감업사(感業寺)의 비구니가 되었다. 당고종 이치(李治)는 황제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무조의 머리카락이 자라는동안 유예기간을 두었다가 궁으로 환속시켜 처음에는 후궁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황후로 책봉하고 이에 기고만장해진 측전무후는 마침내“당”대신“주(周)”로 국호를 바꾸어 천황(天皇)으로 군림하였다.

745년 측천무후의 손자 당현종 이융기(李隆起)는 자신의 18번째 아들인 수(壽)왕 이모(李瑁)의 비(妃)양옥환(楊玉環)을 빼앗아 자신의 귀비(貴妃)로 삼았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60세, 양귀비의 나이는 25세였다. 측천무후와 남편인 중종 이현(中宗李賢)을 독살하여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던 측천무후의 며느리 위(韋)황후 그리고 양귀비를 합하여 삼여화(三女禍)라 부른다. 당나라가 세명의 여자로 말미암아 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위에 열거한 엽기적 사건의 주인공들, 말하자면 수양제와 선화부인, 당태종과 그의 제수인 양씨부인, 당고종과 측천무후, 당현종과 양귀비로부터 우리는 인간특유의 본성인“양심의 가책”이나“죄의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탈을 쓴 추악한 짐승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을 비롯한 지나의 사서(史書)들과 사가(史家)들은 한결같이 당제국을 지나대륙에 존재하였던 역대제국 중 한
(漢)족이 세운 최고의 제국이라 추켜세우며 성당(盛唐)문화니 정관의 치(貞觀의 治: 당태종치세기간 627-649)니 개원·천보의 치(開元·天寶의 治: 당현종치세기간 712~756)를 자랑하다가도 제수와 아버지의 애인과 며느리를 빼앗아 왕비로 만든 태종, 고종, 현종 이야기만 나오면“그들은 공자가 내세운 중화의 인륜도덕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북방 오량캐들로서 선비족의 본색이 드러났을뿐이다”라며 당제국의 황실혈통이 선비족임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하고야 만다

 

군정일치(軍政一致)의 군주(軍主)제도
두만강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구타(阿骨打)가 세운 금(金)나라의 조직체계를 예로 들어보자. 300호의 장(長)을 무쿤(謀克)이라 부르고 10개“무쿤”의 장을 밍간(猛安) 즉, 우리말로 천호장(千戶長)이라 부른다. 하나의“무쿤”에서 전사 100명씩을 차출하여“밍간”에 예속시키니“밍간”은 3천호, 약 1만5천 명의 사람과 잘 훈련된 전사 천 명 ,15만 마리의 가축을 거느리는 소군주(小軍主)인 셈이다. 조선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목조(穆租))는 바로 여진족“밍간”출신이다.

징기스칸의 몽골제국도 금나라와 마찬가지로 사회조직 전체가 군사조직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몽골(용감한 사람들이라는 뜻)어로 단체의 장을 노잔(Nojan)이라 부른다. 따라서 아르반노잔(arban nojan)=십호장(十戶長), 자군노잔(Jagunnojan)=백호장(百戶長), 밍간노잔(Mingannojan)=천호장(千戶長), 투맨 노잔(Tumennojan)=만호장(萬戶長),

여기서 말하는 호(戶)는 물론 농경민의 고정식 가옥이 아닌 유목민의 이동식 텐트를 의미한다. 전진왕 부견의 선조는 감숙성 서쪽 끝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포홍만노(蒲洪萬奴)이다. 만노(萬奴)의 “만”은 만 개, “노”는 노잔의 줄인 말로서 만노란 투맨노잔 즉 만호장이라는 뜻이며 임진왜란때 충무공을 도와 큰 공을 세운 녹도만호 이순신(李純信)은 남해 다도해의 어민만호를 거느리던 어민두목이었다. 물론“아르반노잔”, “자군노잔”, “밍간노잔”, “투맨노잔”들은 평상시에는 행정업무에 종사하고 있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각 단위의 노잔들은 더이상 행정관이 아닌 전투를 주도하는 군사조직의 지휘관으로 업무영역이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이 2원화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인물 밑에 통일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군선정후(軍先政後) 군정일치(軍政一致)의 군주(軍主)제였다. 가우리, 신라, 백제도 군(軍)과 정(政)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
라 군·정이 한사람 밑에 통일되어 있는 군정일치의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신라의 경우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군·정이 분리되었지만, 그 이전에 는 대당주(大幢主: 오늘의 대장에 해당) 귀당주(貴幢主: 오늘의 사단장에 해당) 삼천당주(三千幢主:오늘의 연대장에 해당) 등 군권을 잡고 있는 실력자가 각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신라와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가우리제국의 경우 그 영토의 9/10가 유목, 수렵지역이었으며, 몽
골, 선비, 흉노, 거란, 말갈, 돌궐, 여진족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전체국민 중 4/5정도가 유목과 수렵을 생업으로 하였으리라 판단된다. 서기427년 장수제가 반도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평양의 남쪽 황해도, 연백평야, 재령평야 및 그 아래로 이어진 한강유역의 벼농사지대를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평양으로부터 남방국
경선이 경기도 평택까지의 영토는 가우리제국 전체영토의 1/20밖에 되지 않는다. 두만강으로부터 북쪽 아무르강에 이르는 만주는 세계 콩생산의 60%를 산출하는 지역이며 콩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사람의 먹거리로서뿐만 아니라 말의 먹이로서 필수품이며 그
밖에 내몽고 화북성 산동, 산서 감숙성 일대는 유목생활에 적합한 지역이지 농경지대는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가우리제국의 국가성격을 기존사학계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농경국가”로 만 볼 것이 아니라 유목, 수렵, 농경이 혼재된 목·수·농(牧狩農)의 통합국가로 규정지워야 할 것이다. 제국의 국민구성분포에서 유목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80%라면 당연히 유목민 특유의 정치군사조직이 현실화될 수밖에 없으며 정확히 말해 바로 이점이 광개토대왕께서 유목민특유의 조직체계인“구시(九寺)”제를 창건하여 동방세계에 전파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출처:국회보 20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