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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륙의 요동에서 가우리, 낙랑에서 신라, 대방에서 백제가 세워졌다

백수.白水 2012. 11. 4. 15:41

반만년 정신사의 맥을 찾아서. 김중태 / 재야사학자

 

구시(九寺)’의창시자인광개토대왕(4)

 

지난호에서 지면관계상 생략한 고분벽화 상단에 “진”에게 하례드리며 정무보고하는(그림참고) 인물들의 직책과 성명이 기록되어 있는 9줄의 기사를 보자.

1. 建威將軍八中候餘右(건위장군 팔중후 여우)
2. 建威將軍餘歷(건위장군 여력)
3. 建威將軍廣陽太守長史高達(건위장군 광양태수 장사고달)
4. 建威將軍廣陵太守司馬楊茂(건위장군 광릉태수 사마양무)
5. 建威將軍朝鮮太守司馬楊茂(건위장군 조선태수 사마양무)
6. 建威將軍城陽太守司馬王茂(건위장군 성양태수 사마왕무)
7. 龍將軍邁慮王餘歷(용양장군 매려왕 여력)
8. 龍將軍帶方太守楊茂(용양장군 대방태수 양무)
9. 龍將軍樂浪太守長史慕遺(용양장군 낙랑태수 장사모유)

 

이상으로 그림에 횡렬로 늘어서 있는 여섯사람이 조선, 광릉, 대방태수를 겸직하고 있는 양무와 광양태수 고달, 성양태수 왕무, 낙랑태수 모유, 팔중후 여우와 매려왕 여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중대한 문제는 여섯사람의 직책이 아니라 양무와 고달과 왕무와 모유가 태수로 재직중인 조선, 광릉, 대방, 광양, 성양, 낙랑 등의 지명이 기존 사학계의 주장처럼 반도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모두 다 대륙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 광양, 낙랑은 하북성에 있고 대방은 하북성과 산서성 경계에 위치
하고 있으며 성양은 산동성에 광릉은 강소성에 있다. 이 중 광양, 성양, 광릉은 우리의 기존 역사책에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생소한 지명이지만 조선, 낙랑,대방은 전체로서의 한국사로부터 분리할래야 분리될 수 없는 친근한 이름들이다.

 

조선이라면 단군시대 우리나라의 국호로서 단군조선을 말한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조선을 국호로 삼는 나라들이 늘어나게 되자 오리지널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청건자의 이름이나 성씨를 앞에 붙여“기자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 김일성 부자의“김씨조
선”등으로 분류해 부르고 있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한국사 탐구의 3가지 기준
유주자사‘진’의 묘지명을 해설하는 과정에서‘진’의 관할영역인 조선, 낙랑, 대방 등의 지명이 등장하게 되고 이들이 모두 다 대륙안에 위치하였던 지명임이 확인됨에 따라 여기서 본론을 잠시 접어두고 한국사전반의 올바른 재정립을 위해 국사탐구의 3가지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사의 상한시기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 갈 것인가. 다시말해 한국사의 출발점을 어느 시기로 잡느냐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견과 논란이 있겠지만 한국사가 세계사 속의 독보적인 존재로 부각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가치기준을 전제로 인류역사의 각 특정적 시대를 구분하는 비코나 막스, 튀르고나 랑케의 사관보다는 1841년 영국의 지질학자 존 필립스(1800-1874)가 창안해서 정의한「지질시대」에 의거하는 것이 훨씬 더과학성과 세계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는 지구의 역사를「선캄브리아기(25억년 전)」,「고생대(5억7천만년~2억4천5백만년)」,「 중생대(2억4천5백만년~66만4천년)」, 「신생대(66만4천년~현재)」로 구분하고 신생대를 다시 3기와 4기로 나누었는데 우리는 지금 1만 1천년 전에 형성된 신생대 4기‘홀로세’에 살고 있다.
‘홀로세’1만 1천년 중‘역사시대’의 시작은 6천년전이며 나머지 5천 5백년은 화석시대에 편입된다. 가령 한국 어느 땅에서 고대인의 무릎뼈와 치아가 발견되었다 가정하자. 방사능탄소측정기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뼈의 존속기간이 6천년이 넘었다면 화석물로 분류되고 그 이하라면 역사적 유물로 취급된다.

따라서 석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유해는 학문분류상 화석이지 역사시대의 유물이 아니므로 이는 고고학자의 관심영역일 뿐 역사학자의 연구대상은 아닌 것이다.
6천년 전이라면 제3빙하기가 끝난 시기로 그동안 혹한과 빙하로 온갖 고초를 겪던 인간들이 다양한 종의 꽃과 풀로 뒤덮인 초원과 초원에서 놀던 각종 동물들을 길들여 가축화에 성공함으로써 유목시대에서 농경정착시대로의 이륙준비를 끝낸 문명의 여명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6천년 전 우리 역사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정확히 말해 지금으로부터 5902년 전 계해(癸亥)년에 한웅 거세발한(居世發) 신시개천(神市開天)이 일어났다. 단군조선 2035년의 실사도 사실이 아닌 황당무계한 신화로 취급되어 갖가지 홀대를 받는 나라에서 5902년 전 신시개천이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발하는 독자로 있으리라!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마땅히 알아두어야만 할 것이다. 1943년 단군왕검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대종교(大倧敎)의 임오교변(壬午敎變)사건과 대종교 신자들이 중심이 된‘조선어학회’사건의 주동인물인 저명한 국어학자 주시경(周時)님은 3세가륵단군시절 박사 을보륵(乙普勒)이 단군의 명을 받아 제정한 38자의 정음(正音)인 가림토(加臨土)문자와 이의 개량형인 세종의 훈민정음은 한웅께서 태백산 강림시 가지고 온 천부인(天符印:○□△)3개와 결정적관계에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금년 말쯤 충청북도 보은에 남겨져 있는 광개토대왕의 조천석(朝天石)을 논
하는 과정에서 상세히 밝힐 예정이다. 문자이외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쓰고 있는
태음태양력의 십간(十干: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십이지(十二支: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의 간지법(干支法)도 한웅거세발한의 창작품으로「태백일사」「단군세기」「규원사화」등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문자의 발명이 기록을 가능하게 만들고 기록의 시작이 역사시대의 개막이라면 어느 날에 씨를 뿌리고 어느 날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어느 달, 어느 날에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를 거행한다는 세시기(歲時)에 의한 연중행사의 정착이야말로 문명의 시작인 것이다.

 

민족구성의 실질적 내용 연장확대
국사탐구의 두 번째 기준은 민족구성의 실질적 내용을 어디까지 연장확대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일구어온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진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문화는 진취적이지도 못하고 발전성이 없는 폐쇄문화로서 외부로부터 강력한 문화충격의 파도가 밀려 왔을 때 기존의 노모스(Nomos : 전통과 관습)와 부합되지 않는 요소에 저항하면서도 좋은 점을 흡수, 소화하는 문화통합 능력을 상실하여 스스로 자멸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서양오랑캐[洋夷]들과 같이 놀 수 없다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결과적으로 가지고 온것은 무엇인가? 외세의 침략으로 주권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앙화의 여독(餘毒)은 오늘날까지도 남북분단의 고착상태에 미치고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잡종강세(雜種强勢)라는 말이 있다. 같은 혈통끼리 교배를 해서 얻은 순종2세보다 다른 혈통과 교배해서 낳은 잡종2세가 병에 대한 저항력과 환경적응력이 더 뛰어나 건강한 종으로 더 크게 성장 발전할 수 있다는 이론이며 오늘날의 미국이 좋은 예이다.
예술과 과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미국문화에 기여한 공로자 리스트에 전통적 와스프스(White AngloSaxon Protestant)는 소수이고 유럽의 변방국가에서 온 폴란드인, 러시아인, 헝가리인, 이태리인, 스칸디나비아인, 유태인을 합한 숫자가 압도적 다수이다.
역동적인 미국사회는 혈통이나 도덕적 가치에 의거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위주로 사람을 판단하는 아메리카적 실무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더높은 단계의 발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항상 지니고 있다.

 

이제 눈을 우리 역사로 돌려 자문자답해보자. 우리 역사의 어느 시점에 힘과 기백과 지평선 넘어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진취성과 성취욕과 약동성으로 넘쳐 흐르던 역동적 시기가 있었던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가우리제국과 발해제국은 다민족연합국가로서 선비족, 흉노족, 몽고족, 거란족, 여진족이 모두 다 제국의 국민이었다. 가우리나 발해가 특별한 관용정신이 있어 이(異)민족을 포섭했는가? 아니다. 가우리나 발해는 그들을 이(異)민족시 하지 않고 동일민족으로 보았으며 이것은 단군조선의 귀중한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것이다.

 

「 단군세기」3세단군가륵(嘉勒)6년(BC 2177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정치를 문란시키자 명하여 약수(弱水: 오늘의 흑룡강)로 귀양보내었다. 뒤에 그를 용서하시고 그 땅에 봉(封)하니 그가 곧 흉노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어 가륵 10년(BC 2173년)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梨)의 목을 베었다. 그 후 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 본주, 구주, 사국, 즉 오늘의 일본)에 웅거하여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4세단군 오사구(烏斯丘) 재위원년(BC 2137년)에 “단제(檀帝)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으니 이사람이 바로 몽고족의 조상이다”
15세단군대음(代音) 40년(BC 1622년)“ 단제의 동생 대심(代心)을 봉하여 남선비족의 대인으로 삼았다”
한편「단기고사」에는 같은 해 대심을 달단(達但)왕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달단(타타르, 지나사에는 위구루족 혹은 회홀(回訖)족으로 나옴)족과 선비족이 같은 족속임을 알 수 있고 달단족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레닌도 우리 민족의 지손
임을알수있다.

「 단군세기」에나와있는위의4개기록으로 미루어보아 흉노족과 왜족의 도래인(渡來人:
바다를 건너 온 사람, 즉 왜국에 건너간 우리 민족을 말함), 몽고족, 선비족이 모두 다 같은 단군의 자손으로서 우리민족의 일원임을 확인할 수 있다.

 

태조 왕건, 동족인 거란족 야만인으로 규정
모든 알타이족을 한민족으로 보는 이와같은 역사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고려태조 왕건이었다. 그는 훈요(訓要) 4조에서“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여서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의관(衣冠)과 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지어다”했고, 931년서경을 순행(巡行) 중에도“북방의 야만인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 나온 짐승들이니 놈들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군비를 견고히 하여 성 안에 한놈도 들여놓지 말아라”고명령하였다. 그렇다면왕건이‘짐승’,‘ 야만’이라 지칭하는 거란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내몽고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부족으로 그들의 정식 민족명은 키타이(qitai)며 칼을 만드는 강철이라는 뜻이다. 영락제, 건흥제 당시 가우리제국의 국민으로 편입되었고 발해제국 건국시 대조영을 도운 공신 중 이진충(李盡忠)이 바로 키타인이다.

4월호「삼국의 제사제도」에서 이미 밝혔듯이 요태조 야리아보기(耶律保機)는 황제가 되자마자 목엽산(木葉山)에 한인·한웅·한검의 삼신(三神)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국가대사 시마다 반드시 이곳에 먼저 들러 삼신에게 신고(神誥)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신시’의 신교(神敎)와 단군의 천단(天壇)제도를 계승한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황실성 야리(耶律)도 우리말이며, ‘알’이라는 뜻이다“아리아리 아라리 아라리알라”“야리야리 야라리 야라리얄라”(정선아리랑과 청산별곡의 가사)할 때의 ‘아리=알’을 풀어 쓴 말이고‘야리=얄’을 풀어 쓴 말로 달갈→달걀, 닭알→닭얄로 되듯 알→얄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위의 가사를 해석하면“알에서 알에서 물에 떠 내려온 알로부터 알라(어린애의 경상도방언)가 태어났구나”이다. 그러므로 알에서 태어난 신령스러운‘알라’로부터 몸을 일으켜 가우리, 신라, 가라의 시조가 되신 동명성제 박혁거세한 수로임금과 마찬가지로 야리씨의 조상도 알에서 태어난 난생신화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태조 왕건이 동족인 거란인을 짐승, 야만인으로 규정한 것은 당대로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후 북쪽에서 차례차례 일어난 동족의 여진족이 세운 금(金)과 후금(後金)까지도 오랑캐로 보는 그릇된 사관을 전파시켰으며 이 점은 조선조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어깨의 맨살을 드러내고 꿇어 앉아 후금의 태종 홍타시(皇太極)에게 항복하는 사건까지도 병자호란으로 역사책에 기록될 정도이다. 여기서 호(胡)는 물론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다.

 

기자조선설이 아닌 우리 사학의 정통성 찾아야

금사(金史) 태조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금의시조 함보(函普)께서는 처음에 고려에서 오셨
다. 때에 나이는 이미 60을 넘으셨다. 형님 아고내(阿古)는 불교를 즐기셔서 고려에 남으셨다.” 함보의 성은 김씨로서 금제국은 시조의 성을 따서 나라이름으로 정했다. 경주김씨인 김함보는 신라의 왕족으로서 같은 가문의 궁예(48대 경문왕의 아들)를 도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보려하였으나 궁예가 왕건에게 축출당하자 그 길로 수하들을 이끌고 회령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실은 후금의 시조 누루하치의 성씨인 애신각라(愛新覺羅)에 나타나 있다. ‘애신각라’를 해석하면 신라를 사랑하여 죽어도 신라를 잊지 말라는 뜻인데 4글자 중 처음자와 3번째자를 빼면 신라가 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한과 애신각라씨의 시조인 누루하치의 9대조 애신각라포고리옹순(愛新覺羅布庫里雍順)은 근본적으로 같은 천신선태(天神仙胎)의 탄생설화를 갖고 있다. 신라시
조의 경우 하느님을 아버지로「서유기」에 나오는 옥황상제의 천도(天桃)복숭아 밭을 관리하던 선도(仙桃)선녀를 어머니로 알에서 태어났으며 애신각라 포고리옹순의 경우 역시 하느님을 아버지로 천국에서 백두산천지로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신의 사명조(使命鳥)인 금까마귀가 옷위에 떨어뜨린 붉은알을 입에 넣어 보았다가 실수로 삼켜버려 임신한 불고륜(佛姑倫) 선녀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웅의 신시→치우의 청구(靑丘)→한검의 조선→구물단군의 대부여→천왕랑해모수의 북부여→가우리, 신라, 백제, 발해→요, 금, 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우리 사학(史學)의 정통이며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공자가「서경」에서 날조하고 사마천이「사기」에서 그대로 답습한 기자(箕子)조선설에 목을 매달아 송(宋)과 명(明)의 신하국으로 자처했던 고려와 이씨조선은 정사(正史)의 법통(法統)을 이을 자격이 없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민족의 범위를 흉노, 선비, 몽고, 여진, 왜족으로까지 확대하여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으로 다룬다면 이는 당연히 한국사의 대상 강역이 연장,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탐구의 3번째 기준은 한국사의 대상강역이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에 귀결된
다. 기존 사학은 신라와 백제를 반도안에 고정시키고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개척하였다는 광개토영락제 시절의 강역마저 반도의 북부와 지금의 요하동쪽 남만주일대로 축소시켜 놓았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가우리는 대륙의 요동에서 일어났고 신라는 대륙의 낙랑에서,백제는 대륙의 대방땅에서 일어났다 말한다.
이것을 근거로 대륙가우리, 반도가우리, 일본가우리, 대륙백제(비류백제), 반도백제(온조백제) 일본백제, 대륙신라, 반도신라, 일본신라가 각각 존재하였던 것으로 역사에 나타나있다. 충분한 문헌적 실증적 근거로 이를 증명하는 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출처:국회보 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