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대륙의 삼국(1) - 수양제의침략로고찰
반만년 정신사의 맥을 찾아서. 김중태 / 재야사학자
대륙의 삼국(1) 수양제의 침략로 고찰
수양제의 침략로는 모두 대륙에 있었다
조선, 낙랑 및 가우리 백제 신라의 3국이 대륙에 존재하였던 사실은 25史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도 우회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그 첫 번째 증거를 수양제의 침입로에서 찾아볼 수 있다. 612년 수양제는 가우리제국에 선전포고를 내리면서“추하고 혼미하고 불공한 가우리는 하북성 발해지역과 갈석산 사이에 무리들을 모아 요주와 예맥의 경계를 자꾸만 먹어들어 오니(高句麗小醜迷昏不恭崇聚勃碣之間食遼濊之) 더 이상 방관 할 수 없다.
좌(左)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의 길로 나아가고, 우(右) 12군은 점선 함자 혼미 임둔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東 ) 대방 양평 의 길로 나아가 계속 진행하여 평양에 총집결토록 하라”명령하였다.
밑줄 친 11개의 지명 중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은 한무제 유철(劉澈)이 “번(番)조선“ (예맥조선” “위만조선” “동호東胡” “북흉노” “북융北戎” “산융山戎” 등 여러이름으로 표기해 놓아 후세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놓았으며 특히 <사기>에 나오는 조선전은 단군조선이 아닌 위만조선으로 흉노전 밑에 부속되어 있음)을 멸하고 그 땅에 치하였다는 이른바 “한사군”이요, 부여 조선 요동 대방 양평은 광개토대왕시절 주자사 진(鎭)이 다스렸던 직할 통치지역이며 갈석은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갈석산(碣石山)을 말하는 것으로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동쪽 끝 알난하의 하류지역에 치하고 있다. 1500년 전의 지명들인지라 오늘날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져 버렸지만 중요한 은 위에 거명된 지명 중 한반도 안에 위치한 곳은 한군데도 없이 모두다 대륙 안에 었던 지명(地名)들이라는 사실이다.
옛 지명 해석의 허와 실
자!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과 더불어 기존사학계가 주장하는 지명의 위치를 대입시켜 수양제의 침략로를 확인해보는 가상전쟁게임을 한번 벌여보자. 이를 위해 기존사학계가 주장하는 지명들의 위치부터 알아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① 최종목적지 평양 = 지금의 북한 평양
② 낙랑, 현도, 진번, 임둔 = 북한 평양의 남쪽인 평안남도 지역과 황해도 지역
③ 요동 = 지금의 요하 동쪽
※필자주(註) : 612년 당시 요동, 요서의 지리적 개념은 산서성“요산”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가 구분 었다는 사실을 기존사학계는 전혀 모르고 있다. 나아가 지금의 요하가 요제국이 건국된 10세기 이후에 여진 수명(水名)이라는 사실도 모르거나 알더라도 써 외면하려든다.
④ 옥저 = 함경남북도와 연해주지역
⑤ 숙신 = 만주 흑룡강가의 숙신족 거주지역
⑥ 예맥 = 춘천에서 강릉에 이르는 강원도 지역
※필자주 : 이렇게 보는 이유는 <삼국유사>에 “명주(溟州)는 옛 예국이며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이니 맥(貊)국이며 맥국의 중앙에 우두산(牛頭山)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KBS춘천방송국이 위치한 산 이름이“소머리산” 혹은 “소슬머리산”이므로 상당수의 재야사학자들까지도 춘천을 예맥국의 수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우수(牛首) 우두(牛頭)가 소머리를 뜻하는 임에는 틀림없으나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해서 우수산, 우두산이 된 것이 아니다. 8월호에서 이미 말한바와 같이 천제(天祭)때 희생으로 쓰는 소, 생뢰(牲牢)제단에 바치는 소머리를 수두 혹은 소도제천의식이라 이르며 민가(民家)의 제사에는 소머리대신 돼지머리고사(告祀)를 많이 지낸다. 따라서 춘천의 소머리산은 고시절부터 이 지역을 대표하여 소도제천의식을 거행 하였던“신역(神域)”인 것이다.
⑦ 대방 = 지금의 황해도
※필자주:서울 영등포구에도 대방동이 있고 그 옆에 양평동이 있으며 강원도와 경기도 접경지역에도 양평군이 있다. 서울 대방동을 누가 작명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작명자는 백제가 대방에서 입국(立國)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편에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복된 터전을 골라 따로 도읍을 세우자 하고 드디어 비류는 아우 온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 및 <수서>에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손으로 구이(仇)란 자가 있었는데 인신(仁信)이 돈독하였다. 처음에 나라를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아 드디어 동이(東夷)의 강국이되었다”
위의 기록을 참조했을 대방동 작명자는 기존사학의 장에 입각하여 패수를 대동강으로 대수를 한강으로 보아 온조백제는 한강건너 대방동쯤에 나라를 세워 지금의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강동구 둔촌동과 하남시 일대의 위례골로 세력을 확장하여 성공했고 물이 들어오는 바닷가 미추홀(인천으로 미정)에 나라를 세운 비류백제는 실패하였다는 가정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수를 한강으로 보는 사람이나 방을 황해도로 설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모
르고 있는 사실은 대수나 대방이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이다. 帶는 허리띠 대, 띠 두를 대이며 혁대(革帶)는 가죽허리끈을 말한다. 허리띠는 방바닥에 펼쳐져 사용하지 않으면 직선이 되지만 일단 허리에 두르고 나면 허리를 닮아 둥그런 원의 형태로 모양이 바뀌어진다.
지난 호에서 지금의 요하는 말발굽을 닮은 ∩형의 강임을 말씀드린 바 있는데 허리띠형태의 물로 마제(馬蹄)형과 같은 것으로 ∩∪⊂⊃의 4가지형태의 강을 다 대수(帶水)라 부른다. 마치 옷 안쪽에 몸통이 있듯이 허리띠 안쪽은 허리통이며 “대수” 안쪽이“대방”이다.
이때 허리띠는 경계선의 표지가 되고 허리통은 경계선안에 체포되어 있는 내재(內在)적 공간개념이다.
그림Ⅰ은“대수”와“대방”간의 관계를 설정한 기본그림이다. 그림Ⅰ의 기본도를 바탕으로
그림Ⅱ를 보자. 그림Ⅱ는 고대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유명한 지금의 이라크지역이다. 터키에서 발원하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각각 남북으로 흐르는 안쪽지역이 남한넓이의 메소포타미아 평야이고 밀과 수박의 원산지로 온갖 잉여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이곳으로부터 대 수메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문명이 을 피웠고 마호메트의 이슬람제국과 사라센제국,오스만제국이 탄생되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허리띠모양을 하고 있어 우리 개념으로는“대수”가 되며 메소포타미아평야는“대방”이 된다. 이런 형태의 지역을 말발굽형, 허리띠형으로 보는 우리와는 달리 아라비아인들은 초승달 모습으로 보아 이 지역을‘초승달 지역’으로 부르고 있으며 초록색바탕에 초승달이 박혀있는 그림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이다.
그림Ⅲ은 필자가 알고 있는 현존하는 허리띠형 지역을 형상화해 본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로부터 선산해평까지 40km에 이르는 낙동강 안쪽에 상주함창들판과 의성안계벌판이 있으며 이곳이 쌀, 누에, 곶감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이른바‘삼백(三白)의 본고장’이다.
그림Ⅳ는 산서성 요산에서 발원되는 대요수를 북수(北水)로 보고 호타수를 남수(南水)로 보면 전체모양이 허리띠 같은 대수(帶水)가 되는데 그 안쪽지역에 대방이 있다.
틀림없이 이곳에서 백제가 개국되었을 이다. <삼국사기>에 백제는 대방고지(故地)에서 재
국하였다고 하였는바,“ 故地”는“연고있는땅” “옛터”라는 뜻이다. 대요수 아래쪽에 대륙의 북악(北岳)인 상산(常山: 혹은 恒山)이 있고 남쪽에 태백산과 백석산(白石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건국 이전에 이곳에 단군 주신국의 백악아사달이 있었다(자세한 내용을 다음 기회에 밝히기로 하겠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조에“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서 늘 강토를 침략하므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기존사학은 낙랑과 대방이 모두 황해도에 있었다고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주장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기존사학의 주장에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는 온조대왕의 말씀을 접목시켜 보면 결국 황해도 동쪽에 황해도가 있다는 궤변이 되고 만다. 또한 산악 투성이인 황해도 어느 곳에 허리띠모양새로 흐르는 대수가 있으며 대수 안쪽 어느 대방에 몇 백만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넓은 평야가 있는지 기존사학은 하나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면서도 대방과 한사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며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제멋대로 해석에만 열중하고 있다. 하기야 어느 동물원의 코끼리 사육사와 코끼리 코끝만을 만져본 장님이‘코끼리는 어떤 동물인가’를 주제로 논쟁을 벌인 결과 장님이 이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한사군의 반도 존재설은 허구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한사군과 대방, 요동, 요서는 워낙 중차대한 문제인지라 설명이 길어지고 말았지만 지금까지의 이해를 바탕으로 수양제의 침략루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좌(左) 12군의 침략루트는 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을 순차적으로 거쳐 평양에 이르는 길이다. 위의 지역에 기존사학계가 임의적으로 규정한 위치설정을 대입시켜 보면 좌12군은 지금의 요하동쪽의 요동으로 와 한사군의 하나인 황해도에 있는 현도로 가서 다시 압록강 북쪽의 부여로 가고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고조선 시대의 어느 지역으로 가서 함경북도 남도 지방으로 다시 남하하여 황해도 낙랑으로 와서 평양으로 간다.
어린애들의 소꿉장난도 소풍놀이도 아닌 엄연한 군사행동인데 이런 식의 군사작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만화 속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종목적지가 평양인데 첫 번째 요동에서 두 번째 평양 남쪽지역인 현도로 갔다는 것은 야구용어로 말하자면 Over-run이 되어 자동 아웃이 된다
우(右)12군의 침략루트도 마찬가지다. 임둔→숙신→갈석→대방→양평→평양으로 이어지
는 길은 첫 번째 평양 남쪽인 황해도 임둔으로 가 북만주 흑룡강 근처의 숙신으로 북상하여 서쪽의 갈석산으로 가서 황해도 대방이든 영등포 대방동이든 대방으로 와서 양평으로 가 평양으로 북상하는 길이다. 이것 역시 Over-run 자동 아웃이며 육로를 이용하든 해로를 이용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유행가 노랫말처럼 대전찍고 대구 찍고 부산까지 직행하면 되지 번거롭게 제주도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다시 일본 동경으로, 동경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목포로 가 배를 타고 부산까지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수양제의 침략루트가 제대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과 임둔→숙신→갈석→대방→양평의 정(正)위치가 반드시 대륙에 있어야만 하므로 기존사학계가 설정한 한사군 반도 존재설은 광개토대왕 기공비 앞으로 하루 빨리 사망신고서를 제출해야만 할 것이다.
수양제의 선전포고문
수양제 선전포고문의 핵심구절인 崇聚勃碣之間食遼濊之도 기존사학계는“발해 갈석사이에 군중을 모으고 요동 예맥의 땅을 천식하니”로 번역해놓았다. 최호(崔虎) 역해(譯解) <삼국사기> 이병도 역주(譯註) <삼국사기> 최남선 편수의 <삼국사기>도 하나같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똑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食遼濊之의 6글자중 어느 곳에 동녘 동(東)자가 있다고 요동이라 번역했는가? 동녘 동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遼濊之을 요동예맥의 땅이라 의도적으로 번역했다면 이들 3인의 번역자는 지금의 요하동쪽인 요동도 춘천, 강릉의 예맥국도 원래 우리땅이 아닌 수나라의 강역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612년 당시 수양제의 지정학적 개념 속에 첩첩산중으로 가로막혀 반도 내에서도 오지로 손꼽히는 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예맥국의 실체가 포함되어 있었던가?
설사 수양제가 예맥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가정하더라도 신라와 가우리 사이에 끼어있는 조그마한 산골짜기 나라 예맥국을 신라가 합병하든 가우리가 천식( 食)하든 그러한 사건이 113만 8천명의 군대를 출병시킬 만한 선전포고의 요인이 되는가? 대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왜냐하면 수양제의 지정학적 개념에 종속되어 있는 “발갈지간”은 산해관 남쪽 하북성 일대를 말하며 “요예지경”의 遼는 산서성 요산일대의 요주이고 濊는 예맥조선의 통치 지역이었던 지금의 하북 산동 산서 안휘 강소성 일대를 뜻하기 때문이다.
수양제의 선전포고문중에“掩渤海而雷震歷扶餘以電掃”는“발해를 천둥벼락 치듯 엄습하고 부여를 번개불 치듯 공격하여 싹 쓸어버리고 지나가라”는 뜻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은 갈석산에서 갈석을 떼어내고 발해에서 발자를 떼어내어 버리고 난후 두 글자를 합성시키면 산해가 되며 “발갈지간”의 발갈은 발해에서 해자를 빼고 갈석산에서 석산 2글자를 빼어 버리고 난후 합성시키면“발갈”이 된다. 북경과 천진사이에 “발해”라는 지명과 발해 동쪽 바닷가에“부여”라는 지명이 <한서> 지리지나 수대(隋代)의 지도에 나타나 있다.
고래로 지나인들은 우리의 서해를 동해 또는 황해로 부를 뿐 발해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만 산해관에서 남쪽 천진에 이르는 해안선의 굴곡진 부문에만 발해만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왜 그런가? 발해는 한문을 차용한 이두문으로 바다를 뜻하는 말이 아닌 우리말 밝은 해의 준말이기 때문이다. 하북성은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대륙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지역이기에 해안에 가까운 지역전체를 발해라 부르기도 하며 당나라 때는 이곳에 발해군을 두기도 했다.
밝은해의 준말이“발해”라면“부여”는 가장 밝게 빛나는 중천희백(中天羲白)의 뿌우연 해 부~우연해 할 때의 [부우연]이라는 형용사가 [부여]의 명사로 된 것이다.
따라서 발해와 부여는 근본적으로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수양제의 선전포고문에 등장하는 부여가 가우리제국이 태어난 졸본(卒本)부여이다.
졸본이 무슨 뜻인가? 사람이 죽는 것을 졸(卒)하다라 말한다. 홍길동은 99세로 졸(卒)하다는 홍길동이 99세로 영원히 잠들었다는 뜻이고 졸도(卒倒)는 넘어져 얼마간 의식을 잃는 것이고 뇌졸중은 뇌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이 상실되어가는 증세이며 지하철에 승차했던 승객이 차간에서 깜박 졸(卒)다가 하차지점을 놓쳐 엉뚱한 곳에서 내리는 등….
졸(卒)은 잠과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졸본부여]의 졸본은 태양이 잠을 자는 본가(本家) 즉 해의 집이라 는 뜻이다. 포항 영일만이나 강릉 정동진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태양이 바다 밑에서 졸다가 새벽녘에 기지개를 펴며 물위로 머리를 쑥 내미는 장관을 목
도했을 것이다.
산서성 요산 동쪽 요동땅에 발해가 있고 발해 곧 졸본부여가 제국이 태어난 성지(聖地)라면 이곳 복된 터전을 근거지로 삼아 요산 서쪽의 요서지역으로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히려는 가우리와 이를 저지하려는 수(隋)는 서기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도합 4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다음은 4차례에 걸친 전쟁들을 재평가하고 이 전쟁들이 아세아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아 보기로 하자.
<국회보 200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