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中 지안 고구려비 광개토대왕이 건립.
백수.白水
2013. 4. 13. 05:35
中보고서 “부친 고국양왕 무덤에 세워” 한-중 역사학자 내일 공개 학술회의
<2013.04.12 동아일보>

동아일보가 11일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해 입수한 ‘지안 고구려비’ 연구보고서(사진)에 따르면 이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이 아버지 고국양왕(?∼391)의 무덤인 천추총(千秋塚)에 세운 비석이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394∼491)이 세운 광개토대왕비와 충주고구려비보다 건립 연대가 이르다. 이 보고서는 지안 시 박물관이 작성해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보고했으며 214쪽 분량이다.
이 비의 내용은 이미 공개된 것처럼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인 수묘연호(守墓煙戶)가 관련 법령을 위반할 때 처벌하겠다는 것을 공시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김현숙 책임연구위원은 “이 비는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돌에다 법령을 새긴 일종의 성문법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며 “율령의 제정과 시행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고구려 사회발전 수준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비석에 새겨진 218자 가운데 판독한 글자는 기존 140자에서 156자로 16자 늘었다. 이 보고서는 발견 경위와 연구 과정, 비문 해석, 글자를 확대한 고해상도 사진 등을 담았다.
비의 건립 연대를 광개토대왕 때로 본 주요 근거는 광개토대왕비에 쓰인 ‘조선왕(祖先王)을 위해 묘에 석비를 세웠다’라는 구절 때문이다. 현재 조선왕을 두고 할아버지 왕 및 아버지 왕, 또는 역대 선왕 전체로 보는 설이 있다. 광개토대왕비 충주고구려비 염모총(염牟塚·한국 측은 모두루의 묘로 봄) 묘지(墓誌) 기와 등 당시의 금석문 자료와 이 고구려비의 서체를 비교한 것도 광개토대왕 때 이 비가 세워졌다는 결론을 보완하는 자료로 제시됐다.
이 보고서는 이 비가 천추총에서 서북쪽으로 456m에 위치한 왕릉 관리인인 수묘연호가 사는 곳에 세워졌다고 밝혔다. 현재 하천으로 변한 이 비의 발견 지점을 거주지로 본 것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 측과 논란이 불가피한 내용도 담고 있다. 우선 고구려의 기원과 건국에 관한 서술이다. 이 보고서는 고이(高夷)족, 염제(炎帝)족, 은상(殷商)족 등 중국 고대 민족을 고구려의 건국 주체로 보는 기존 중국학계의 설을 정리해 담았다.
보고서 “고구려 건국주체는 中고이족” 논란도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한(漢)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동북공정의 주장도 그대로 반영했다. 한국 학계는 압록강 중류유역의 토착세력과 부여에서 이주해온 세력이 한나라 세력을 쫓아내고 건국했다고 본다.
한 연구자는 “보고서는 고구려의 건국 주체 세력에 대한 한국 학계의 반론 및 견해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1월 중국 문물보를 통해 이 고구려비의 존재를 처음 공개하면서 이 비석의 여러 특징이 “고구려와 중원의 문화적 연결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 것과 맥이 닿는다.
이번 연구는 ‘지안 고구려비 보호와 연구를 위한 영도 소조’가 진행했다.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고구려연구원 교수가 조장을 맡았고 쑨런제(孫仁杰) 지안 박물관 연구원, 장푸유(張福有) 지린 성 사회과학원 부원장 등 과거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온 고구려사 전문가가 대거 참여했다.
비석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연구에 참여한 장 부원장은 최근 중국문물신식(정보)망에 ‘지안 고구려비 비문에 관한 보충 설명’이라는 글을 올려 이 비가 장수왕 때 건립됐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은 보고서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연구에 참가한 중국 측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건립 연대와 관련해 이견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첨단장비 등 좀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고증한 것이 아니어서 건립 연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고구려비 연구를 두고 중국 측의 태도가 과거보다 훨씬 유연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11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이 재단에서 연 비공개 학술회의와 13일 한국 고대사학회가 고려대에서 여는 학술회의에 겅 교수와 쑨 연구원이 참석하는 게 대표적인 변화다. 이들은 과거에는 한국 학계의 초청에 거의 응하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이들의 한국 학술회의 참석을 두고 고구려사 문제에서 양국의 학술 교류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한다. 또 고해상도 탁본과 연구보고서 등 관련 자료를 한국 측에 신속히 전달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김현숙 책임연구위원은 “고구려사와 관련해 한중 간에 학술적인 이견이 없을 수 없지만 이를 한중이 함께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새로운 고구려 비석의 발견을 계기로 한중 두 나라 학자들이 고구려 유적, 유물의 공동조사와 공동연구를 통해 고구려사 연구의 수준을 높여나갔으면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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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고구려비 장수왕이 세워
中학계 “427년 건립” 잠정결론. 광개토왕 건립설 자진철회 논란
<세계일보: 2013년 04월 11일자>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에서 지난해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사진)’가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라고 중국 학계가 잠정 결론을 내렸다.
지안 고구려비 연구에 참여한 장푸여우(張福有) 지린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은 10일 ‘중국문물신식망’에 실은 보고서를 통해 지안 고구려비의 건립 연도가 장수왕 15년 때인 427년 정묘년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1월 이 비석 발견을 공개할 당시 중국측이 내세운 광개토왕 건립설을 스스로 수정, 철회한 것이다.
한국 학계도 지안 고구려비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에 앞서 건립된 현존하는 고구려 최고(最古) 비라는 견해를 보여 왔다. 그러나 중국측이 장수왕 건립설을 들고 나옴에 따라 이 비석의 건립 연대는 물론이고 그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중국 연구팀은 또 최초 발표 때에 비해 열여섯 글자를 추가로 판독해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비석에 새겨진 218자 가운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에서 156자로 늘어났다. 아울러 보고서는 지난 1월 발표 때와 마찬가지로 지안 고구려비와 중원 문화와의 연계성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비문 자체가 곧 중국의 고대 비문”이란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예를 들어 비문의 ‘繼古人之慷慨’(고인의 강개함을 이어받아)라는 표현은 동진(東晋)시대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에 나오는 ‘伊古人之慷慨’와 첫 글자만 다른점을 꼽았다. 또 ‘四時祭祀’(사시에 제사를 거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안 고구려비는 작년 7월 광개토대왕비, 중원 고구려비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발견된 고구려비다. 중국은 그간 지안 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과거 역사 왜곡 논란을 촉발시킨 ‘동북공정’ 관여 학자를 대거 참여시켜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지안 고구려비 연구에 참여한 장푸여우(張福有) 지린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은 10일 ‘중국문물신식망’에 실은 보고서를 통해 지안 고구려비의 건립 연도가 장수왕 15년 때인 427년 정묘년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1월 이 비석 발견을 공개할 당시 중국측이 내세운 광개토왕 건립설을 스스로 수정, 철회한 것이다.
한국 학계도 지안 고구려비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에 앞서 건립된 현존하는 고구려 최고(最古) 비라는 견해를 보여 왔다. 그러나 중국측이 장수왕 건립설을 들고 나옴에 따라 이 비석의 건립 연대는 물론이고 그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중국 연구팀은 또 최초 발표 때에 비해 열여섯 글자를 추가로 판독해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비석에 새겨진 218자 가운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에서 156자로 늘어났다. 아울러 보고서는 지난 1월 발표 때와 마찬가지로 지안 고구려비와 중원 문화와의 연계성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비문 자체가 곧 중국의 고대 비문”이란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예를 들어 비문의 ‘繼古人之慷慨’(고인의 강개함을 이어받아)라는 표현은 동진(東晋)시대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에 나오는 ‘伊古人之慷慨’와 첫 글자만 다른점을 꼽았다. 또 ‘四時祭祀’(사시에 제사를 거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중국의 주례(周禮)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안 고구려비는 작년 7월 광개토대왕비, 중원 고구려비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발견된 고구려비다. 중국은 그간 지안 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과거 역사 왜곡 논란을 촉발시킨 ‘동북공정’ 관여 학자를 대거 참여시켜 우려를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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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보기
[동북아역사재단 특집1] 지안(集安)고구려비의 발견과 비문의 내용 <2013.02.19>
☞ http://blog.naver.com/correctasia/50163338720
[동북아역사재단 특집2] 지안(集安)고구려비의 내용과 그 역사적 의미<2013.02.20>
☞ http://blog.naver.com/correctasia/50163458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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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지안 新고구려비 실체 놓고 다양한 분석
<세계일보: 2013년 03월 02일자>
고구려서 중원문화 독창적 변용과정 잘 나타내
고대사는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많은 영역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중국 지안에서 새로운 고구려비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대사 학계는 온통 흥분에 휩싸였다. 가장 오래된 고구려 비석으로 보이며 광개토대왕릉비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 관심이 집중됐다. 발견 소식이 전해지고 두 달이 가까워진 2월 말 현재, 지안 고구려비(비석)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학계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석과 관련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가치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지난 22일 고구려발해학회가 ‘신발견 고구려비의 예비적 검토’란 주제로 연 정기발표회 등은 이런 학계의 움직임을 대변한다.
비석의 주인공은
비문에는 비석의 주인을 밝힌 내용이 없어 추측을 해야 한다. 공석구 한밭대 교수는 비석이 발견된 지안 마셴하(馬線河)에서 456m 떨어진 ‘천추묘’에 세워졌던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놨다. 천추묘는 광개토대왕의 삼촌인 소수림왕, 혹은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것이라는 분석이 많은 왕릉이다. 비석 발견 지점 주변에는 천추묘 외에 1147m 거리에 서대묘가, 600m 거리에 마셴묘구2100호묘가 있긴 하다. 공 교수는 비석이 거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464.5㎏이나 된다는 점에서 멀리 떠내려왔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천추묘에 무게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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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 고구려 비석은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중원 고구려비 2기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반면, 중원 고구려비는 비면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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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
중국문물국은 비석에 쓰인 예서를 고구려가 공식 서체로 삼았고, 비석의 형태가 중국이 동한 이래 주로 사용하던 ‘규수형’이라는 점에서 중국 왕조와 고구려의 연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동북아역사재단 고광의 박사는 “큰 흐름에서 볼 때 비석은 고구려가 수용된 중국 문화를 독창적으로 변용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고 박사는 비문의 서체는 표준적인 예서라기보다는 예서와 해서의 과도적 요소가 많은 ‘신예체’에 가까워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과의 서체 교류를 통해 예서의 발전 단계를 지나 해서로 서체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비석이 광개토대왕릉비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광개토대왕릉비의 독특한 서체는 변화 과정 끝에 고구려가 선택한 독창적 결과가 되는 것이다. 또 비석이 세워질 당시 중국에서는 낭비가 심한 귀족의 장례 풍습을 고치기 위해 ‘금비령’(비석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함)이 내려졌으나 고구려는 선대왕의 능에 묘비를 세우는 정책을 추진하며 독자적인 수묘 정책을 시행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몇 가지 의문점
비석의 가치는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과 광개토대왕릉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점에 집중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광개토대왕릉비의 단계에서 비면을 다듬은 중원고구려비를 거쳐 정형화된 비석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를 보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사실 위주의 소박한 문체가 쓰인 반면 비석은 한어 고문체가 사용되어 있다는 점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주몽의 모계를 ‘하백의 따님’이라고 한 반면 비석에는 ‘하백의 손자’라고 재해석되어 있다. 이는 비석이 현재의 추정과 달리 광개토대왕릉비 이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비석의 진위 문제를 따져볼 구석도 있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표현이 보이지 않고 모순된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비석에는 고주몽의 건국을 ‘창기(創基)’라고 하면서도 ‘개국’이란 표현을 동시에 썼다. 서 교수에 따르면 개국은 창기와 달리 주로 제후국의 건국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