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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지안 고구려비 광개토대왕이 건립.

백수.白水 2013. 4. 13. 05:35

 

<세계일보: 2013년 03월 02일자>
 

고구려서 중원문화 독창적 변용과정 잘 나타내

고대사는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많은 영역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중국 지안에서 새로운 고구려비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대사 학계는 온통 흥분에 휩싸였다. 가장 오래된 고구려 비석으로 보이며 광개토대왕릉비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 관심이 집중됐다. 발견 소식이 전해지고 두 달이 가까워진 2월 말 현재, 지안 고구려비(비석)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하지만 학계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석과 관련한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가치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움직임도 시작됐다. 지난 22일 고구려발해학회가 ‘신발견 고구려비의 예비적 검토’란 주제로 연 정기발표회 등은 이런 학계의 움직임을 대변한다.

비석의 주인공은
비문에는 비석의 주인을 밝힌 내용이 없어 추측을 해야 한다. 공석구 한밭대 교수는 비석이 발견된 지안 마셴하(馬線河)에서 456m 떨어진 ‘천추묘’에 세워졌던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놨다. 천추묘는 광개토대왕의 삼촌인 소수림왕, 혹은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것이라는 분석이 많은 왕릉이다. 비석 발견 지점 주변에는 천추묘 외에 1147m 거리에 서대묘가, 600m 거리에 마셴묘구2100호묘가 있긴 하다. 공 교수는 비석이 거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464.5㎏이나 된다는 점에서 멀리 떠내려왔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천추묘에 무게를 뒀다.

지안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 고구려 비석은 광개토대왕릉비(왼쪽)와 중원 고구려비 2기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반면, 중원 고구려비는 비면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다

 

비석 조성 시기를 추측할 단서인 비문의 간지 ‘무○(戊○·○는 마모가 심해 글자를 확정키 어려움)’가 광개토대왕 18년(408)인 ‘무신(戊申)’일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지금까지는 고국양왕 5년(388)인 ‘무자(戊子)’ 혹은 장수왕 6년(418) ‘무오(戊午)’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탁본상 무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면서도 “비문 내용의 전후관계를 고려할 때 광개토대왕이 408년 태자를 정하면서 역대 왕들의 수묘(무덤 관리)체계를 안정화시켜 태자책봉과 연결하는 의미를 뒀을 수 있다”고 밝혔다.

가장 오래된 고구려 비석으로 추정되는 지안 고구려비. 특히 광개토대왕릉비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고구려 독창성의 확인

중국문물국은 비석에 쓰인 예서를 고구려가 공식 서체로 삼았고, 비석의 형태가 중국이 동한 이래 주로 사용하던 ‘규수형’이라는 점에서 중국 왕조와 고구려의 연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동북아역사재단 고광의 박사는 “큰 흐름에서 볼 때 비석은 고구려가 수용된 중국 문화를 독창적으로 변용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고 박사는 비문의 서체는 표준적인 예서라기보다는 예서와 해서의 과도적 요소가 많은 ‘신예체’에 가까워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과의 서체 교류를 통해 예서의 발전 단계를 지나 해서로 서체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비석이 광개토대왕릉비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광개토대왕릉비의 독특한 서체는 변화 과정 끝에 고구려가 선택한 독창적 결과가 되는 것이다. 또 비석이 세워질 당시 중국에서는 낭비가 심한 귀족의 장례 풍습을 고치기 위해 ‘금비령’(비석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함)이 내려졌으나 고구려는 선대왕의 능에 묘비를 세우는 정책을 추진하며 독자적인 수묘 정책을 시행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몇 가지 의문점

비석의 가치는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과 광개토대왕릉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점에 집중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광개토대왕릉비의 단계에서 비면을 다듬은 중원고구려비를 거쳐 정형화된 비석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를 보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사실 위주의 소박한 문체가 쓰인 반면 비석은 한어 고문체가 사용되어 있다는 점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주몽의 모계를 ‘하백의 따님’이라고 한 반면 비석에는 ‘하백의 손자’라고 재해석되어 있다. 이는 비석이 현재의 추정과 달리 광개토대왕릉비 이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비석의 진위 문제를 따져볼 구석도 있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표현이 보이지 않고 모순된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비석에는 고주몽의 건국을 ‘창기(創基)’라고 하면서도 ‘개국’이란 표현을 동시에 썼다. 서 교수에 따르면 개국은 창기와 달리 주로 제후국의 건국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