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차탄천의 추가령 구조곡 - 장진교

백수.白水 2013. 4. 24. 06:31

 

 

전곡읍내를 휘돌아 에서 西로 흐르는 강(청색깃발)이 한탄강이고, 에서 한탄강으로 합류하는 강이 차탄천(車灘川)이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에서 차탄천을 건너 연천군 군남면 황지리로 이어주는 다리가 바로 장진교(초록표지)다. 그리고 합수지점(노란표지)의 오른쪽 한탄강 북안(北岸) 수직단애(斷崖)용암대지에 은대리성(빨간표지)이 있다.

 

 

 

전곡 읍내를 벗어나 왼쪽으로 가다 보면 장진교를 만난다. 다리 오른쪽에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이 곳이 바로 학창시절 추가령 지구대라고 배우는 곳이다.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일대를 포괄하는 추가령 구조곡(지구대)은 지질학적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이들 경계선 북쪽은 10억 년 이상 된 선캄브리아대의 편마암류와 고생대 지층이 우세한 반면 남쪽은 중생대 지층이 넓게 분포하여 남쪽으로 갈수록 형성 연대가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용암 분출 역사를 한 눈에

 

 

대륙이 충돌하면 한쪽 대륙이 다른 대륙 위로 올라탄다. 이 때 밑에 깔린 대륙은 엄청난 압력과 온도를 받아 고압변성암인 각석암이 되고 이것이 지각 변동에 의해 지표로 올라 올 수도 있다. 지하 수십 에서 잠자고 있어야 할 각섬암이 임진강과 한탄강 주변에서 눈에 띄는 이유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철원과 연천 지역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들 가운데 물이 깊고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 있는데 매우 이상하다.’

 

추가령 지구대를 가리켜 들 가운데 물이 깊다고 표현했으며 현무암을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용암 분출시 온도는 1000∼1200도이며 식어서 600∼700도까지 내려오면 굳어져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다. 용암은 규소 함유량이 65퍼센트를 넘으면 산성, 52퍼센트 이하면 알칼리성, 산성과 알칼리성 사이를 중성용암이라 부른다. 산성용암일수록 온도가 낮으며 점성이 높아 멀리 흘러가지 못하고 알칼리성 용암일수록 온도가 높고 점성이 낮아 멀리 흘러간다. 즉 한탄강 상류에서 발견되는 용암은 산성이고 임진강까지 멀리 흘러간 용암은 알칼리성이라 볼 수 있다.

 

과거 한탄강을 따라 흘러온 용암은 전곡에서 병목현상을 일으켜 임진강 상류 쪽으로 역류하기도 했다. 두 강의 합류점에서는 현무암의 두께가 30m에 이르렀고, 여기서 12상류인 선곡리까지 6m 두께의 현무암층을 남겨 놓았다. 한탄강이 영평천과 합류하는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아우라지도 용암 병목지점으로 이곳에서는 한탄강 화산지형의 백미인 베개용암(Pillow Lava)’을 볼 수 있다......

 

차탄천이 한탄강에 합류되기 전인 용암평원 인근에서 강 주변을 따라 거대한 적벽을 이루고 강 안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습곡이라고 불리는 이 바위는 양층에서 거대한 횡()압력을 받아 마치 S자 모양으로 휘어진 것이다. 습곡 약간 서쪽으로는 광대한 수직 절벽이 펼쳐져 있고 적벽 사이사이에 용암 산화층인 크랭커(cranker)가 화산이 폭발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하상(河床)을 흐르면서 부글부글 끓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연천군 전곡읍 장탄리에는 자살바위라는 특이한 수직절벽도 보인다. 자살바위는 약 27만 년 전 폭발한 화산분출보다 약 15천만 년이나 앞선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 활동에 의해 화산재가 지속적으로 쌓여 엉겨 붙어 만들어진 응회암이다. 자살바위를 이루고 있는 응회암은 희귀한 녹색을 띠고 있다. 화산재에 들어있는 유황성분이 녹색으로 변한 것이다. 이곳 앞 강변에도 화산재가 쌓여 오랜 세월 굳어져 생긴 아주 특이한 모습의 응회암(Tuff)들이 나름대로 자그마한 섬처럼 쌓여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자살바위 앞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것이 만만치 않지만 일단 절벽 앞에 서면 길을 찾던 고생은 뒤로 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물도, 용암도 모든 것이 섞이는 '융합'의 한탄강> 중에서

 

 

 

장진교. 아래 사진은 모두 차탄천의 동쪽언덕(동벽-전곡읍 은대리)에서 서쪽 벽(군남면 황지리)을 찍었다.

 

 

 

 

 

 

 

 

 

 

연천의 차탄천

http://blog.daum.net/jdh512/15853251

 

 

 

 

차탄천은 철원군 철원읍 독서당리(760고지 북쪽계곡)에서 발원, 연천군청 소재지인 차탄리 한복판을 북쪽에서 휘감아 돌면서 南東流해 은대리 평원의 끝을 따라 계속 흐르다가 전곡읍 삼형제 바위에서 한탄강에 유입되는데 군내구간의 길이는 30.8km 넓이 60m이다.

 

차탄천이 세인들에게 주목되는 것은 고교 지리교과서에 자주 등장되는 추가령구조곡의 핵심지대로 서울과 원산지방을 연결해주는 경원선 철도가 이 차탄천변을 따라 달리며, 한탄강의 제 1지류로 연천군민들의 젖줄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차탄천변을 따라 약 2정도 더 북상하면 단절된 경원선 철교를 옛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데 차탄천 한가운데 4개의 콘크리트 기둥위에 철교가 주위와 단절된 채 외따로이 놓여있다.

 

지상의 철도는 일제가 전쟁시 철이 부족해 전부 뜯어갔다고 한다. 철원 정연리 한탄강 본류 위에 있는 금강산철교와 더불어 분단의 현장을 잘 보여주는 철도 유물이다.

 

대광리를 지나서 연천읍내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던 차탄천을 지금처럼 거대한 인공제방을 쌓아 읍내 외곽으로 물줄기를 돌린 것은 김일성이라고 한다.

 

원래 차탄천은 수레여울(차탄)이 있기에 하천명이 유래했으며 김일성이 현 연천군 의회청사 옆을 흐르던 장진천을 외곽으로 돌리려고 인공제방을 쌓도록 명령해 지금은 물줄기가 바뀌었다. 수레여울은 차탄리의 공굴다리 북쪽 옛 장진천(현 차탄천)에 있는 여울이다. 고려 말 조선 개국시 고려의 진사 이양소가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숨어 지낼 적에 후일 태종이 된 이방원이 이양소를 만나러 왔다가 이 여울에서 교자가 빠졌기에 수레여울-수레울이 되고 이것을 한자명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차탄이 되었다

 

차탄천은 은대리 용암평원 인근 풍천관광농원 부근에 이르러서 용암 수직 적벽을 이르며 이곳에는 강 가운데 하중도인 돌섬이 있는가 하면 적벽 곳곳에 용암누층이 보이고 그 사이 사이에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부정합층으로 용암산화층인 크랭커(cranker)가 보인다.

 

이곳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반도가 5억년 전 둘로 나누어져 있다가, 2억년 전에 호주 서쪽에 있던 한반도 남부가 이동하여 북중국에 붙어있던 한반도 북부와의 대륙 충돌시 생겨나는 각섬암이 하상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즉 임진강, 한탄강 일대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 두 땅덩어리가 쥐라기때 충돌하면서 붙어서 하나의 한반도를 형성한 곳이며, 충돌과정에서 고압 광물들이 생겨나는데 각섬암도 이것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 장진교 아래에 도달하면 양면이 수직 현무암 적벽을 이루고 무수히 많은 절리가 펼쳐져 처음 보는 사람도 흥분하게 되는데 이곳은 단열대를 경계로 지각이 양쪽으로 구분되는 블록(block)현상이 일어나 양면이 단애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면의 단애는 은대리 용담대지의 남쪽 끝에 해당되고, 남쪽면의 단애는 차탄천에서 가장 멋있는 돌기둥 모양의 용암절리가 발달된 곳이다.

 

수백개의 돌기둥이 정육각형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갈라져 만들어낸 절리(joint)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신비스러움에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이곳의 주상절리는 남한의 육지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모식적인 곳이다.

 

장진교 남단 차탄천 연변 하수처리장을 끝으로 해서 차탄천은 38.5(100)의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 하고 은대리 석벽 끝에서 한탄강에 유입된다. 차탄천이 한탄강과 만나는 곳에는 삼형제에 관한 전설 한편이 전해온다.

 

일찍 남편을 여윈 한 여인에게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삼형제가 밭에서 김을 매다 더위를 식히러 한탄강에 뛰어들었다가 막내아우가 나오지 못하게 되자 형들이 차례로 구하러 들어가 모두 빠져 죽자, 어머니가 매일 강가에 나와 통곡을 했다. 어느 날 바위 세 개가 한탄강 한복판에 솟아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들이 제일 큰 바위에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동네 아이들이 빠져 죽지 말라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지금도 제일 큰 삼형제 바위 꼭대기에는 넓은 바닥면이 있어 제사를 지냈던 옛 흔적을 엿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