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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산성지(泰封山城址) 또는 성동리산성지(城東里山城址)

백수.白水 2013. 5. 7.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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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동리산성 / 우리 터, 우리 혼.

 

 

 

성터는 포천시 영중면 성동2763번지에 소재하나 인근마을 어디에도 안내 표지판이 없다. 성동5리 대로변에 있는 음식점(3층 건물의 1층이 해물짬봉집)건물에서 잣골로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산 정상부에 있는 성터 근처까지 좀 험하긴 하지만 자동차로 진입이 가능하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2리 향교골의 있는 산성지로, '城東里 山城址'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포천현 고적조>에 의하면 성산고성은 석축으로 둘레1,93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산성은 918년 궁예가 철원에서 그의 부장이었던 왕건군에게 쫓길 때 한때 웅거하며 항전했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궁예왕은 지연전을 펴기 위해 북강(현 한탄강)에서 백성과 군사들이 일렬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달, 급히 축성한 성이라 하나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그는 이곳 싸움에서 패하여 패주골을 경유, 울음산(명성산)에서 도읍지 철원을 바라보고 통곡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산성의 규모가 본래 어느 정도인지 확실치 않으나 현재 높이 2-5m, 둘레1-2km정도 추측되는 성지가 불연속적으로 남아있으며 성벽의 일부는 양호한 상태다. 특히 정상의 성지 내에는 축성의 필수조건인 지름3m가량의 우물이 남아 있어 군사들의 식수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한 정상 일대에는 기와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이 추정된다.

 

접경지역을 답사하다보면 三國時代에 만들어졌던 산성이나 보루자리에 현재의 우리 군이 벙커 등을 구축해 놓고 방어시설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태봉산성지에도 현재 우리 군의 군사시설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 산성이 위치와 규모로 보았을 때 반월산성을 보위하는 전()방위 산성으로서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반월산성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통일신라시기까지 사용되다가 고려시대에는 폐성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광해군 10년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개축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반월산성의 중심 연대는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에 의하여 초축(初築)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성동리산성도 반월산성과 동시대에 축성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태봉산성이라는 산성의 명칭은 이곳이 조선조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사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태를 안치했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해 전국에서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 태가 묻힌 곳()을 태봉(胎峰)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태봉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추측컨대 성동2리에 있는 산에 고구려 때 축성된 산성이 있었는데, 이곳에 조선조 효명세자의 태를 묻으니 사람들은 이 산을 태봉(胎峰)이라 하였고, 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태봉산성(胎峰山城)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발음이 같은 궁예의 태봉(泰封)으로 둔갑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전문가들은 이 유적이 궁예의 태봉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포천현 고적조>城山古城...이라고 나온다. 이 있으니 당연히 성산(城山)이고, 성산은 옛 우리말로 잣뫼가 된다. 현재 산성이 있는 골짜기를 예로부터잣골’로 부른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되는 곳, 오두산성 통일전망대가 있는 동쪽마을이름이 성동리. 성의 동쪽에 있는 마을은 다 성동리(城東里). 성동(城東)이라는 지명은 흔하다. 따라서 성동리산성(城東里山城)이라는 이름은 제대로 된 명칭이 아니다. 서울역의 앞쪽을 역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서울역을 역전 역이라고 불러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태봉산성(胎峰山城)이 더 나을 것 같다,

 

 

고대와 현대의 공존.

 

 

 

 

 

성돌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성 정상부

 

이지역에서 안내판이라곤 성터 정상부에 달랑 꽂혀있는 이것이 유일하다.

 

성 아래 마을과 도로가 보인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평평하고 제법 넓은 성터에는 잣나무가 심어져 있다.

 

우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