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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眉叟) 허목(許穆) 의 임진강 기행 / 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백수.白水 2013. 5. 10. 10:15

 

미수기언(眉叟記言) / 기언 별집 제15권 / 기행(記行) 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번역; 한국고전번역원]

 

九年六月三日余入京前日趙克善德裕丈死而未殮矣嗟乎此丈頃年以老辭官人皆以爲善也今其亡矣上舍生金壽蕃秀而其父大司成貞夫人未沒喪而相繼亡蕃持喪四年哀毀而死嗚呼命耶時以海囚赦還及打圍講定事兩司爭論而余入京卽辭遞言責且無他事故無所論列玉堂小吏來言召對事

 

금상 9년(1658, 효종9) 6월 3일에 서울에 들어왔다. 전날에

조극선 덕유(趙克善德裕)

선생이 별세하고 아직 염(殮)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슬프다! 선생이 지난해에 연로함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 사람들이 모두 잘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이번에 별세한 것이다. 상사생(上舍生)

김수번(金壽蕃)

은 훌륭한 자질을 지녔는데, 그의 부친 대사성(大司成)이 정부인(貞夫人)의 상을 마치기도 전에 연이어 별세하여 김수번이 4년 동안 상을 치르다 그만 슬픔으로 죽고 말았다. 슬프다! 이것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때 마침 바닷가로 귀양 간 죄수들을 사면하는 일과 임금이 사냥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로 양사(兩司)가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서울로 들어온 즉시 언관(言官)의 직임을 사직하였고, 또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논열할 것도 없었다. 옥당(玉堂)의 소리(小吏)가 와서 임금이 소대(召對)하겠다 하신다고 말을 전해 왔으나

 

※ 무술 주행기는 한강에서 하류로 내려가 다시 임진강을 거슬러 연천군 징파리 강가의 징파나루(징파도)까지 34일 동안 배를 타고 가며 주위를 둘러 본 기행문이다.

 

辭疾冒雨出城初十日也乘舟瓮店前浦從之後過土亭來土亭者土亭丈人所築者也丈人有高行異才傲物自戲者也棹下西江待潮退子陵沽酒來見相對甚懽旣別去至蠶嶺下雨中觀仙遊峯過楊花渡至幸州山城下上有癸巳勝捷碑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비를 무릅쓰고 성을 나온 것이 10일이었다. 옹점(瓮店)의 앞 물가에서 배를 탔는데, ()과 규()가 따랐다. 규는 뒤에서 토정(土亭)을 들렀다 왔는데, ‘토정이란 토정장(土亭丈 이지함(李之菡)을 말함)이 지은 것이다. 그 어른은 높은 행실과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서 세속을 우습게보며 스스로 즐기는 분이었다.노를 저어 서강(西江)으로 내려가 조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자릉(子陵: 현루(玄樓) 이경엄(李景儼))이 술을 사 가지고 보러 왔는데, 서로 상대하니 매우 즐거웠다. 그와 작별하고 나서 잠령(蠶嶺) 아래에 이르러 빗속에선유봉(仙遊峯)을 보고 양화(楊花)나루를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 아래에 이르니, 위에는 계사년(1593, 선조26)의 승첩비(勝捷碑)가 있었다.

 

(翃)과 규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의 조카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 土亭址는 마포대교의 북단인 마포구 토정동 138(한강 삼성아파트 경로당 좌측)에 있다.

 

서울 부근의 한강은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 불렸다. 팔당댐은 도미진, 광장동 앞은 광진, 뚝섬 앞쪽은 동호, 한남동 앞쪽은 한강, 동작동 앞쪽은 동호 혹은 동작강, 노량진동 앞쪽은 노들강, 원효로동 앞쪽은 용호 또는 용산강, 옛날에 마포나루가 있던 서울대교 언저리 쪽은 삼개 또는 마포강, 송파 부근은 삼전도, 양평동 부근은 양화도, 가양동 앞은 공암진, 오늘의 2한강교가 있는 쪽은 서호 또는 서강이었다.

 

더불어 서울 밖의 한강도 오늘의 경기도 여주군 언저리는 여강이었고, 임진강과 합하여 서해로 빠져드는 경기도 김포군 북쪽은 조강이었고, 행주 부근을 왕봉하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그곳 주민들은 이들을 쓰고 있다.

 

삼강(三江)이란 한강의 세 부분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한남동 일대의 한강, 용산과 원효 일대의 용산강, 마포와 서강 일대의 서강을 이른다.

 

동호(東湖)옥수동 江岸인 두모포라 불리던 지역으로 도성의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동호로 불렀으나 실제는 두모포가 더 알려진 이름이다. 중랑천이 한강과 합쳐지는 곳으로 두못개, 두멧게, 두물개 등으로 불렀다.

 

용산강(龍山江, 南湖, 龍湖)은 용산 일대의 한강을 일컫는 이름으로서, 만초천과 한강이 만나 넓고 잔잔한 확과 같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서강(西江, 麻浦, 西湖, 麻湖)은 삼개나루 곧 麻浦. 마포는 남으로는 용산의 높은 언덕이, 북으로는 잠두봉(절두산)석벽이 양화도 위로 솟아나온 그 사이에 위치한다. 사리(大潮) 때 바닷물이 들어오면 해상의 많은 배들이 몰려들어 하나의 큰 호수와 같은 형태를 이룬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잠두봉(蠶頭峰)은 마포구 양화도 동쪽 한강가에 돌출된 봉우리로 가을두, 덜머리, 잠두령, 용두봉, 절두산, 들머리, 용산이라고도 한다. 높이 80m로 와우산과 함께 한강변에 있으며 한강에 임박하여 그 뻗어 내려간 산세가 약간 머리를 들고 있어 이를 용의 머리, 즉 용두봉으로 보아 용산이라 이름 하였다. 서기 97(백제 기루왕 21)에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한강에 두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에 "잠두봉(蠶頭峯)은 세속에서 가을두(加乙頭)라 부르고,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선유도 조선시대까지 선유도에는 ‘선유봉(仙遊峯)’이라는 봉우리가 있던 곳이었다. ‘신선이 놀던 산’. 이름에서 짐작되듯 한강의 수려한 승경 중 하나였다. 특히 조선시대 선유봉은 강 북쪽의 잠두봉(지금의 절두산)과 함께 뱃놀이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많은 문인들이 배를 띄우고 선유봉과 잠두봉을 오가며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 18세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의 그림 경교명승첩양천팔경첩에는 선유도 일대의 옛 모습이 잘 남아있다. 선유봉만을 그린 선유봉이란 그림도 전해지는 데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 선유도 공원엔 선유정이란 정자가 서 있다. 멀리 인왕산, 남산, 북한산, 도봉산이 건너다보인다. 선유봉은 1925년 한강 대홍수 이후 일제의 한강개수계획에 의해 주민들이 내쫓겼고, 여의도 비행장을 만들 골재를 채취하느라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후 1965년 양화대교가 개통된 후 한강 개발이 시작되면서 선유도는 섬이 됐다.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선유도 정수장이 폐쇄된 뒤 2002년부터는 폐정수장 시설을 활용한 재활용 생태공원으로 거듭났다.

 

양화나루(楊花津)는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으며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절두산성지와 같이 있다.

 

 

宿於舟中聞早潮船則潮水正滿俄而乘潮落下孔巖至巴陵浦口近海江水始濁有鹹氣過鳧島其南岸章陵章陵下金浦郡也舟人西指深嶽與鳳城相對此海口也其外祖江祖江者二江之會入海亦曰三岐河其北岸交河之烏島城西南望江華

 

배 안에서 묵었다. 듣기로 이른 조수 때에 배를 출발시키면 조수가 만조(滿潮)를 이룬다 하므로 조금 뒤에 조수를 타고 공암(孔巖)으로 내려가서 파릉(巴陵)포구에 이르렀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강물이 흐려지고 짠 기운이 있었다. 부도(鳧島)를 지나니, 남안(南岸)은 장릉(章陵 원종(元宗)의 능)이었다. 장릉 아래는 김포군(金浦郡)이다. 뱃사람이 서쪽으로 심악(深嶽)을 가리키며, 봉성(鳳城)과 마주 보는 것이 해구(海口)라고 하였다. 그 밖은 조강(祖江)인데, 조강은 두 강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삼기하(三岐河)라고도 한다. 그 북쪽 언덕이 교하(交河 지금의 파주군의 옛 이름)오도성(烏島城)이고, 서남쪽으로 강화(江華)가 바라보인다.

 

 

공암진(孔岩津)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로 탑산이라고 불린 조그마한 바위산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탑산은 한강 쪽으로 우뚝 솟은 자색의 절벽이 유명했는데, 밑으로 넓은 굴이 파여 있어 그 주변을 공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주변이 공암진으로, 김포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뱃길의 중간 참으로, 또 강너머 고양군의 행주나루와 이어주는 나루터로서 양화진 관할아래 진선이 배치되었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옛날 이름은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다. 이 이름에서 파의바위를 뜻하는 말인데, 한자를 빌려 쓸 때는 파의또는 파혜’(波兮)로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별사파의’, ‘구사파의’, ‘밀파의등의 땅이름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이름들은 대체로 고개를 뜻하는 ’()이나 바위를 뜻하는 ’()으로 바뀌었다.

 

바위의 옛말은 바회. <감산사미륵보살광배명>에는 동해유반변’(東海攸反邊)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때의 유반바회. ()바 유’()와 같은 뜻이며, ()는 한자의 음을 표기한 것이다. ‘마음심음’(心音), ‘가을추찰’(秋察)로 표기하듯이, 한자를 빌려 우리말 단어를 표기할 때 뜻을 중심으로 하고 음을 덧붙이는 원리를 따른 것이다. 궁산(宮山)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鎭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이 담당한 다양한 역할 때문에 여러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궁산(宮山)은 공자(孔子)를 배향(配享)하는 양천향교가 있는곳으로 공자를 숭배하는 의미로 궁산이라 했고, 파산(巴山)은 삼국시대 이곳의 지명이 제차파의(齋次巴衣)라서 파산이라 했으며, 제차(齊次)는 갯가, 파의(巴衣)는 바위로 '갯가에 바위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양천고을의 옛 이름을 파릉(巴陵)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은 지금은 두 개의 산봉우리로 보이지만 본래는 홍제천(弘濟川)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있었던 퇴적물로 형성된 난지도(蘭芝島)라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난지도는 난()과 지초(芝草)가 자라던 아름다운 섬이라 해서 난지도라 불렀고 섬의 모양이 오리가 물위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오리섬 또는 압도(鴨島)라고도 불렀다. 그렇다면 난지도가 혹시 부도(鳧島)? 하지만 그것은 섬이 아니라 모래톱이다. 조수간만의 차로 강물이 줄어들면 나타났다가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면 사라지고마는 그런 모래톱 섬인 것이다. 난지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겸재의 그림에는 난지도가 강 가운데에 우뚝하지만 지금은 강기슭으로 물러 나 있는 것이 강물의 흐름이 바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강물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 것은 퇴적물들이 연이어 쌓이면서 모래톱의 크기가 점점 커지면서 그러했던 것이리라.<이지누>

 

장릉(章陵)김포시청 서쪽의 장릉산에 있다.

 

심학산(尋鶴山) 경기도 파주시 신남리에 있는 194m의 산. 산 주위를 흐르는 한강물을 산이 막고 있다하여 수막산(水漠山)이라고 했고, 밀물과 홍수가 만나면 산이 물에 잠겨 심악(深嶽)으로 불렸다고 한다.

 

강화는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아주 먼 옛날, 3개의 섬이 하나로 뭉치기 훨씬 전에 강화도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렸다. 고구려 때는 혈구(穴口)’, 이후 신라 땅이 된 뒤에는 해구(海口)’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지명에는 모두 구멍이나 을 뜻하거나, ‘여성(女性)’을 상징하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이나 ()’ 모두 그러하거니와 갑비고차 또한 마찬자지다. ‘갑비고차란 말의 흔적은 현재도 갑곶리갑곶이로 남아있는데, ‘갑곶이의 갑()은 여성을, 고지(곶이)는 우리말로 입()을 뜻한다고 한다. 갑비고차는 혈구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直西爲德水之蟹巖至此下碇待午潮潮落時觀漁父乘舟橫江張網又海子蓬首躶身持舟機其網乘潮上下有海鴟數十爭魚亂飛與人相忘人見魚而忘鳥故鳥亦忘人祖江東北爲炭浦其上爲洛河當燕山甲子之虛庵逃世匿跡於此云至帆浦水味始淡濁氣漸淸至臨津灘下爲淸江遇順風擧帆

 

곧바로 서쪽은 덕수(德水)의 해암(蟹巖)인데, 여기까지 이르러 정박하고 한낮 조수를 기다렸다. 조수가 떨어질 때에 보니,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펴고, 또 바닷가 아이들이 더벅머리로 발가벗고 배를 타고 그물질을 하며 조수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 바다갈매기 수십 마리가 고기를 다투어 어지러이 나는데, 사람과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은 고기를 보느라고 새를 신경 쓰지않으니, 새도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조강(祖江) 동북쪽은 탄포(炭浦)이고, 그 위가 낙하(洛河)인데, 연산(燕山) 갑자의 화()를 당하여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이 이곳에서 세상을 피해 흔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범포(帆浦)에 이르러서야 물맛이 짜지 않고, 흐린 기운이 점점 맑아졌다. 임진탄(臨津灘) 아래에 이르러 청강(淸江)이라 하는 곳에서 순풍을 만나 돛을 올렸다.

 

 

덕수는 고구려시대의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현(仁勿縣)이었는데, 통일신라 756(경덕왕 15)이 덕수현(德水縣)으로 개칭하였다고려시대에는 개성의 속한 이 되었으며, 조선시대 1442(세종24)에 해풍군(海豊郡)과 합쳐져 풍덕부(豊德府)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풍덕군이 개성부(開城府)에 병합되면서 개성부를 제외한 구개성군과 합하여 개풍군(開豊郡)으로 개칭되었다. 19521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새로생긴 황해북도 판문군에 속했으며, 19551월에 개성시 판문군 덕수리가 되었다.

 

조강(祖江)은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덕수(德水) 남쪽, 통진(通津) 동쪽 15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한강 하류 끝의 물줄기를 일컫는 이름이며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앞에 조강나루터가 있었다. 임진강은 교하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을 지나 오도성에 이르러 한수와 합한다.<대동여지도>에는 이 강 하류의 이름이 낙하(洛河), 탄포(炭浦), 정자포(亭子浦), 저포(楮浦), 임진(臨津) 등으로 나온다. 그리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랑진(高浪津), 여의진(如意津), 신지강(神知江), 유연진(楡淵]), 등파강( 波江), 시욱진(時郁津), 동대천(東大川), 고성진(古城津), 덕진천(德津川)으로 나타난다.

 

옛날에는 강을 나타낼 때 하()와 강()이란 말을 썼는데, 작은 강에서는 '란 말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나루를 나타낼 때는 도(), (), () 등의 말을 썼다. 이 중 가장 큰 나루를 의미한 것이 도()였다. 이러한 이름들은 또 강()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임진강도 원래는 나루와 그 강을 가리키면서 그냥 임진(臨陣)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뒤에 강이란 말이 덧붙어 임진강이 되었다. 임진강의 갈림내는 엄청나게 많으나,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한탄강(漢灘江)이다.임진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을 교하(交河)라 한다. 이 말은 두 줄기의 큰 강이 서로 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때의 이 곳의 땅이름은 어을매(於乙買)로 이 이름 역시 '물이 어울림'을 뜻한다. '어을''어울다(어우르다)'의 뜻이고, ''''을 나타낸다.

 

숯개내는 숯개, 쑥개, 탄포, 탄포천 등으로 부른다. 월롱면 덕은리 월롱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탄현면 금승리, 축현리를 지나 금산리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모여서 오금리를 지나 만우리에서 임진강으로 들어가는 천.

 

낙하나루터는 낙하 서북쪽 임진강에 있는 나루터로 장단군 장단면 석곶리로 건너간다.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큰 길목이 되므로 도승을 두어 관리하였다. 현재 휴전선에 가까우므로 군사 전략상 건너가지 못한다.

 

 

自臨津上江岸始有石壁往往有深樹茂林如花石亭李文成別業寒碧亭滄浪亭皆成氏舊業江上人云北岸爲積雲師心丈人舊居其後有師心墓斯人好謙厚自守嚴言必謹行必果古人所謂實見實蹈吾見於斯人嗟乎斯人亡今不得復見入峽口江壁嶄絶水淥淨日暮山氣益深至石岐江村佳處前有古渡其上庫硠北壁下八月收潦水落海子以舟爲家來集於此鬻魚鹽互市爲利上有四賢廟先歸暮泊舟巖郭結城舊莊云朝日將舟行主人送酒食居喪故令其少壻來見甚款又金綾州追來江上停舟相見築小亭曰晩翠亭云問其浦口紫涯其北岸曰銅浦上有漁村自古相傳此高麗林椿江上莊云

 

임진강(臨津江)으로 올라가니 비로소 석벽(石壁)이 있는데, 왕왕 나무가 우거지고 숲이 무성하였다. 화석정(花石亭)은 이 문성(李文成: 栗谷 李珥의 시호)의 별장이요, 한벽정(寒碧亭), 창랑정(滄浪亭)은 다 성씨(成氏)의 옛 별장이라고 강가 사람들이 말했다.

북안(北岸)적운(積雲)인데 사심 장인(師心丈人 사심은 이정호(李挺豪)의 호임)의 구거(舊居)였으며, 그 뒤에 사심의 무덤이 있다. 이 사람은 겸손하고 후덕함을 좋아하여 스스로를 엄하게 지키고, 말을 반드시 삼가고 행동은 반드시 과감(果敢)하게 하여, 옛사람이 이른바, 진실하게 보고 진실하게 실천한다는 것을 나는 이 사람에게서 보게 되었다. , 이 사람은 죽어 지금 다시 볼 수가 없구나.

 

협구(峽口)에 들어가니 강벽(江壁)은 깎아지른 듯하고 물결은 깨끗하며, 날이 저무니 산 기운이 더욱 깊었다. 석기(石岐)에 이르니 강촌(江村)의 아름다운 곳이라, 앞에는 옛 나루터가 있고 그 위에는 곳집이 있고, 북벽(北壁) 아래에는 8월 추수를 하고 있었다. 큰 물이 떨어졌다. 바다 사람들이 배를 집으로 삼고 여기에 모여 들어, 고기와 소금을 팔아 무역하여 이익을 취했다. 위에는 사현(四賢)의 사당이 있었다. ()는 먼저 돌아갔다. 저물녘에 주암(舟巖)에 이르렀는데, 곽 결성(郭結城 결성은 홍성(洪城)의 옛 이름)의 옛 별장이라고 한다.

 

아침에 배를 띄워 가려고 하는데 주인이 술과 음식을 보냈다. 거상(居喪) 중이라 해서 그의 젊은 사위를 시켜서 뵙게 한 것이 몹시 정성스러웠다. 또 김능주(金綾州 능주는 고을 이름으로 원을 나타냄)가 뒤쫓아 와서 강가에 배를 머무르고 서로 만났다. 조그마한 정자를 지어 놓았는데, 만취정(晩翠亭)이라 하고, 포구(浦口)를 물으니 자애(紫涯)라 하고, 그 북안(北岸)동포(銅浦)라 했다. 그 위에 어촌이 있어 예부터 전해 내려오기를 고려(高麗) 임춘(林椿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 강좌 칠현(江左七賢)으로 글을 잘했다)의 강가 별장이라고 했다.

 

日晩擧帆上瓠蘆灘此瓠蘆河也其上六溪又有古壘前灘極險沙彌川入於此上流有古城隔江相對因石壁爲固江上父老相傳古萬戶壘云此未可知麗時數被兵於契丹此戰場也至今有古迹如此耶其上重城今積城縣亦曰此新羅句麗兩國之境云江上紺岳有薛仁貴廟今爲淫祠過鸕鶿巖至席浦江山觀下流尤佳其上仰巖最奇絶有石峯有高壁有重淵有古鐘沈於此邦有亂則鳴物舊而神者耶自席浦至此南岸皆白礫斷阜皆蒼巖北有麗王廟謂之崇義殿江水極深江上人云前有龍見則旱東有阿彌寺

 

날이 저물어 돛을 올리고 호로탄(瓠蘆灘)으로 올라가니, 여기가 호로하(瓠蘆河)이고, 그 위는 육계(六溪)이다. 또 옛날 진루(陳壘)가 있는데, 앞의 여울은 아주 험하며 사미천(沙彌川)이 여기로 들어온다. 상류에 옛 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해 있는데 석벽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다. 강가의 부로(父老)들 사이에 서로 전해 오기를, 옛날 만호(萬戶)의 진루였다고 하나 이것은 알 수가 없다. 고려 때에 여러 번 거란(契丹)의 병화를 입었으니 이곳은 전쟁터로 오늘날까지도 옛 자취가 이와 같은 것인가.

 

그 위의 칠중성(七重城)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인데,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하였다. 강가의 감악(紺岳)에 설인귀(薛仁貴)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음사(淫祠)가 되었다.

 

노자암(鸕鶿巖)을 지나 석포(席浦)에 이르니, 강산의 경치가 하류로 갈수록 더욱 아름다운데, 그 위의 앙암(仰巖)이 가장 기이하고 빼어났다. 석봉(石峯)이 있고, 고벽(高壁)이 있고 깊은 못[重淵]이 있는데, 옛 종[古鐘]이 이 속에 잠겨 있으며, 나라에 난리가 나면 울린다고 하니, 물건이 오래되면 신령스럽다는 것인가. 석포로부터 남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흰 돌이고, 절벽은 모두 푸른 바위였다. 북쪽에는 고려 왕의 사당이 있는데 숭의전(崇義殿)이라 하고, 강물이 아주 깊어 강가 사람들은 전에 용이 나타나면 가물었다.’ 하였다. 동쪽에는 아미사(阿彌寺)가 있다.

 

麻田前岸江壁上有古壘今其上爲叢祠其前浦曰堂浦大水則津路所通水深灘淺又阻風下帆曳舟遡流過烏江水勢旣折風自順復擧帆上壺口峽灘石極險此摩嵯北麓山深水急永平之水至此合流謂之上浦其東陶哥湄多白礫平沙過壺口則栗灘栗灘上馬灘灘上巖壁間有潭水積焉深險不可遊過馬灘則岐灘過岐灘則楡淵淵上楡灘楡灘二三里至鵂鶹灘其上爲澄波渡又其上鬼灘去熊淵文石七八里文石者熊淵陰崖石上有文如草書者奇不可辨前有一邑宰以石碎石文深入不改凡江上古事可記者多而無所可問自澄波渡下舡歸眉叟

 

마전(麻田) 앞의 언덕 강벽(江壁) 위에 옛 진루가 있었는데, 지금 그 위는 총사(叢祠 잡신을 모시는 사당)가 되었고, 그 앞의 나루를 당포(堂浦)라 하는데, 큰물이 들면 나루길이 트였다. 물은 깊고 여울은 얕은데다가 바람이 없어, 돛을 내리고 물살을 거슬러 배를 끌어 오강(烏江)을 지나자 수세(水勢)가 꺾이고, 바람이 저절로 순해졌다. 그래서 다시 돛을 들어 올리고 호구협(壺口峽)을 나서니, 여울의 돌이 몹시 험한데 이를 마차산(摩嵯山)이라 한다. 북쪽 기슭은 산이 깊고 물살이 급하며, 영평(永平)의 물이 여기서 합류하는데, 그것을 상포(上浦)라 하고, 그 동쪽은 도가미(陶哥湄)인데, 흰 자갈과 평평한 모래사장이 많았다.

 

호구(壺口)를 지나면 율탄(栗灘)이고, 율탄 위는 마탄(馬灘)이고, 여울 위의 암벽 사이에는 못물이 괴어 있는데, 깊고 험하여 놀 수 없었다. 마탄을 지나면 기탄(岐灘)이고, 기탄을 지나면 유연(楡淵)이고, 유연 위는 유탄(楡灘)이고, 유탄을 2, 3리 지나면 휴류탄(鵂鶹灘 부엉이 여울)에 이른다. 그 위가 징파도(澄波渡)이고, 또 그 위 귀탄(鬼灘)에서 웅연(熊淵) 문석(文石)까지 7, 8리인데, 문석이란 것은 웅연의 그늘진 벼랑의 돌 위에 초서(草書) 같은 글이 있는 것인데, 기이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다. 전에 어떤 고을 원이 부수려 했으나, 글자가 깊이 새겨져서 고칠 수 없었다 한다.강가의 옛일[古事]은 기록할 만한 것이 많으나 물어볼 곳이 없었다. 징파도(澄波渡)에서 배에서 내려 돌아왔다. 미수(眉叟)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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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도(臨津渡)는 부의 남쪽 37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함경도 안변(安邊) 속현(屬縣) 영풍방장동(永豐防墻洞)에서 나와 이천(伊川)안협(安峽)삭녕(朔寧)을 거쳐 연천현 서쪽에 이르러 징파도(澄波渡)가 되고, 마전군 남쪽에 이르러 대탄과 합치고, 적성현 북쪽에 이르러서는 이진(梨津)이 되고, 부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임진현 동쪽에 이르러서 임진도(臨津渡)가 되고 동남쪽으로 덕진德津이 되며, 교하현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鳳凰巖)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서 한수(漢水)와 모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도감포(都監浦, 陶哥湄, 陶家湄, 甕岩灘)는 남계리 남쪽,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던 포구 마을. 옛 지리지나 여러 기행문에는, 이곳 합수머리에서 임진강을 따라 전곡읍 마포리 지역에 넓게 펼쳐진 꽃답벌과 미산면 동이리 썩은소 앞의 강폭이 좁아지는 지점까지의 지형이 항아리의 형태와 닮았다 하여 ‘독안이[壺內]' 또는 호구협(壺口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항아리와 닮았다고 하는 지형 안에 있는 도감포의 원래 의미는 ‘항아리 형태의 지형 안에 있는 포구'란 뜻으로, ‘독안개[壺內浦]'또는 ‘독안이'로 불리던 것이 도감, 독암으로 음이 변하여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는 과정에서 도감포외에 여러 한자 명칭으로 표현되었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임진강을 따라 올라온 새우젓, 소금 배들이 정박하며 연천 지역에서 생산되었던 곡물,땔감, 도자기 등을 물물교환하던 큰 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미수기언(眉叟記言) 해제(解題)

이우성(李佑成)

 

1. 머리말

 

이 책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집인 기언(記言)67권과 기언별집(記言別集)26권 중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은 추려 내고 나머지 대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5책으로 만들고 다시 색인(索引) 1책을 붙여, 전부 6책으로 이번에 새로 간행한 것이다. 기언기언별집의 전체 분량에서 대략 5분의 3에 해당하는 것이다.기언이라는 것은 말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을 기록한 것이 글이니, 미수 선생이 자기의 글을 모아 기언이라고 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종래 학자들이 그저 문집이라고 해 왔던 것을 미수가 남달리 기언이라고 명명(命名)한 데에 특징이 있다. 명칭만이 아니고 그 내용의 편집 체제도 일반 문집과는 매우 다르다. 고문(古文)고서(古書)를 좋아하여, 힘써 우하은주(虞夏殷周)의 고전(古典)의 세계를 추구하던 미수 선생의 고풍(古風)스러운 표현의 하나인 것이다.

 

2. 미수의 생애

 

1595(선조28)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탄생하여 1682(숙종8) 경기도 연천(漣川)에서 88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미수 선생은 17세기 우리나라 역사상의 인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다. 그는 본관이 양천(陽川)인 허씨 명문의 출신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홍원(洪原)으로 귀양을 간 좌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이며 모계(母系)로는 시인으로 유명한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외손이다. 그런데 조부와 부친이 모두 사환(仕宦)으로 크게 현달(顯達)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수 자신도 반평생이 넘도록 벼슬과 인연이 없이 오직 한 사람의 학자로서 연구와 저술을 일삼는 한편, 각 지방으로 여행과 유람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56세 되던 효종(孝宗) 원년에 비로소 능참봉(陵參奉)으로 제수(除授)되었고, 64세에 지평으로, 65세에 장령으로 임명되어, 여러 번 사양하다 못해 차차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리하여 현종(顯宗) 원년부터 경연(經筵)에서 국왕을 가까이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였고, 숙종(肅宗) 원년, 81세가 되던 해에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대배(大拜)하게 되었다. 늦게 출발한 관력(官歷)으로 인신(人臣)의 최고 지위인 삼공(三公)의 한 자리에 앉게 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 그러한 예가 많았던 것도 아니다. 일반 과거 출신자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미수는 산림(山林)으로 진출한 분이다. 산림이라는 것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임하(林下)에서 독서강도(讀書講道)하는 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 후기 즉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이 임하의 선비들 중에 명망이 높은 인사를 골라, 국왕이 직접 초빙하는 형식으로 서울에 불러 올려, 특별한 예우(禮遇)를 더하고 관직을 불차(不次)로 승전(陞轉)시켰으며, 이들 인사를 특별히 대우하기 위하여 신규로 관제(官制)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세자시강원의 자의(諮議)찬선(贊善)이나 성균관의 사업(司業)좨주(祭酒) 등이 그것이다. 특히 좨주는 사유(師儒)의 자리라 하여, 품계는 대사성과 같이 정3(正三品)이지만 그 지위와 권위는 과거 출신인 대사성보다 훨씬 높았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위시하여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등이 모두 산림으로 등장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탄옹(炭翁) 권시(權諰)와 함께 미수도 같은 경로로 세상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동춘우암에 비해 미수는 그 정치적 진출이 상당히 늦었다. 미수가 성균관 좨주를 지낸 것이 숙종 원년에 이르러서 가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정치적 사정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政權)은 서인(西人)의 차지가 되어, 서인인 동춘우암은 집권층과 손쉽게 연결될 수 있었지만 미수는 남인(南人)인 까닭으로 대단히 불리했던 것이다.

 

미수의 일생에 있어서 그 정치적 운명은 처음부터 서인계 학자들과의 학설상의 대립, 특히 국가 전례(國家典禮)에 관한 이론의 대결로 시종된 느낌이 있다. 30대에 동학 재임(東學齋任)으로 있을 때 서인계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당시 국왕의 사친(私親)인 계운궁(啓運宮)에 대하여 추숭(追崇)의 의()를 제창하자 미수는 그를 봉군난례(逢君亂禮)’, 즉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를 문란시켰다고 비판하고 그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지워 없애 버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미수는 유생(儒生)의 신분으로 과거정지령(科擧停止令)을 받아 과거 응시의 자격마저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과거를 외면해 버린 미수는 뒤에 산림으로 나온 후에 다시 동춘우암과 예론(禮論)을 통한 정치적 대결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유명한 기해예송(己亥禮訟)이 그것이다. 효종의 초상에 대한 모후(母后)의 복상 기간(服喪期間)이 논란을 일으키게 되어, 유교적 예()의 원칙을 교조적(敎條的)으로 원용(援用)하려는 서인계 학자들이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며 그대로 실시했음에 대해 군주(君主)의 대통(大統)을 강조하는 남인들은 삼년설(三年說)을 내세워 반론을 펴면서 서인들을 오례난통(誤禮亂統)’, 즉 국가 전례를 그르쳐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어지럽혀 놓았다고 공격하였다. 이 반론은 미수를 선두로 하여 백호(白湖) 윤휴(尹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등의 주동에 의한 것이며 이 남인계 학자들의 이론은 또한 논리가 정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시의 전 국론을 양분시켰던 이 양파의 주장에는 각기의 정치적 입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미 집권층에 의한 벌열 정치(閥閱政治)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왕실을 둘러싼 벌열 세력의 상승(上昇)은 왕실 자체를 벌열에 속한 한 가문(家門)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에 대해서도 유교적 예()의 원칙을 수평적(水平的)으로 적용하려고 한 서인계 학자들이 벌열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결과가 되게 마련이었다면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계 학자들이 군주의 대통을 강조하는 이론은 왕권의 강화를 통한 왕조 질서의 확립과 벌열 세력의 억제를 통한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기회 균등을 되찾으려 하는 운동에 연결되었던 것이다.남인계 학자들의 정연한 논리는 서인들을 당황케 하였고 이로 인한 양파의 당쟁은 여러 차례의 정치적 기복을 가져왔다. 미수가 멀리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된 것이 첫 보복을 받은 것이지만 현종을 거쳐 숙종에 이르는 동안 서인들의 이론적 모순이 계속 드러나서 한 차례 실각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남인들이 한때 집권하였다. 미수의 우의정 취임이 이때였다. 그러나, 권력에 유착되기를 싫어하는 미수의 학자적 체질은 항상 노병(老病)을 이유로 은퇴를 요구하여 향리인 연천으로 돌아가 있을 때가 많았다. 동시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오래 권좌(權座)에 앉아 체찰부(體察府)와 같은 특수기구를 만들어 병권(兵權)을 장악하는 등, 장차 큰 화기(禍機)를 양성(釀成)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허적을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평소에 허적의 정치적 태도가 선명치 못하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미수는 허적의 아들 허견(許堅)의 횡포를 더욱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갈라진 것이 이때이지만 탁남측의 무반성으로 마침내 서인들에게 이용되어 남인 전체의 비참한 몰락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온 것이다. 국가의 원로로서 향리에 가 있었던 미수도 관직을 삭탈당한 채 1년 남짓하여 드디어 고종(考終)했던 것이다.

 

3. 미수의 학통(學統)

 

미수는 퇴계학파에 속한다. 퇴계학파는 지역적으로 보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근기학파(近畿學派)로 나누어지거니와 미수는 바로 근기학파의 성립에 기초 구실을 한 분이다. 일찍이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 우리의 학문은 원래 계통이 서 있다. 퇴계는 우리나라의 공자(孔子)로서 그 도()를 한강(寒岡)에게 전해 주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에게 전해 주었는데, 성호는 미수를 사숙(私淑)한 분으로, 미수를 통하여 퇴계의 학통에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미수는 위로 퇴계의 학을 물려 받아, 아래로 성호의 학으로 발전적 계승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미수는 원래 서울에서 생장하여 향리인 연천에서 만년을 보낸 분이다. 그런데 그가 퇴계의 학, 영남의 학에 접한 것은 한강 정구(鄭逑)를 스승으로 섬기면서부터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부친의 임지(任地)를 따라 고령(高靈)거창(居昌) 등 영남 여러 고을에 왕래하면서 한강의 학덕을 존모하여 23세 때에 거창에서 그의 종형 관설공(觀雪公)과 함께 성주(星州)로 찾아가서 한강을 만났다. 당시 한강의 문하(門下)에는 많은 제자들이 드나들었는데 한강은 이 근기 지방의 젊은 내방객을 눈여겨보았고 뒤이어 곧 그에게 큰 촉망을 보냈다. 마침내 한강의 많은 제자 중에서 가장 후배였던 미수가 후일 한강 학통의 상속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강의 학통을 근기 지방으로 가져와서 근기학파를 형성시킴으로써 서애(西厓)학봉(鶴峰)의 후계자들인 영남학파와 함께 퇴계학파의 두 조류(潮流)를 이루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미수의 학사적(學史的) 위치(位置)이다. 위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미수가 위로 퇴계의 학을 물려받고 아래로 성호의 학으로 발전시킨 분이라 한다면, 미수는 영남의 성리학(性理學)과 근기의 실학(實學)에 가교자적(架橋者的) 역할을 한 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실학의 발생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 벌열 정치의 출현과 상품화폐경제(商品貨幣經濟)의 새로운 작용(作用) 등 정치경제 관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지만, 또한 사상사(思想史) 자체의 내재적(內在的) 전개(展開)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과 조선 후기의 실학을 본래 무관한 것으로 완전히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렇지 않다. 조선 전기로부터 성리학이 관념화, 형식화되어 스스로 현실에 대처할 능력이 없게 되자 관념 세계로부터 현실 세계로, 내면 세계로부터 외면 세계로 눈을 돌리면서 자기 극복을 통하여 발전적으로 전개된 것이 곧 조선 후기의 실학이다. 이런 점에서 미수의 학사적 위치는 그 중요함을 거듭 느끼게 된다. 미수의 스승인 한강은 퇴계학의 적전(嫡傳)이라는 평도 있지만 한강의 학은 심학(心學)예학(禮學)에서 뿐 아니라, 그의 학문의 영역은 대단히 넓고도 실용적(實用的)이었다. 우선 그의 저술과 편찬에 속한 책들만 보아도 역사(歷史)지지(地誌)문학의학(醫學) 등 방대한 양에 달한다. 한강의 이러한 학풍은 뒤에 미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미수의 사고(思考)를 더욱 현실에 밀착시키고 그 학문적 시야를 더욱 열어 주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인물물산 방면에 관한 학문적 관심을 크게 높여 주게 되었다. 이러한 조류 속에 성호의 학단(學團)이 이루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고 하겠다.

 

4. 기언의 편차와 미수의 정신

 

기언은 얼핏 보아 편집 체제가 복잡하지만 크게 나누어 원집(原集)속집(續集)의 두 개로 되어 있다. 원집은 다시 상편(上篇)중편(中篇)하편(下篇)잡편(雜篇)내편(內篇)외편(外篇)으로 나누어지고, 속집에는 산고(散稿)습유(拾遺) 등이 들어 있기도 하다. 합해서 모두 67권이다.그러나 기언67권과는 달리 기언별집26권이 따로 수록되어 있다. 편집 체제는 앞의 것과 대동소이하면서 비교적 정돈된 인상을 준다. 미수는 고문(古文) 고서(古書)를 좋아한다는 스스로의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이 고문 고서의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문자(文字)에 있어서 진한(秦漢) 이전의 문자, 즉 창힐(蒼頡)사주(史籒) 등의 문자를 좋아하여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섭취하였다. 독특한 그의 전자(篆字), 이른바 미수체(眉叟體) 전자도 이러한 데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미수가 이러한 고문자(古文字)를 좋아한 것은 결코 서예적(書藝的) 취미(趣味)만은 아니고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둘째, 전적(典籍)에 있어서 주로 ()》ㆍ《()》ㆍ《()》ㆍ《춘추(春秋)》ㆍ《()의 오경(五經)을 좋아하고 송유(宋儒) 이래 중시해 오던 사서(四書), 특히 정주(程朱)의 장구(章句)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등의 성리학 서적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오경을 좋아한다고 하여 한대(漢代) 경사(經師)의 훈고(訓詁)나 청대(淸代) 경학가(經學家)의 고증벽(考證癖)에 쏠린 일은 전혀 없었다.이와 같이 고문고서의 를 숭상하는 미수의 상고 정신(尙古精神)은 흔히 말하는 복고주의(復古主義)와는 아주 차원을 달리한다. 미수의 상고 정신은 중세(中世)에 대한 부정(否定)이며 중세에 대한 부정은 동시에 관념화된 당시의 성리학 즉, 주자학적(朱子學的) 정신 풍토(精神風土)의 부정이다. 주자학적 권위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에 그 권위의 구축(構築)에 일생의 정력을 다 바친 우암과는 매우 대조적이다.미수는 백호(白湖) 윤휴(尹鑴)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과 같이 주자의 경전 해석을 한 구절 한 구절 비판한 적이 있지 않다. 그러나 미수의 기본적 학문 태도, 나아가 그 정신 세계를 옳게 이해한다면 그의 상고 정신이 시대의 역행이 아님은 물론이고 다음날 실학사상의 발달에 큰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수는 자서(自序)라는 글이 있는데, 자기의 평생 중요한 경력을 적어 놓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거기에 당시 시국에 관한 자기의 정치사회적 견해를 몇 가지 열거해 두었다. 그중에서도 아문(衙門)과 둔전(屯田)의 혁파 문제, 그리고 시전(市廛)의 정리 문제는 본래의 상소문(上疏文)을 그대로 옮기다시피 하여 그 문제의 심각성과 자기 견해의 타당성을 되풀이 말하였고, 그 밖에 체찰부(體察府) 문제, 무사(武士)에 대한 만인과(萬人科) 문제, 호포(戶布) 문제 등에 관해 중언부언 소신을 말해 놓았다. 미수의 사회적 신분이나 정치적 처지로 보아 그의 주관상의 양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가 한결같이 전진적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시대 현실을 목전의 과제로 삼고 그것에 대응해 나가려는 그의 숭고한 학자적 사명감은 높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기언을 읽을 독자들에게 우선 이 점에 유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19781230

 

[자명비(自銘碑) ]

 

늙은이는 허목(許穆)으로 자가 문보(文父)라는 사람이다. 본래는 공암(孔巖) 사람인데 한양(漢陽)의 동쪽 성곽 밑에서 살았다. 늙은이는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스스로 호를 미수(眉叟)라 하고, 나면서부터 손에 ()’ 자 무늬가 있으므로 또한 스스로 자를 문보라고 했다. 늙은이는 평소에 고문(古文)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일찍이 자봉(紫峯) 산중에 들어가 고문으로 된 공자의 글을 읽었다. 늦게야 문장이 이루어졌는데, 그 글이 대단히 방사(放肆)하면서도 방탕하지는 않았다. 혼자 지내며 내키는 대로 즐기되 마음으로 옛사람들의 남긴 교훈을 추구하기 좋아하였고, 평소에 스스로를 지킴에는 몸에 허물이 적게 하려 하였지만 잘되지 않았다.  

         

스스로 명()하기를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 言不掩其行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며 / 行不踐其言한갓 요란하게 성현의 글을 읽기만 좋아했지 / 徒嘐嘐然說讀聖賢하나도 과오를 보완해 가지 못했기에 / 無一補其諐돌에다 새겨 뒷사람들이 경계 삼도록 하노라 / 書諸石以戒後之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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