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白水 2013. 6. 22. 15:20

 

 

 

 

 

화석정 위로 전진교(두포교차로) 장파리쪽이다. 파평면 두포리 - 율포리 일대의 임진강 양쪽에는 한탄강 현무암이 높이 약 8m로 하안가에 길게 분포한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50-16만 년 전 북한 땅 평강에서 분출된 용암이 옛 한탄강을 따라 임진강 하류까지 약 110km를 흘러서 가장 멀리 온 마지막 부분이다. 이 용암의 흔적이 없다면 한탄강 현무암이 어디까지 흘렀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철책과 군부대의 통제 때문에 이구간의 주상절리현무암 적벽을 볼 수가 없다. 멀리서 보려면 군부대의 사전허가를 받은 후 전진교를 통해서 강 건너 편인 진동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앞에 보이는 곳이 진동면 동파리다

임진년 왜란을 당하고 선조임금은 달빛도 없는 임진나루를 건넜다. 율곡의 선견지명이 나루를 비춰주었다. 선조는 나루를 건너 지금 비포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파역으로 향했고 개성으로 들어갔다.”  동파역은 민통선 이북에 조성된 전원마을 해마루촌근처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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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동파역에서

 

파주지역의 민통선은 50년이 넘게 임진강을 경계로 하여 또 다른 남북의 선으로 나뉘어 있다. 서울~평양~의주간 관서대로의 핵심적인 주 통로였던 임진나루는 임란당시 조선관군 대패의 치욕을 거울삼아 조선 숙종, 영조 때 군사목적의 요새로 그 격을 갖추었다. 1번국도의 상징적 관문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일제강점 초기 일본군에 의해 이웃한 장산진과 함께 모두 헐려나갔다. 문루와 성벽, 부속건물 등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나 남아있다. 지금은 풀밭에 나뒹구는 화강암 석재 몇 개만이 이곳이 중요한 요해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서해의 짠 바닷물과 섞인 임진강을 건너는 길은 경의선 철교인 돗개다리와 통일대교, 전진교, 리비교가 그 관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감조하천(感潮河川·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하천)인 이 강이 임진나루 앞에서 달의 힘에 의해 소금기로 흐리고 민물로 맑기를 반복하고 있다.

 

거기엔 4개의 크고 작은 직선의 다리가 있다. 통행객들은 분단의 무감각에 체질화된 듯 검문을 거치고 남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며 50년이 훨씬 넘는 동안 이 강을 넘나들고 있다.

 

임진나루 북쪽의 대안인 진동면 동파리. 선조가 피란길에 머물렀고, 말발굽 소리로 분주했던 이름난 과거의 역터인 동파역은 어떤가.

 

초여름 수풀 속에 표지석 하나 없는 그 애환의 현장엔 군 훈련장이 서있다. 바로 곁에는 높은 음자리의 해마루촌 60여 가구가 우연하게도 지난 분단의 횟수와 같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민통선 마을의 복잡한 사연을 담아가고 있다.

 

임진나루와 동파역 사이에 촘촘한 역사의 사연과 소금기 섞인 애환들, 현무암의 장단적벽과 일월봉, 강이 가두어 둔 또 다른 신비의 민통선인 초평도. 휴전선과 NNL에 갇혀 소통되지 않는 오늘의 임진강.

 

동파역에서 난생 처음 주린 배로 허기진 아침을 맞이했던 선조임금. 지금 우리는 너무도 분명한 역사의 춘궁기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곳에 서면 늘 반복되는 독백이다. 그래도 지금 그 땅에선 장단콩이 새싹을 틔우고 모낸 뒤의 가지치기로 녹색생명의 번짐은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 연구원

 

 

아래로 내려가면 초평도()이 나오는데, 그 북쪽이 동파리요 남쪽이 장산리다.

강은 이렇게 자형으로 심히 굽어 돌아 반구정 앞으로 간다.

 

 

 

 

 

임진나루터로 나가는 통문이 막혔다.

 

1951년 동파리 백사장 풍경  ☞  http://cafe.naver.com/withchum/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