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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옥병 암각문(蒼玉屛 巖刻文)

백수.白水 2013. 12. 2. 11:42

 

 

새로 만들어 설치한 고급재질의 멋진 안내판 글이 이상하다. 창옥병암각문의 이름을 짓고 기록한 사람이이양  정주인이라니? 思菴先生<二養亭記>二養主人이라 한 것은 二養亭(이양정)主人인 바로 나, 박순 자신이라는 말인데 엉뚱한 뜻이 되어 버렸다바로 잡아야겠다. '사암 박순'이라고 바꾸면면 되고, 새긴 사람도 "신이(辛夷)"로 한자를 병기해줘야 헷갈리지 않는다.

 

한호(韓濩)가 쓰고 박순(朴淳)이 명명한 11개의 석각 글씨: 배견와(拜鵑窩), 이양정(二養亭), 백운계(白雲溪), 청령담(淸泠潭), 토운상(吐雲床), 산금대(散襟臺), 청학대(靑鶴臺), 백학대(白鶴臺), 명옥연(鳴玉淵), 수경(水鏡), 와준(窪尊)

 

 

[思菴先生文集卷之四] <二養亭記>

 

余於丙戌仲秋 承恩 浴椒井于永平地覽其溪山而心悅之遂稅駕而居焉吾東山水此縣最名由縣而言淸泠潭其尤也白雲溪之所瀦而源發白雲山也鍾賢東支至潭作崖故水底皆布全石高者露出詭怪錯陳有若龜龍曝日島嶼浮溟崖之嵁巖俯潭爲臺者四白鶴靑鶴白者或乘靑者一隻時往來洲渚皆記實也餘曰散襟水鏡中介石床曰吐雲巖足陂陀於水心有窪容斗曰窪尊潭瀉長灘西折而淵曰鳴玉大壁倚天根浸灘淵極造化之剞劂曰蒼玉屛葺茅潭西曰拜鵑窩每於玉屛春夏望帝來呌山空響徹聽者自感也又就潭崿最峻處規爲草亭曰二養伊川養德養體之義也觀其左當大壁右聯四臺皆負崇山面勢澄泓攢巒叢峭拱揖內嚮石骨瓊田倒燭縈廻呑吐乎煙嵐晻靄乎林坰舒慘異侯萬變迭形鬪奇矜秀各不相讓咸與收精會神俎豆於枕席之間爲吾所蓄而日與之娛棲遲嘯詠境淨意適不知山之阻身之遠鳥獸之可猜其孰使然非玆潭之有遭歟略敍其槪難窮厥狀而志之二養主人其大字與小字主簿鏤諸十有一石者 辛秀才夷 是歲萬曆十六年也

 

※ 사암선생은 二養亭(이양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정이천(程伊川)의 양덕(養德)과 양체(養體)에서 뜻을 취하여 이름하였고 하였다. 정이[程頤 1033-1107]는  중국 北宋시대의 도학자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한 정주학(程朱學) 창시자다. 호가 이천(伊川)으로 정이천(程伊川)으로 부른다.

 

 

精神水月 節調松筠(정신수월 절조송균) 선조임금이 내려준 말씀, 윤지(綸旨).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쓰고, 신이(辛夷)라는 秀才가 새겼다. ‘정신은 물과 달같이 맑고 절조는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 같다.’

 

散襟臺(산금대): 옷자락이 흩날리다는 뜻으로 한가롭고 여유롭다는 말이다

散襟臺(산금대)와  윤음인 精神水月 節調松筠라는 글은 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박순의 七言絶句 시 "題二養亭壁(제이양정벽)"

 

谷鳥時時聞一箇  (곡조시시문일개골짜기의 새소리 간간이 들리는데.

匡床寂寂散群書  (광상적적산군서쓸쓸한 침상에는 책들만 나딩구네.

每憐白鶴臺前水  (매린백학대전수안타갑도다, 백학대 앞 흐르는 물이,

纔出山門便帶淤  (재출산문변대어겨우 山門을 지나오니 문득 흙탕물일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이 쓰고 새겼다.

 

水鏡臺(수경대) 물이 맑아 거울처럼 사물을 거짓 없이 그대로 비친다는 뜻이다.

水鏡臺(수경대)題二養亭壁(제이양정벽)"은 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벽 제일 높은 곳에서 발견했는데 마모가 심해서 알 수가 없다.

吐雲床(토운상): 사이에 낀 돌 평상(中介石床)으로 위가 평평하고 제법 넓다. 구름을 토해낸다는 뜻이다.

障闌(장난); 절벽 꼭대기에 있는데 二養亭記에도 나오지 않고, 한석봉이 쓴 다른 글씨와도 다르다.

후대에 각자한 것으로 보이며 가로 막힌 난간이라는 뜻이다.

淸泠潭(청령담): 맑고 시원한 못이라는 뜻이다. 글씨가 새겨진 바위 앞으로 제법 깊고 깨끗한 못이 만들어졌다.

 

 

窪尊(와준) - ()는 우묵(가운데가 둥그스름하게 푹 패거나 들어가 있는)한 웅덩이라는 뜻이며, (귀할 존)은 술잔이나 술 단지의 뜻으로 쓰일 때는 이 된다. (=. 金樽美酒千人血...<춘향전>)과 같이 쓰인다. 청령담 물 가운데의 너럭바위에 한 말술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술 단지가 생겼다. 人工의 흔적이 없는 자연구멍으로 한탄강의 기반암인 화강암에서 이러한 구멍이 자주 발견된다. 여름철 막걸리 한통 부어넣고 천렵(川獵)하기에 딱 그만이다.

 

 

 

<二養亭記>에서 思菴선생은 淸泠潭(청령담) 白鶴臺(백학대) 靑鶴臺(청학대) 散襟臺(산금대) 水鏡臺(수경대) 吐雲床(토운상) 窪尊(와준) 鳴玉(명옥) ․ 백운계(白雲溪) 拜鵑窩(배견와) 二養亭(이양정) 11곳의 이름을 지었다고 나온다. 이번 답사에서 나는 〇.청령담. 산금대. 수경대. 토운. 와준 등 암각 5곳  〇.精神水月 節調松筠과 박순의 題二養亭壁 등 시 2〇.<二養亭記>에 나오지 않는 障闌(장난)이라는 암각 〇. 심한 마모로 인해 내용확인이 어려운 글() 1곳 등을 확인했다.

 

白鶴臺(백학대)는 확인을 못하고 다른 곳의 사진을 옮긴다.

암각문 앞에서 하류의 오가리 절벽을 보다.

상류의 금수정을 보다.

 

 강 건너편에서 암각바위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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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암각(岩刻) 시문(詩文)을 찾아서 - 사암 박순의 시. 임진강유적  

 

<원문 http://blog.naver.com/bhjang3?Redirect=Log&logNo=140036331434>

 

사암(思菴)은 서화담(徐花潭)의 문인으로 퇴계(退溪) · 미암(眉巖율곡(栗谷) · 고봉(高峰)등과는 장배(長輩) 또는 외우(畏友)로서 지기(志氣)가 일치하였고, 정송강(鄭松江)과는 역시 언론을 같이하여 서로 믿고 존중하였다. 그러나 임란을 전후한 선조 연간은 당쟁의 과열기로서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당론은 다시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율곡이 죽자 여립등은 퇴계와 율곡을 공격하였으며 이를 변론하던 사암은 송강(松江)과 함께 반격을 당하였다. 당시 선조는 송균(松筠)과 같은 절조(節操), 수월(水月)과 같은 정신(精神)이라하여 사암의 인품과 입장을 옹호하였으나 당시 양사(兩司)에서는 심의겸 등 13인을 당적(黨籍)으로 엮었고 사암을 그 우두머리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끝내는 참소를 견디지 못하고 14년간의 영상(領相)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호(江湖)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암이 이곳 영평(永平)을 찾아 머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때인 1586년이었다. 휴가를 얻어 초정(椒井)으로 목욕을 왔던 그는, 아예 서울을 떠날 마음을 굳히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이곳 주위에 정자를 짓고 정이천(程伊川)의 양덕(養德)과 양체(養體)의 뜻을 취하여 '이양정(二養亭)'이라 이름하였는데 위의 시는 바로 이 때에 지은 것이다. 그는 이양정(二養亭)에 올라 절벽 밑을 흐르는 내를 바라보면서 당시 자신의 처지와 감회를 이에 비겨 드러낸 것이리라.

 

백운산(白雲山)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이 이곳 절벽 밑 청령담(淸령)을 감돌아 잠시 머물렀다가는 맞은편 창옥병(蒼玉屛)을 치고 동문(洞門)밖을 나가게 되는데, 山門을 나가자마자 혼탁한 물에 섞여 흙탕물이 되고 마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 것이다.

 

山門 밖은 바로 시끄럽고 혼탁한 세상을 말함이요, 백학대(白鶴臺)는 학이 날아들었다 하여 그가 이름붙인 것이니 또한 가탁한 바가 있다. 세도(世道)의 승강을 통해 그의 거취를 살펴본다면 비록 사류(士類)의 종주(宗主)로서 일시 고립되어 이곳 거친 땅으로 왔으나 타고난 지조와 기질이 있어서 지키고 즐기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언론이 강개하여 시대의 기호에 영합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도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물러나와 산수에 뜻을 두었던 것이다.

 

이 시가 암각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곡운(谷雲)이 이곳을 찾아 각자를 남기게 된데는 남다른 연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는 일찍이 동생인 김수항(金壽恒)이 송우암(宋尤菴)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자 당시 성천부사(成川府使)를 그만두고 이곳 영평(永平)에서 멀지 않은 곡운산(谷雲山)에 머문 적이 있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동생이 사사(賜死)된 뒤로는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운곡에 묻혀 은거하였다.

 

게다가 동생인 김수항도 일찌기 이곳에 머물고자하는 뜻을 간직하고 있었던터라 백운산 아래에 매전(買田)을 하는가 하면 송노암(送老庵)을 지어 자주 이곳을 왕래하였다. 결국 1698년에는 김수항이 이곳 옥병서원에 배향되기까지 하였으니, 이러한 연고를 미루어 본다면 이때를 전후하여 자주 이곳을 지나던 차에 사암에 대한 흠모와 감회의 표현으로 이 시를 새겼다고 여겨진다.

 

사암은 낚시와 채약(採藥)으로 소일하며 그가 죽던 15897월까지 이곳에서 34년을 머물렀고, 또한 이 곳에 묻혔다. 비록 오랜 기간은 아니었으나 그의 문집을 통해보면 이곳에서의 생활에 많은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남긴 유작 중에는 이곳에서 남긴 작품의 비중이 적지 않다. 그래서 그는 무협(巫峽)에 들어가서 많은 작품을 남긴 두보(杜甫)에 자신을 비유하여 '두자미(杜子美)는 일찍이 무협(巫峽)에서의 일을 썼거니와 이곳에 와 있는 나는 지금 그와 흡사하다'라고 견주기도 하였다.

 

永平하면 예로부터 수질이 풍부하고 산수가 수려하여 시인과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양정(二養亭) 터에서 정면으로는 멀리 백운산의 봉우리가 잡힐듯하고, 바로 개천을 비껴 건너편으로는 영평현의 옛 읍터와 양봉래(楊蓬萊)가 노닐었다는 金水亭이 눈앞에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한탄강의 지류인 이곳 주위에는 永平八景)이라 불리는 창옥병(蒼玉屛) · 금수정(金水亭) · 낙귀정(樂歸亭) · 백로주(白鷺洲)가 전후좌우로 삼열해 있어 이르는 곳마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곳 이양정(二養亭) 주위에만도 전석(全石)의 바위가 좌우로 기암을 이루고 있다.

 

그의 <이양정기(二養亭記)>에 의하면 죽기 바로 전해인 1588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로, 11군데의 바위에 각기 대() · ()의 이름을 지어 새겼다고 하는데, 위 암각시는 바로 수경대(水鏡臺)와 나란히 각자되어 있다. 지금 비록 학은 날아가고 대()는 비어 있으나 잡초 속을 더듬어 백학(白鶴) · 청학대(靑鶴臺)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고, 수경대(水鏡臺) · 청냉담(淸冷潭) · 산금대(散襟臺) · 토운상(吐雲床)은 아직도 각자의 자획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적막한 물가에서 임금과 백성을 생각하던 배견와(拜鵑窩)터와, 움푹하게 패인 바위에 말술이나 채워졌다는 와존(窪尊), 그리고 명옥연(鳴玉淵)의 자리도 이리저리 눈짐작을 통하여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어느 후인의 필적인지 알 수 없으나 산금대(散襟臺) 옆에는 선조가 사암을 평한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의 각자가 큼직하게 남아 있다.     <: 신용남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