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정(金水亭)
금수정 바로 앞에 있는 안동김씨 고가터. 양사언의 妻族들이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안동김씨 고가터
안동김씨 고가 터는 조선시대 포천지역에 거주했던 안동김씨의 고택으로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안채와 사랑채 등의 초석이 발견되었다. 고가터는 영평 지역 8곳의 절경중에 하나인 금수정의 북쪽 구릉지에 남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찾았던 곳으로 외부 손님들이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가옥구조에서 사랑채의 규모가 큰 편이다. 안동김씨고가터는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한강 이북 지역에 몇 안되는 조선 후기 양반가옥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을 복원하였다.
금수정(金水亭)
마을 앞을 흐르는 영평천(永平川)변 절벽위에 있는 작은 정자이다. 원래는 조선시대중기 김명리*라는 사람이 현재의 위치에 우두정(牛頭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얼마 후 이 정자를 시인이자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사위 봉래 양사언(楊士彦)에게 주었고, 양사언은 정자 이름을 금수정(金水亭)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후 안동김씨 문중에서 소유하며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1980년대에 같은 장소에 정자를 복원했다. 정자 현판글씨는 양사언의 글씨다.
* [안동김씨 족보에 따르면 양사언은 이곳에 정자를 세운 금옹(琴翁) 김윤복(金㣧福)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호는 봉래(蓬萊). 문인, 서예가로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 평창 군수, 강릉 부사, 함흥 부윤 등을 역임하였는데 외직을 두루 지낸 것은 자연의 경관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자원한 것이라 전한다. 이후 성균관 사성을 역임한 이후 다시 외직으로 나가 외양 군수가 되었다. 이때 금강산에 자주 들러 자연 경관을 즐기면서 읊은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씨가 지금도 만폭동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이후 철원 군수를 지내고 강릉 부사를 지냈다. 목민관 재임 시 각 지역마다 글 솜씨를 발휘하여 비문을 지었는데 그 암각문이 지금까지도 전한다. 특히 포천 영평천 변의 금수정에는 양사언과 관련한 많은 암각문이 전한다. 양사언의 시는 큰 기교 없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일찍이 금강산에 드나들면서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금강산 유람기』가 대표적이다. 또한 명필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초서를 잘 썼다. 안평 대군(安平大君), 김구(金九),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불렸다. 저서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미인별곡(美人別曲)’이 있는데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금수정 강변에 ‘경도(瓊島)’ 등을 새긴 암각문이 있으며, 장인인 금옹(琴翁) 김윤복에게 보내는 「증금옹 시(贈琴翁詩)」가 전한다. 자작동의 ‘유인선 효우 비(柳仁善孝友碑)’ 후면에 양사언이 짓고 쓴 「효우전(孝友傳)」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가사로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193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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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農巖集)에서 詩 '금수정(金水亭)'을 옮긴다. 농암집은 1709년 간행된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창협의 문집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호가 농암(農巖)으로 이조좌랑·함경북도 병마평사·이조정랑·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 사직하고 영평(永平)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春游已多日 (춘유이다일) 어느새 며칠 된 이번 봄놀이夙駕更侵星 (숙가갱침성) 새벽에 길을 나서 밤까지 노네馬首知何處 (마수지하처) 말 머리 어느 쪽을 향해야 할지牛頭問古亭 (우두문고정) 옛 정자서 길을 묻노라洞門分石扇 (동문분석선) 골짝 문은 큰 바위 갈라 서 있고江路接雲屛 (강노접운병) 강물은 구름 덮인 먼 산에 닿아醞藉諧心賞 (온자해심상) 가슴이 부푸는 건 당연지사니瓌奇歎地形 (괴기탄지형) 기이한 산수 모습 감탄스러워觴流仍禊節 (상류잉계절) 물 위에 술잔 띄워 삼짇날 쇠고柯爛卽仙扃 (가난즉선경) 도낏자루 썩는 선경 따로 없으니晉日追高會 (진일추고회) 진나라의 고상한 모임과 같고秦餘訝近坰 (진여아근경) 무릉도원 가까이 있는 듯하네坐隨花屢改 (좌수화누개) 앉은자리 꽃 찾아 옮기며 놀 제興與境俱冥 (흥여경구명) 경치 따라 봄 흥취도 그윽하여라杖屨移風磴 (장구이풍등) 바람 부는 돌 비탈 걸어 오르고樽罍上釣舲 (준뢰상조령) 낚싯배에 술동이 실어 올리니天陰沙更白 (천음사갱백) 날씨가 흐린데도 강모래 희고雨氣壁渾靑 (우기벽혼청) 비 기운에 푸른 산 더욱 선명해凌厲侵蛟窟 (능려침교굴) 거침없이 깊은 여울 배 저어 가고沿洄戛鷺汀 (연회알노정) 물새 노는 강기슭 오르내리네浪舂蓬萊筆 (낭용봉래필) 양봉래의 필적에 파도가 치고苔漫石峯銘 (태만석봉명) 한석봉의 명문(銘文)에 이끼가 끼어人代嗟如許 (인대차여허) 인간의 영고성쇠 이와 같건만川流詎或停 (천류거혹정) 강물이야 멈출 때가 어이 있으리不遑悲舊跡 (부황비구적) 옛 자취 슬퍼할 경황도 없이轉自感親丁 (전자감친정) 스스로 당한 처지 느꺼워지니疇昔陪先子 (주석배선자) 지난날 내 나이 젊었을 적에登臨憶壯齡 (등림억장령) 선친을 모시고 이곳에 올라秋淸倚霜樹 (추청의상수) 맑은 가을서리 맞은 나무 기대고月皎臥宵欞 (월교와소령) 밝은 달밤 창 아래 누워 있었지往事依俙夢 (왕사의희몽) 지난 일 꿈속처럼 아스라하니流光廿七螢 (류광입칠형) 번개처럼 이십칠 년 흘러간 세월恒河觀不變 (항하관부변) 항하런가 강물 모습 변함없는데孤露涕空零 (고노체공령) 아버님 여읜 나는 눈물 떨구네已識哀隨樂 (이식애수낙) 기쁨 뒤엔 슬픔이 따라오는 법唯應醉不醒 (유응취부성) 차라리 술에 취해 잠들었으면行藏戀叢桂 (항장련총계) 세속 떠난 은거 생활 바라던 바니聚散信浮萍 (취산신부평) 사람 인연 부평초와 다름없어라遲暮情何極 (지모정하극) 늘그막의 정회 어이 한량 있으리長歌叩玉甁 (장가고옥병) 옥병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네
*金水亭 : 금수정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伍佳里 永平川기슭에 있는 정자로, 錦水亭이라고도 한다. 그 주변 바위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녹기금백아심(綠綺琴伯牙心)’으로 시작되는 詩〈증금옹(贈琴翁)>, ‘취대(翠臺)’ 등의 초서와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동천석문(洞天石門)’, ‘금수정(金水亭)’ 등의 해서가 새겨져 있다.
*진(晉)나라의 고상한 모임 : 동진 목제(東晉 穆帝) 永和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 손작(孫綽), 사안(謝安) 등 42명의 명사들이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 불제(祓除)하며 주연을 즐기고 시를 지은 모임을 말한다. 《古詩紀 卷43 蘭亭集詩幷序》
금수정(金水亭) 金水亭 암각
금수정아래 깍아 지른 절벽
경도 사진 ↓
경도(瓊島) 玉같은 섬이란 뜻이다. 한 번도 떼지 않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가로 86cm, 세로 230cm의 글씨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큰 글씨를 잘 쓴 양사언의 글씨로 알려져 있고, 浮島(부도)라는 설도 있으나,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는 瓊島(경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연화암蓮花巖 ↓
연화암 위에 새겨진 詩(초서) - 贈琴翁(증금ㅇ옹)
창옥병암각문 앞에서 보았던 와준(窪尊)을 이곳에서 다시 본다.窪尊(와준)의 窪(와)는 우묵(가운데가 둥그스름하게 푹 패거나 들어가 있는)한 웅덩이라는 뜻이며, 尊(귀할 존)은 술잔이나 술 단지의 뜻으로 쓰일 때는 ‘준’이 된다. 樽(=준. 金樽美酒千人血...<춘향전>)과 같이 쓰인다. 청령담 물 가운데의 너럭바위에 한 말술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술 단지가 생겼다. 人工의 흔적이 없는 자연구멍으로 한탄강의 기반암인 화강암에서 이러한 구멍이 자주 발견된다. 여름철 막걸리 한통 부어넣고 천렵(川獵)하기에 딱 그만이다. 이곳에서는 준암(尊巖)이라고
...
글씨가 마멸되어 보이지 않는다. 혹시
尊巖(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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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陵(무릉) 금수정에서 절벽사이 계단을 내려와 마주치는 물가 바위에 각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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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天石門(동천석문) 한석봉의 글씨로 현재 '洞天'만 표출되어 있고 '石門'을 땅속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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廻瀾石(회란석) 중국 황제의 사신 許國(허국)의 친필로 '瀾石'만 남아있고 '廻'자는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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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臺
(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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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세천비’ 바로 옆 바닥 바위에 새겨져 있다. 포천시에서 세운 翠臺(취대)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