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광성보(廣城堡)

광성보 (廣城堡)
강화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제227호. 지정면적 6,102㎡.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강화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사적 제227호. 지정면적 6,102㎡.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는데,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이하 전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다.
강화 12진보(鎭堡)와 53돈대(墩臺)
조선시대에 와서 병자호란 이후 숙종은 강화도를 전란의 방어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12진보(鎭堡)를 두고 그 아래 갑곶돈대를 비롯한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였다.
진(鎭)과 보(堡)는 조선시대의 주둔군대로서, 진은 지금의 대대(大隊), 보는 중대(中隊) 규모의 부대로 서로 상하관계가 아니고 다만 주둔 병력의 수만 다르며 각각 그 밑에 돈대가 소속되어 있다.
돈대(墩臺)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세운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砲)와 총구멍을 설치해 두었다.
개항시기에 강화도에서 벌어진 전투는 프랑스[丙寅洋擾], 미국[辛未洋擾], 일본[雲揚號事件]과 상대한 것으로 이때 12진보가 방어기지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그중에서도 초지진과 광성보가 전투의 중심에 있었는데,
초지진(草芝鎭)은 고종3년(1866)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 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71)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함대, 고종 12년(1875)에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였다.
광성보(廣城堡)는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저스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1차로 물리쳤으나 다시 쳐들어온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魚在淵) 장군과 휘하 장병들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雙忠婢)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세워져 있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미국을 상대로 한 전투로서,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으로 들어와 강제로 통상을 요구함으로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민간인을 죽이고 사신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침몰시켜버렸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871년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척 해병 1,230명 대포 85문으로 무장을 하고 강화해협으로 진입하여 손돌목에서 조선군과 최초의 포전을 한 뒤 초지진으로 상륙하여 광성보에서 전투를 치른 결과, 조선군은 어재연(魚在淵) 장군을 비롯한 4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결사항전하자 당황한 미군은 마침내 함대를 철수시켰다.
병인양요는 프랑스와의 전투로, 1866년(고종 3)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탄압을 피해 청나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이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보복 원정을 간청하게 된다.로즈는 1차로 군함 3척을 이끌고 한양의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와서 지세와 수로를 탐사하여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고, 곧이어 2차로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병력 1,000여 명을 동원하여 리델 신부와 천주교 조선인 신도 3명의 안내를 받으며 조선을 침략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조선군에게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27명의 사상자를 냈고,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수비대와의 정족산성 전투에서도 패하자 마침내 강화도에서 철수하였는데 이때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은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발생한, 조선과 일본 간의 포격사건으로 근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사건이다.운요호는 조선의 동해안과 남해안을 순항하면서 무력적 시위를 벌인 뒤 서해안으로 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하고는 수십 명의 해병이 담수 보급의 명목으로 보트에 나눠 타고 해로를 탐측하면서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강화해협[鹽江]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침입해 오는 일본의 보트에 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모함인 운요호로 철수한 뒤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하고 곧이어 영종진(永宗鎭, 지금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주민들을 상대로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1876년 2월 26일, 달리 강화수호조약(江華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르는 조선과 일본의 불평등조약인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를 체결하여 조선침략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네이버 지식in /박우근(san5379) 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