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망월사[道峰山 望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신라 때인 639년(선덕여왕 8년)에 해호화상(海浩和尙)이 이곳 도봉산에서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옛 이름 월성月城)를 바라보며 삼국통일과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 하였다.
절의 이름은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태자가 나라가 망한 뒤 이곳에 은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할만큼 신라 왕실과 관련이 깊다. 고려시대인 1066년(문종 20) 혜거국사(慧拒國師)가 중창한 이후의 연혁은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황폐해졌다가 조선시대인 1691년(숙종 17) 동계(東溪) 설명(卨明)이 중건했다. 1779년(정조 3)에 영월(暎月)이 선월당(先月堂)을 세웠고, 1800년에는 선월당을 영산전(靈山殿)터로 이전했으며, 1818년(순조 18)에는 칠성각을 신축했고, 1827년에는 절 전체를 중수했다. 1880년(고종 17) 완송(玩松)이 중건한 뒤 1882년 완송이 영산전을 다시 세웠으며, 1884년 인파(仁坡)가 독성각(獨聖閣)을 건립했다. 1885년 완송이 약사전(藥師殿)을 건립했고, 1901년 인파가 큰방을 보수했다. 1906년 회광(晦光) 사선(師璿)이 선실(禪室)과 설법루(說法樓)를 중수했고, 1941년 김응운(金應運)이 약사전을 중건했다. 1969년 주지 춘성(春城)이 퇴락한 선실을 철거하고 2층의 석조 대웅전을 지었으며, 1972년에는 주지 도관(道觀)이 본래 있던 염불당과 낙가암(洛迦庵)을 헐고 현대식 건물의 낙가암을 새로 지었다. 1986년부터는 주지 능엄(楞嚴)이 대웅전을 헐고 선방, 관음전, 영산전,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석조전(石造殿)을 비롯하여 영산전·칠성각·낙가암·선원· 범종각·요사채·범종루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망월사혜거국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22)와 천봉 태흘(泰屹:1710∼1793)의 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66), 1793년에 세운 태흘의 천봉탑(天峰塔)과 1796년 수관거사(水觀居士)가 명(銘)한 망월사천봉선사탑비(경기문화재자료 67)가 있다. 이밖에도 부도 1기와 탑다라니판(塔陀羅尼板) 1매, 원세개[袁世凱]가 1891년 이 절을 유람하고 쓴 망월사 현판, 영산전 전면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 4매 등이 있다. 이 사찰에 관한 옛 기록에는 천봉선사탑비문과 신수망월사기선실설법루기가 있다. 망월사에서 30km 떨어진 곳에 광법암(廣法庵)이라는 부속암자가 있는데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1965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망월사는 명승들을 많이 배출하여 경기 지방의 이름 있는 선(禪) 사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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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교(衆生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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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교(天中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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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중교(天中橋)를 지나면 오른쪽에 암벽장(巖壁場)으로 이용되는 두꺼비바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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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 딱 두꺼비다.
두꺼비바위 앞에서 멀리 수락산이 보인다. 독수리가 거대한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웅대하다.
극락교(極樂橋)
자연암벽이 마치 人工으로 축조한 제방처럼 보인다.
덕제(德濟)샘
해탈문(解脫門)
우물
절벽 꼭대기에 있는 영산전
통천문(通天門)
통천문(通天門)을 들어서서 이 계단을 올라가야 천중선원(天中禪院)으로 갈 수 있다.
망월사 천봉선사
(天峰禪師) 塔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의정부시 호원동 산 91.옆에있는 천봉선사 태흘의 부도탑비이다. 탑비는 어떤 사적이나 글을 새겨 후세에 오랫동안 전하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불교에서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승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부도와 함께 건립된다. 이 탑비는 지대석위에 비몸(碑身)과 개석(蓋石)을 올린 간단한 형식이다.
망월사 천봉당 태흘탑(望月寺 天峰堂 泰屹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6호,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 91. 조선시대의 승려 천봉당 태흘(天峰堂 泰屹, 1710∼1793)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기단, 탑신, 지븅이 모두 팔각형이고 단층인 부도로 지붕과 기왓골 등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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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굴(文殊窟)
문수굴 내부
전나무: 보호수로 수령(160년), 수고(32m), 나무둘레(2m)
문수굴 옆 암벽의 암각글
무위당(無爲堂)
무위당(無爲堂) 현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망월사(望月寺)현판.
지장전의 망월사 현판은 청나라의 원세개가 직접쓴 글씨라고 한다. 원세개(袁世凱,1859.9.16~1916.6.6) 1885년 청나라의 조선주재 총리교섭 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가 되어 서울에 주재하며 조선의 내정, 외교를 조정, 간섭하였다. 후에 1911년 청나라 총통에 취임하여 1912년 청제(淸帝)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 초대대통령(재임1912 - 1916)이 됨.
무위당(無爲堂) 오른쪽 벽면
범봉각(梵鐘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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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맨 위에 있는 전각이 영산전)
如予門(여여문).
아니 오신듯, 다녀 가시옵소서.
고불원(古佛院)
칠성각(七星閣)
월조문(月釣門)! 달을 낚는다.
천중선원(天中禪院)으로 들어가는 문. 참선수행 중으로 출입금지다.
천중선원(天中禪院)과 심검당(尋劍堂).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말이다.
영산전에서 보는 수락산
혜거국사 부도(慧炬國師 浮屠)
망월사 큰 법당에서 남서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혜거국사 부도가 있다. 부도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해 두는 돌탑을 말하는데, 대개 절 근처에 세운다.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다. 전체의 높이는 3.4m이고 탑의 몸통 둘레는 3.1m이다. 탑 모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단부위에 구형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대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 삼단의 일석으로 조성되고 높이가 80cm이다. 그리고 그 위에 괴임대를 놓았다. 탑 몸통은 공 모양으로 조성되고, 괴임대 위쪽과 옥개석 아래쪽에 홈을 파서 탑 전체의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석은 복발과 보주까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낙수면은 목조건물의 지붕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귀꽃은 모두 8개이다.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이며 복발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부도의 주인공인 혜거국사는 속성이 노씨이며, 자가 홍소로서 고려시대 국사를 지냈다. 그러나 행장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高麗道峯山慧炬國師, 始發機於淨慧之室, 本國主思慕遣使來請, 遂迴故地. 國主受心訣禮待彌厚, 一日請入王府上堂, 師指威鳳樓示眾曰, 威鳳樓為諸上座舉揚了, 諸上座還會麼, 儻若會且作麼生會, 若道不會威鳳樓作麼生不會珍重. 師之言教未被中華, 亦莫知所終 [고려의 도봉산 혜거국사가 처음 淨慧之室에 發機하자, 우리 國主가 思慕하여 사신을 보내 청해 오게 하여 마침내 故地로 돌아왔다. 國主가 心訣을 받고는 禮待가 더욱 후해졌다. 하루는 국사를 청하여 王府上堂에 들게 하니, 국사가 위봉루를 가리켜 대중에게 보이며 “저 위봉루가 여러 상좌들을 위해 舉揚하였는데 여러 상좌들은 과연 깨달았소? 혹시 깨달았다면 또 무엇을 깨달았소? 만약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면 위봉루가 어찌 珍重하지 않을 수 있겠소? ” 하였다. 국사의 言教는 中華에 널리 미치지 못하였고 또한 최후도 알지 못한다. 또는 “만약 위봉루를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찌 珍重하지 않을 수 있겠소?”]*威鳳樓: 고려 태조가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문무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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