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굴(南仙窟)과 동광정사(東光精舍)
양주시 황방리에서 보는 임꺽정봉(왼쪽 높은 봉우리)과 감악산정상(가운데 중계탑 쪽)
동광정사(東光精舍)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474-1 감악산 자락에 있으며,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를 갖추고 있다.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이색적이다.
1990년 전후로 일봉선교종(1988년 창건) 소속의 봉암사(鳳巖寺)로 창건되었다가
후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되었다.
그 후 어느 시기에 도선사의 동광(東光)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절 이름이 봉암사(鳳巖寺)에서 동광정사(東光精舍)로 바뀌었다. 청담장학문화재단이사장인 승려 동광(東光)은 도선사 주지를 역임했다.
봉암사(鳳巖寺) 현판과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지위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35에 있는 ‘봉암사(鳳巖寺)’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삼성각
삼성각 밖으로 나와있는 삼성(三聖)
산씀바귀
자귀풀
차풀
탑꽃(산층층이꽃과 헷갈림)
눈괴불주머니
자주조회풀
주름조개풀
노랑물봉선
물봉선
물양지꽃
안내표지판지점에서 보는 임꺽정봉
남선굴(南仙窟)
남선굴은 고려말의 충신 남을진(1331~1393)이 이성계의 회유를 피해 은거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남선굴이란 이름은 19세기 중반의 문헌인 『적성현지』에서 처음 확인된다. 고려 말의 충신 남을진(南乙迪, 1331~1393)이 이성계의 회유를 피해 남선굴에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양주 땅이름 역사』에 의하면, 남을진 관련 설화는 은현면 봉암리에 있는 남을진 신도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남을진 신도비에는 "고려 말의 문신인 남을진은 정치가 문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사천현 봉황산으로 돌아갔다. 이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벼슬에 나아가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고사하였다.
이성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였는데, 남을진은 통곡하기를 '내가 산속 깊이 들어가지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노라'라고 하면서, 드디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감악산 석굴 속에 들어가 눈으로 햇빛을 보지 않고 석굴 밖의 땅을 밟지 않으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후 3일 동안이나 흰구름이 항상 그 위를 맴돌았는데, 시신을 거두어 굴 밖으로 나오니, 큰 바람이 일어나면서 굴 속에 있던 책들을 조각조각 날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남선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주목읍지』에도 남을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남선굴은 높이2.4m, 너비4.5m, 길이(깊이)2m 규모의 쌍굴 형태로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의령남씨 후손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남선굴 안에서 정면(남남동쪽)을 바라보면 은현면 도하리 살구골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남을진의 어머니와 부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남선굴 위에는 또 하나의 작은 굴이 있는데 그 속에는 현문상으로 불리는 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형상은 머리를 흐트린 모습이라고 한다. 양주읍지(1842)에 의하면 감악산의 남쪽절벽에 작은 돌들로 만들어진 감실이 있고 편실이 세워져 있다.
또 앞에는 아름다운 형상의 신인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뒤에는 玄門獨立老聖君守中抱一大道尊作帝王山萬古存木子開基建等身成化 戊子月在申 (현문독립노성군수중포일대도존작제왕산만고존목자개기건등신성화무자월재신)이라는 총3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남을진이 족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석각상은 없어지고 현재는 1997년에 새로 만든 석각상과 복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石刻像後面詩 (석각상후면시)
玄門獨立老聖君 (현문독립노성군)
守中抱一大道尊 (수중포일대도존)
作帝王山萬古存 (작제왕산만고존)
木子開基建等身 (목자개기건등신)
成化戊子月在申 (성화무자월재신)
서기1996년 9월1일 음7월19일
일설에는 고려 말 충신 남을진선생이 은거한 남선굴이 임꺽정굴이라고 한다. 그 이유로 현재의 남선굴에서는 남을진이 살았던 남동쪽 동두천시 상패동 사천마을이 보이지 않고, 정상 남쪽 임꺽정봉(매봉재)밑에 있는 임꺽정굴은 6-7m 깊이의 사각기둥의 수직굴로 바닥은 3-4평 넓이로 남동쪽 한 면이 트였는데 남을진의 옛집이 있었던 사천마을이 훤히 보이는 곳이다. 남을진이 집을 떠나며 노모에게 ‘동굴의 촛불이 보이지 않으면 제가 죽은 줄 아십시오.’라고 했던 위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남을진(南乙珍)[?~1393]은 1368년(공민왕 17) 현량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공양왕 때 벼슬이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성리학을 공부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과 교유하였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양주 사천현 봉황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남을진의 묘 및 신도비는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24 서원말에서 하패리로 넘어가는 지방도 375호선 도로변에 있는 비석골에 위치한다. 비석골이라는 지명은 남을진 묘 및 신도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南乙珍石刻像 복원기념비
묘 및 신도비: 양주군 향토유적 제2호
묘소재지: 양주군 은현면 봉암리 서원동 24번지
석각상봉안지: 양주군 남면 황방리 감악산 122번지
고려조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 남을진 시 문안 호 병재 곡은(南乙珍 諡 文安 號 丙齋 谷隱)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충신 사은(四隱)으로 일컬어 진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1392년)에 이태조가 여러 차례 예를 갖추어 출사(出仕)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이에 불응하고 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니 이에 감복한 이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였으나 받지 아니하고 감악산 석굴에서 아사순절(餓死殉節)하시었다. 후세사람들이 公의 충절을 기리어 이곳을 남선굴(南仙窟)이라 하였다.
이 석굴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있는 石片이 있었다. 즉 入山而效伯夷之節(입산이효백지절) 산에 들어간 것은 은나라 백이숙제를 본받음이요, 被髮而慕箕子之狂(피발이모기자지광) 머리를 풀어 헤친 것은 은나라 충신 기자의 미치광이 노릇을 숭모한 것이다. 또한 피발(被髮)한 석각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그 후면에는 시 한수가 있었으니 그 뜻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玄門獨立老聖君 (현문독립노성군)
守中抱一大道尊 (수중포일대도존)
作帝王山萬古存 (작제왕산만고존)
木子開基建等身 (목자개기건등신)
道學의 문에 우뚝 선 성군께서, 본분을 지키고 道를 품었으니 그 크신 법도 존귀롭도다. 제왕의 산천(나라)세워 오랜 세월 이어 왔는데, 李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의 기를 열어 같은 반열에 서려 하누나. 오랜 세월과 전란 중에 옛 남선굴의 석각상이 없어 졌는데, 沙川佰 후손들과 사회각계의 인사들이 뜻을 모아 이를 복원하며 公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고자, 공이 은거하시던 곳에 석각상을 복원하고 이 기록을 남긴다.
서기 1996년 9월 1일.
사천백석각상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 남면면장 李鎔魯. 沙川伯파중앙종회장 南啓榮
남선굴 앞에는 두 그루의 활엽수를 중심으로 돌무지가 둘러져 있다.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케 하는 기와 및 토기조각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버섯류
노랑망태버섯
남선굴(조금 위쪽)에서 보는 풍경
원당저수지
동광정사
멀리 왼쪽으로 봉암리도 보인다
임꺽정봉
등골나물
흰모시대
모시대
모시풀
멸가치
새끼꿩의비름
무릇(꽃)
뚝갈
돌콩
잔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