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白水 2016. 4. 10. 21:55

 

자동차로 한시간이내의 근거리에 사는 손자들이 이제는 제법 자주 찾아온다.

이곳에서 5km정도 떨어진 수덕사의 식당가에서 산채더덕정식을 먹고 사찰을 한 바퀴 돌았다.

휴일에는 식당이고 절이고 간에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가한 주중에 수시로 찾아와 산보삼아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고 오늘은 대충대충 건성으로 보고나왔다.

다음에 제대로 보기위해 우선 건물배치와 사찰의 역사 등 관련 자료를 검색해서 올린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본사 덕숭총림(德崇叢林) 수덕사(修德寺)

    

 

대한불교조계종에는 다섯 사찰이 선원과 강원을 모두 갖추고 있어 5대 총림이었다

그러다가 2012년에 3사가 총림에 포함되면서 8대 총림이 되었다.

덕숭산(德崇山) 수덕사가 덕숭총림이 된 것은 1984년이다.

예산, 홍성, 서산, 태안, 당진 등 관내 5개 지역의 47개 사찰과 관외 25개 사찰이 있다. 

 

 

총림(叢林)이란?

    선원(禪院: 선승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강원(講院: 불교의 경전(經典)을 배우는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으로 승가대학 또는 승가대학원),

    율원(律院: 율사律師를 양성하는 불교의 전문교육기관으로 율원승가대학) 및 염불원을 갖추고

    방장(方丈)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如法: 여래의 교훈에 맞음)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을 말한다.

 

 

5대총림

   조계총림 제21교구본사 순천 송광사, 영축총림 제15교구본사 양산 통도사, 가야총림 제12교구본사 합천 해인사,

   덕수총림 제 7교구본사 예산 수덕사, 고불총림 제18교구본사 장성 백양사

 

 

3대총림(2012)

   금정총림 제14교구본사 동래 범어사, 팔공총림 제 9교구본사 대구 동화사, 쌍계총림 제13교구본사 하동 쌍계사

    

 

 

 

 

 

<출처> http://www.sudeoksa.com/bbs/contents.php?ct_id=73&cate_id=3030

 

 

 

 

 

 

 

 

 

 

 

 

 

오줌싸개

 

 

 

 

 

 

 

 

 

 

 

 

수덕사(修德寺)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뚜렷한 기록은 없으며 고려 말 공민왕 때에 나옹이 중수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시절인 19세기에조차도 가야산의 가야사보다 사세가 작았던 듯도 하다. 그러다가 한말에 경허(鏡虛)가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키고 그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하여 지금은 우리나라 불교계 4대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황하루로 오르는 긴 계단이 나 있다. 그러나 계단을 통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흙길을 따라 올라가면, 1995년부터 중창 불사해 최근에 완공한 황하루 건물을 볼 수 있는데 대웅전을 본뜬 모습이다. 옛 건물을 따랐으나 이전의 멋스러움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것은 세월의 무게가 실리지 못한 탓일까? 황하루 뒤쪽으로는 돌계단이 엉거주춤 걸려 있어 위태해 보이기도 하고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불사 이전의 아늑함이야 못 살리겠지만 제대로 자리 잡힌 모습이라도 빨리 되찾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둔덕을 올라 마주하는 조인정사 앞에는 통일신라 때의 균형있는 비례를 갖춘 삼층석탑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이 탑은 비례가 깔끔하여 여느 절이라면 꽤 대접을 받았겠으나 수덕사에서는 말없이 서 있다.

 

선방을 끼고 돌아가면 기품 있는 대웅전이 있다. 경내에는 그밖에도 명부전, 백련당, 청련당 들이 있다. 그러나 수덕사는 부속암자와 당우가 많은 편이다. 일제 시대에 신여성으로 화려한 삶을 누리다가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을 썼던 김원주가 일엽 스님이 되어 수도하던 견성암과 환희대가 있고, 만공이 기거하던 금선대도 있다. 이 금선대에는 지금 경허와 만공의 영정이 있다. 또 정혜사로 오르는 중간쯤에는 1924년에 만공이 세운 미륵불입상이 있는데 7m가 넘는 거대한 체구에 굵은 기둥처럼 몸체를 새긴 것 하며 머리에 보관을 쓰고 갓을 얹은 품이 논산 관촉사의 미륵상 이래로 내려오는 충청남도 지역의 고려 시대 석불의 계보를 밟고 있다. 불상으로서의 위엄이나 우아함보다는 구김없이 웃고 있는 모습이 미륵상을 건립한 만공 스님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그대로 전파하는 듯하다.

 

가까이 있는 만공탑은 만공 스님의 부도이다. 팔각기단에 팔각기둥 셋을 받치고 그 위에 둥근 공 모양의 몸돌을 얹은 이 부도는 만공 스님의 제자인 동경미술학교 출신 박중은이 1947년에 세운 현대식 부도이다.

 

 

경허와 만공과 일엽 스님

 

 

수덕사에는 근현대에 이르러 기억해야 할 스님 세 분이 머물렀다.

그 첫째는 한말에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이다. 경허는 법호이며 법명은 성우(惺牛), 속세의 성은 송()씨였다. 아홉 살 때에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한학과 불경을 익혀 1871년에는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고 따르는 문하가 70~80인에 이르렀다. 서른 살 때인 1879년에 길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는데 돌림병이 돈다고 마을사람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에 큰 나무 밑에서 밤새 시달리다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새로 발심하였다. 이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놓아 졸음을 쫓으면서 자지 않고 정진하였다.

 

그 뒤로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와 부석사를 오가며 후학을 지도하여 선풍을 크게 떨쳤다. 깨달음이 크므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 일상화를 추구하여, 한센병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일화를 많이 남겼고 파계승 소리도 들었다. 마침내 1904년에는 사찰을 떠나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이름도 박란주(朴蘭州)로 고치고는 서당 훈장노릇을 하며 살다가 1912425일에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그 제자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 불교계를 지킨 이가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속성이 또한 송씨였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게송을 읊다가 문득 깨달았으니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揭)를 받고 수덕사에 금선대를 짓고 참선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함께 가던 중이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갑자기 남편과 함께 밭에서 일하던 아낙을 끌어안으니 남편이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오는 바람에 힘껏 내달아 산을 올랐다. 나중에 그 중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질책하자 그게 다 자네 때문일세. 그 바람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하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일깨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런 일화는 스승인 경허의 이야기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이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에 어느 스님의 일화라도 무방할 것이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에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조선 31본산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 하자, 총독부 정책에 순응적이던 다른 주지들과는 달리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속세에서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날리던 이였다. 속성이 김()씨요 본명은 원주(元周)였는데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에까지 건너가 수학하였으며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여자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고 일깨웠다. 1920년에 문학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간행하기도 했으며 1962년에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가 많이 알려져 있다. 20세까지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1933년에 수덕사에서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었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사과

 

 

 

가족

 

 

 

 

 

 

심현(深玄)

 

 

 

 

 

 

 

 

 

 

 

 

 

 

 

 

 

 

 

 

 

 

 

 

 

 

 

 

 

암각문

 

 

 

 

 

 

 

 

 

금강문(金剛門)

 

 

 

 

 

 

 

 

 

 

 

 

 

 

수덕사의 석양(夕陽)

-일엽(一葉)스님-

 

덕숭산 수덕사의 지는 해는

청춘을 불살랐던 여승들의 최후와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노을빛이

덕숭산과 수덕사계곡을 붉게 물들이며

새털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리고

청춘을 빨갛게 불사른 채

열반(涅槃)에 들어간다.

 

산길백리 인적 없는 수덕사에 어둠이 내리면

법당엔 하나둘 등불이 켜지고

창호문사이로 배어 나오던 외로운 그림자들!

청춘을 불사르다 가신님들의 그림자들!

그 님들은 지금 어디로 가셨는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엇삽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다하셨던 간절한 님들의 말씀

오늘은 저녁 쇠북소리 되어

길게 누운 덕숭산 그림자 속으로

옴마니 반메훔을 부르며 울려 나간다.

 

 

일엽스님의 삶과 청춘을 불사르고에 나타난 구도(求道) 정신

 

아무래도 청춘을 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 중생적인 이 청춘을 나머지 없이 불살라 버려야 늙음과 죽음이 없는 만년 청춘을 얻을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일엽스님이 자신의 출가 이유에 대해 한 말이다.

 

그는 신학문을 섭렵한 여류 문인이요, 선각자였으며 출가 후엔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禪僧)으로 불린다.

 

일엽(一葉, 18961971)스님의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그는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아버지 김용겸 목사와 어머니 이마대 사이에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가정환경은 어려웠으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해 일찍이 서구사상을 익혔다. 귀국한 뒤 여성 운동을 전개하며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했다.

 

일엽이라는 아호는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사 당시 일본의 유명한 여성문인 하구치 이치요의 이름을 따 지어 준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도 친구 사이로 공개적인 글을 주고받는 등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 가수 겸 배우 윤심덕, 교육인 박인덕과는 용강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은 이후 일엽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됐다. 어린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으며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新詩)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 됐다. 14세 되던 해 스님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었다.

 

스님이 불가(佛家)에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 이후부터다.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백 박사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고리타분하게만 여겼던 불교 속에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1928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불문에 들어선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남달랐다. 만공스님의 지도편달로 오후불식, 장좌불와는 물론 목숨을 건 구도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흘러 마침내 스님은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悟道頌)을 부를 수 있었다.

 

스님은 이후 중생제도와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등 숱한 저술을 통해 불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치 않고 한평생을 꿋꿋이 살았던 일엽스님은 1971128일 세수 76, 법랍 43세로 입적했다.

 

덕숭산 수덕사의 지는 해는/ 청춘을 불살랐던 여승들의 최후와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노을빛이/ 덕숭산과 수덕사 계곡을 붉게 물들이며/ 새털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리고/ 청춘을 빨갛게 불사른 채/ 열반에 들어간다/ 산 길 백 리 인적 없는 수덕사에 어둠이 내리면/ 법당엔 하나둘 등불이 켜지고/ 창호문 사이로 배어 나오던 외로운 그림자들!/ 청춘을 불사르다 가신 님들의 그림자들!/ 그 님들은 지금 어디로 가셨는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다 하셨던 간절한 님들의 말씀/ 오늘은 저녁 쇠북소리 되어/ 길게 누운 덕숭산 그림자 속으로/ 옴마니 반메훔을 부르며 울려 나간다

일엽스님의수덕사의 석양이란 시다.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 7교구 본사(本寺). 그곳에 일엽스님이 출가해 삭발했다는 견성암, 환희대(歡喜臺)가 있다. 한편 가수 송춘희가 부른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이 일엽을 소재로 한 노래라는 설이 있다.

 

일엽은 출가 전 일본 명문가 집안의 한 남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였던 그의 아들, 화승(畵僧) 김태신이 14살에 처음으로 어머니 일엽을 찾아갔을 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한 말이 유명하다.

 

이는 김태신의 자전 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 기록돼 있다. “다 버려야 우주화한 인간이 된다는 그의 어록처럼 그는 아들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갔다.

[천지일보=김지현 기자]

 

 

 

 

 

 

 

 

 

 

 

 

 

 

 

 

 

 

 

 

범종각(梵鍾閣)

 

 

 

 

 

 

대웅전

 

 

 

본전불상

 

 

 

관음전

 

 

 

 

 

 

 

 

 

 

 

 

황하정루

 

 

 

 

 

 

 

 

 

개상사화

 

 

 

 

 

 

 

 

 

 

 

 

바람에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