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기 먹고.. 알 먹고.." 그 시절의 추억

백수.白水 2019. 11. 22. 14:54


    

<왼쪽> 시베리안 허스키, 태산! 힘 좋고 순한데 머리가 둔하다.

<오른쪽> 도베르만, 도기! 훈련을 받았고, 매우 영리하다.

두 마리를 일 년여 기르다가 창원에 사는 임자한테 내려 보냈다. 지금은 어드메서 살고 있는지? 



    

<왼쪽> 밭 가운데 자리한 축사에서 갖가지 동물을 길렀다<오른쪽> 기러기 수컷



    

<왼쪽> 거위와 오리, 그리고 닭이 모여 있다.   <오른쪽> 겁이 많고 말썽을 잘 부리는 염소



파주시적성면 감악산산촌마을로 귀촌한 첫해 2007년에 처음 시작한 일은 가축사육이었다.

얼기설기 뚝딱거리면 짐승들의 잠자리는 마련될 것이고, 새끼를 들여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클 것이니 가급적 많이 길러서 잡아먹자는 심산이었다. 알도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근사하지 않겠는가.

들뜬 마음에 처음부터 욕심을 부렸다.

 

 

허약한 체질의 마누라 몸보신시켜주려고 염소를 사들이고, 고혈압에 좋다는 기러기에 거위·칠면조·오리··오골계에 관상용 꽃닭까지 모두 한울타리 안에 집어넣었다.

네발짐승인 염소막은 따로 짓고, ·오골계·꽃닭은 습한 걸 싫어하므로 기둥을 박아 땅에 좀 높여서 집을 짓고 횃대를 건너 질러주었으며, 기러기·거위·오리·칠면조 등은 땅바닥에서도 잘 지내므로 비를 피할 지붕만 얹어주었다.

중도에 마음이 변하면 언제 때려치울지 모르는 일이니 축사를 잘 지을 필요도, 손재주가 없으니 잘 지을 능력도 없다는 핑계를 대며 폐자재를 이용해서 대충대충 짓고 말았다.

 


가축을 기른다는 것, 살아있는 목숨들을 건사하는 일인지라 그리 만만치가 않다.

이지역은 접경지역으로 군부대가 많고 음식물처리공장도 있다.

닭 몇 천 마리나 돼지 몇 백 마리정도를 기르는 중규모이하의 농장들은 대부분 사료비용을 절약하려고 부대나 움식점의 짬밥(殘飯)을 걷어다 먹인다.

나는 개사료와 염소사료는 구입했지만 짬밥은 6km쯤 떨어진 두지리매운탕촌 강촌매운탕에서 1주일에 두 차례씩 플라스틱 통3개를 꽉꽉 채워 승용차로 실어 날랐다.

짜고 매운 게 매운탕이라서 커다란 소쿠리에 쏟아 붙고는 물을 몇 양동이씩 부어 소금기를 빼내야하는데 그 무식한 짓을 일 년도 넘게 했다.

 

 

고생스러웠지만 기러기·칠면조·거위 알을 먹는 것은 생전처음이었으며, 오리·오골계·달 모두 유정난이라서 좋았고,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때려잡아 함께 먹던 재미도 컸다.

염소는 원래 겁이 많지만 호기심이 많고 방정맞게 촐싹거리며 말썽을 많이 부린다.

제멋대로 나대며 부수기 일쑤고, 웬만한 건 전부 물어뜯어 못쓰게 만들고, 다른 동물들 자는데 들어가 쑥대밭을 만든다. 별수 없이 몇 십 만원어치 자재를 사고 기술자를 불러다 축사분리작업을 해야 했다.

 


아침에 올라가보면 살쾡이의 습격을 받은 오리나 거위 칠면조가 목이 잘린 채로 한마리씩 나뒹구는 가슴 아픈 일도 겪고, 트랙터를 끌고 와서 밭을 갈아 주는 이웃친구는 누가 밭 한가운데다가 축사를 만드느냐 밭을 갈고 골을 낼 때마다 불편하다고 툴툴대기도 한다.


 

농사일로 바쁜 이웃들에게 며칠씩 가축의 먹이를 챙기면서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하기가 어렵다.

하루 이틀이라도 어디 멀리로 출타하려면 아내와 교대로 나가야 되는데, 아내는 무서워서 혼자서는 집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꼼짝 못하고 집을 지켜야만 한다.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구속하는지...

날이 갈수록 힘이 들고 점차 흥미를 잃어간다.



때려치우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시작한지 16개월이 지난 어느 가을날 남아있는 것들을 모두 때려잡고 종쳤다.

그러고는 아내와 둘이서 굳게 약속했다.

그까짓 거 계란이나 고기 사서 먹으면 되지 뭐한다고 이 고생을 하느냐,

앞으로 짐승을 기르는 일은 하지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