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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敬順王陵)

백수.白水 2012. 1. 2. 00:39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전면)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 천년의 역사

 

불국사나 신라왕릉과 같은 수많은 신라의 유물과 유적들이 모여있는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시조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대에 걸쳐 천년이라는 긴 세월 신라를 다스려온 왕들의 무덤은 대부분 경주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보통 신라왕릉은 모두 경주에 있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라의 마지막 왕, 천년의 역사 신라를 스스로 끊어야 했던 비운의 경순왕묘는 선왕들의 묘와 멀리 떨어진 경기도 연천에 위치해 있다. 경순왕의 묘가 왜 이 먼 한탄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을까?

 

신라는 BC57년 시조 박혁거세가 건국하여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천년(992년)을 이어온 나라다. 법흥왕(514~540)때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고 법흥왕의 외손자인 진흥왕(540~576)은 대가야를 정복하고 화랑제도를 창시하여 신라가 강성한 군사력을 키워나가 훗날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열왕(654~661년)에 이르러 신라는 백제를 멸망(660)시키고, 다음 왕인 문무왕(661~681)대에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668) 시키며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했으나 나당전쟁(670~676)을 통해 당을 몰아내고 통일국가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른다. 이렇게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전제왕권을 확립하며 문화의 황금기를 누리게 되나 그 뒤 점차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이 생겨나며 호족세력과 장보고와 같은 해상세력이 힘을 기르는 등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 전제왕권이 흔들리고 국력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진성여왕(887~897)대에 이르러 과도한 부역과 조세, 흉년으로 인해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한다. 이를 발판으로 궁예(후고구려, 901~918), 견훤(후백제, 900~935)등 세력이 일어서며 사실상 삼국통일은 와해되고 신라는 분열되어버리고 만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금성을 함락하고 당시 신라의 왕인 경애왕(924~927)을 인질로 잡았으나 경애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에 견훤이 내세운 신라의 다음 왕이 바로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신라 천년 역사의 참담한 끝맺음을 해야 했던 왕이다. 후백제의 침공으로 영토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힘을 잃어버린 경순왕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자 견훤과 대치중이던 신흥국 고려의 왕건에게 손을 내민다. 정벌한 지역의 백성들을 규휼하는데에도 힘을 쓰는 등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키워가는 왕건에게 경순왕은 신하들과 의견을 모아 항복(935)을 하게 된다. 이로서 천년을 이어온 신라는 역사의 뒤안 길로 남게 된 것이다.

 

신라를 손쉽게 흡수한 왕건은 경순왕에게 유화궁을 하사하고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주어 사위로 삼는다. 또한 경주의 사심관이라는 벼슬까지 내리게 된다. 이로서 경순왕은 골치아픈 망국의 왕 자리를 버리고 고려의 대접받는 신하로, 또 왕의 사위로 마음 편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고려에 항복후 43년을 더 살다 978년 세상을 떠난다. 이 소식을 접한 신라의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자 하였지만 고려의 조정에서는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반대하여 신라왕묘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경기도 연천의 고량포 나루터 뒤 나즈막한 구릉에 묻히게 된 것이다.

 

경순왕릉은 그 뒤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1747년 조선 영조때 후손들이 묘지석을 발견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다시 실전된 것을 1973년 국군에 의해 재발견되어 경주김씨 문중에서 봄, 가을 두차례 제례를 지내고 있다. 경순왕릉의 전체적인 모습은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는데 왕릉처럼 높다란 강(岡)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때 만들어 진 것으로 일반 사대부 가문의 묘와 다를바 없다. 인적이 드문 남방한계선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다 경주의 다른 왕릉에 비해 작고 초라하여 쓸쓸함 마저 감돈다.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릉은 조선 건국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실전되었던 것을1748년(영조 24년) 다시 찾게 되었는데 신라 왕릉 중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다. 왕릉의 구성을 살펴보면 원형의 봉분 하단에 둘레돌을 돌렸고 봉분 앞에 상석, 표석, 장명등과 석양 1쌍, 망주석 2기를 배치하였는데 석물들 대부분은 조선후기 양식을 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마지막 왕이다. 성은 김, 이름은 부로 신라문성왕의 6대손이며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활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이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왕건에게 신라를 넘기고 개성에서 살다가 죽어 경주에 묻히려 행여가 나가다가 왕족은 개성에서 100리를 넘어서 묘를 쓸 수 없다 해서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그래서 신라왕중 유일하게 경주에 묻히지 못한 왕이라 합니다.

 

그런데 유적지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고려의 명분이고 실제로는 경순왕을 따랐던 많은 유목민들이 행여를 따라 경주로 내려가 살겠다고 하니 개성의 백성이 줄고, 또 경주에 묻히면 경주의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고, 또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가 강원도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고 해서 못 가게 막은 것이라 한다

 

경순왕릉(敬順王陵)은 사적 제244호이며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 고량포리(高良浦里) 산 18-1에 소재한다. 지정면적 3,967m2. 높이 3m. 능 앞에는 단조로운 형식의 비가 있고, 그 전면에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간략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봉분은 원형의 포섭을 두른 높이 3m, 둘레 19.5m의 크기이고, 곡장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4각의 대좌위에 서 있는 표석(105*48*17cm)과 상석(103*44cm)내면에 4각 화창과 팔각 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160cm)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105*50cm) 망주석(150cm)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 제질이다.  

 

도라산의 지명유래

최근 남북철도의 연결로 유명해진 도라산역. 도라산은 신라 1,000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바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한 경순왕의 한(恨)이 서려있는 곳. 낙랑공주는 마음이 우울했던 경순왕을 위로코자 이 산에 암자를 지었고, 경순왕은 아침저녁 산마루에 올라 新羅의 都邑(경주)을 그리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都羅山이라고 불렸다.

 

 

1. 경순왕과 관련된 신라 후예의 이야기.

경순왕의 태자는 "신라 황조 천년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며 고려에 항복을 반대했다. 결국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게 되자 이를 통탄하며 개골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며 평생 베옷을 입었다 하여 마의태자라고 불린다. 경순왕의 막내아들인 범공 또한 고려로 투항하지 않고 화엄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평생 베옷을 입고 산속에 숨어살았다는 마의태자에 대한 행적은 의견이 분분하다. 신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따르는 신하들을 이끌고 고려에 저항하며 방어하기에 용이한 강원도 인제지역으로 향했다는 설이 있는데, 인제에는 마의태자 유적지비가 있고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며 마의태자의 이름이 새겨진 5층 석탑 등 실제 마의태자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게다가 얼마 전 방영한 KBS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2009/9/5 방송)편에서는 놀라운 신라 후예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의 한 장면. 신라의 후손이 금을 세웠다는 가설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 대륙 중원에서 한족을 밀어내고 금나라를 세운 금태조 아골타에 대해 금나라 정사는 물론, 금나라 건국시 송나라에서 씌여 진 금나라 견문록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적혀있다.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 (금사본기 제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로 왕(王)과 같다." (송막기문)

 

금태조 완안 아골타. 완안은 한자표기로 金이다. 송막기문에는 金이 왕을 뜻한다고 한다. 아골타의 넷째 아들인 김올출(金兀朮)의 후손들은 감숙성 경안현에 모여살며 자신들의 조상인 완안올출을 김올출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금태조 아골타가 다름 아닌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마의태자가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언급이 되는데,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에 보면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김씨나라라는 명칭으로 금(金)이라 했다... 아골타는 김행의 후손이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정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여기서 김행이라는 인물은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설이다. 부안김씨족보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김행이 마의태자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으나 마의태자의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에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아골타의 시조가 마의태자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했을 때 시기가 신라말기, 고려초라 한다. 나라를 잃은 신라의 유민들이 북쪽을 향했을 시기라는 것. 조선 유학자인 김세렴이 남긴 동명해사록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나온다."경순왕 김부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 년 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

 

또한 1977년 청나라의 건륭제가 43명의 학자에게 지시하여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기록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금의 국호가 신라왕성에서 왔다. (新羅王金姓相傳?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시조가 신라에서 왔다. (完顔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爲氏)"

 

이 밖의 다양한 사료를 통해 금나라를 세운 금태조 아골타가 신라의 후예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비록 신라는 그 이름을 잃었으나 신라의 후예들은 드넓은 대륙으로 진출해 활약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금나라를 세운 것이 마의태자의 자손이라는 점이나 신라의 김(金)씨라는 설에 대해 사학자 들 간의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천년을 이어온 신라가 고려에 순순히 흡수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학자는 없다. 신라의 유민들과 그 후예들은 북방으로 옮겨가 천년 신라의 재건을 위해 힘썼음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선왕들이 묻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의 인적이 드문 낮은 야산에 묻힌 경순왕. 왕건의 배려로 왕의 사위가 되고 벼슬을 얻었으니 편안한 여생을 보냈으리라 생각 할 수 있겠지만 천년을 이어온 신라를 자신의 손으로 고려에 바친 신라의 죄인이요. 자신의 아들들도 그를 떠나 버렸으니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후예들이 금나라를 세우고 대륙을 호령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며 위안을 얻었을런지 모른다.< dkkang@thefestival.co.kr>

 

2.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비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한다. "아이신지료 푸이(愛新覺羅 傅儀)."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이것은 유명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한 장면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성은 아이신지료(愛新覺羅), 한글로 읽으면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과연 애신각라란 성은 무슨 뜻일까?

바로 애각신라(愛覺新羅)..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신라? 신라라면 삼국시대의 그 신라를 말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럴지도 모르겠다'이다. 바로 청나라의 황실이 신라황실의 먼 후손이라는 기록이 여럿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淸)나라의 원래 이름은 후금(後金)이다. 당초 청의 시조 누르하치가 나라를 건국했을 때의 이름은 후금으로, 이는 예전에 번성했던 금(金)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다. 금나라라? 이는 다르게 읽으면 김나라라고 읽을 수도 있다. 왜 나라 이름을 김이라고 했을까? 김(金)은 바로 신라 왕족의 성씨이다. 바로 금나라의 건국자였던 아골타가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 금사 ] " 금의 시조는 함보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 송막기문 ] "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만주원류고 ]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고려사 ] "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금나라의 조상이다 "

 

이런 역사서의 증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즉, 금나라의 시조가 부안 김씨의 다른 일파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금나라와 그 뒤를 이은 청나라는 신라의 일파가 세운 나라고, 이는 그들이 곧 우리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대사상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만 치부했던 조선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청나라는 그들이 조선과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는 있었던 듯하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 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내기도 한다."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물론 이러한 근거들만으로 애신각라가 '신라를 생각하라'라는 의미이고 청나라가 신라의 후예라고 단정 짓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만주어로 아이신은 '금'이라는 뜻이고, 줴러는 '성 姓'이라는 뜻으로 애신각라 즉 아이신줴러는 단순히 금씨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는 김씨의 후예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냥 금나라의 후예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이 틀렸다는 주장도 있다. 청나라 황실의 성은 원래 金이라는 뜻의 애신(愛新)인데, 이는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타커스의 직계 후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다른 방계후손들은 따로 각라(覺羅)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에 이 둘을 붙여 성을 애신각라라고 하였고 각라는 신라를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타커스 직계외의 '종실'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출처: 니콜로젠의 블로그> 

 

3.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른바 재야사학에서는 만주족을 한민족과 동일선상에 놓고 그 역사를 편입하려는 시도가 잦았다. 대표적인 것이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경우다.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고국인)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청나라 하면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로 불리며 천대받은 나라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금(金)'이 포함되어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성 하나로 어찌 이렇게 비약이 되는지 의문이 생긴다.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나? 이렇게 말하면 금나라의 시초가 신라라는 얘기를 한다. 금나라 시조 완안아골타가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유명한(?) 얘기. 그 근거로는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라는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를 들고 있다. 여기에 보면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대목을 썼다며 근거로 삼는다. 이런 주장의 근원은 2000년 동아매거진에 나온 모교수의 연재 글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그 글은 '그래서 금나라는 우리의 역사로 편입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인용이 웹상에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이 소개된 적이 없다. 과연 이게 진짜일까?

한국 고전번역원(http://www.minchu.or.kr) 통한 검색 결과 동사강목에는 저런 말이 쓰여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근거 미상의 말은 아니었다. 이 얘기는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전해지고 있었다. 해동역사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 사람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적에 나이가 이미 60여 세였다. (중략) 시조는 완안부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그 부(部) 사람들은 양 족속 간에 사이가 나빠 서로 싸웠는데, 이를 풀 길이 없었다. 완안부의 사람이 시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이 원한 관계를 풀게 해서 양 족속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지 않게 한다면, 부에 나이 60인데도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진 여인이 있는데, 그와 짝을 맺어 주겠다.” 하였다. 이에 시조가 그러겠다고 승낙하고, 직접 가서 깨우쳐 주니, 원한 관계에 있던 집 사람들이 약속한 대로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의 사람들이 신복(信服)하면서 청우(靑牛) 한 마리를 주어서 사례하였으며, 아울러 60세 먹은 신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시조가 청우로써 납빙(納聘)하는 예를 갖추고 신부를 맞아들였다. 그 뒤에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은 오로(烏魯)이고 차남은 알로(斡魯)이며, 딸 하나는 주사판(注思板)이다. 이에 드디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천회(天會) 14년(1136, 인종14)에 경원황제(景元皇帝)라고 추시(追諡)하였다. 《금사(金史)》

 

살펴보건대, 《송막기문(松漠紀聞)》에 이르기를, “여직(女直)의 추장(酋長)은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불리는데, 완안은 중국 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형제가 세 사람인데, 한 사람이 숙여진(熟女眞)의 추장이 되었다. 완안은 나이가 60여 세로 여진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데, 그 여인 역시 60여 세였다.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이 바로 호래(胡來)이다. 이로부터 3대가 전해져서 양가태사(楊哥太師)에 이르고, 또다시 아골타(阿骨打)에게 전해졌다.” 하였는데, 이것은 함보(函普)의 사적(事跡)과 유사하다. 또 이르기를, “금나라 황제의 9대조 이름은 감복(龕福)으로, 경원황제에 추시되었으며, 시조(始祖)로 불린다.” 하였는데, 감조(龕祖)는 바로 함보(函普)의 음이 바뀐 것이다. 《평산부지(平山府志)》의 인물조(人物條)에 실려 있기를, “본주(本州)의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금나라의 선조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에 여진에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고을(古乙)이라고 하였다.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阿骨打)는 바로 이 사람의 후손이다.” 하였다. 다만 금준과 극수 중에 누가 함보인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결국 금나라의 태조 완안아골타의 4대조 조상이 신라, 고려 사람이라는 말을 해놓은 것일뿐 신라왕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등의 다른 말을 한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누군가 왜곡 비약하기 위해 출저도 제대로 확인안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갖다 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럼 만주원류고는 어떨까?

우리 왕조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우리 말(만주어)로 금은 애신인데 금원(金源 : 금나라)과 같은 일파라는 증거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에 이들은 금나라를 세운 완안씨와는 다른 일파임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 왕조는 대금(大金)때에 완안씨에게 복속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완안씨가 모두 우리 왕조의 신하가 되었다.

 

더욱 문제는 만주원류고를 어떤 시각에서 봐야 하느냐는 점에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할 생각)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 만주원류고를 자주 인용하였지만 이 만주원류고는 만주인의 시각으로 쓰여 졌으며 고증학적으로 쓰여진 책이지 결코 우리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책이 아님을 염두에 둬야한다.< http://flyturtle.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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