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핀 얼음꽃 헤치며 보드득 눈 밟는 소리 좋구나
태백산행/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 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태백산은 한 해 두 번 꽃 천지가 된다. 6월 초엔 붉은 철쭉꽃이 흐드러지고, 겨울엔 온통 눈꽃 세상이다. 요즘 태백산 잔등엔 상고대가 다발로 피었다. 천년 푸른 주목에 하얀 얼음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키 작은 철쭉가지에도 수정 꼬마전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상고대는 나무서리이다. 나뭇가지의 물방울이 얼어붙은 ‘눈물 꽃’이다. 벌거벗은 겨울나무의 전신사리이다. 태백산 장군봉 기슭 주독 군락지에 펼쳐진 눈꽃세상. 고시목에도 눈꽃망울이 맺혀혔다. 태백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태백산에 고시랑고시랑 눈이 내린다. 눈은 이미 수북이 쌓였다. 사위는 쥐죽은 듯 적막하다. “뽀드득 뽀득!” 눈 밟는 소리만 빡∼빡! 밀린다. 귓속의 공기가 팽팽해진다. “두둑 두두둑!” 문득 간밤에 얼었던 눈 허리 밟는 소리. 뭉툭하다. 발바닥이 푹 꺼진다. 눈이 무릎까지 빠진다. 종아리와 발목이 목도리를 두른 듯 아늑하다.
태백산은 편안하다. 낙동강과 한강의 고향. 크고 작은 온갖 산들의 머리. 살집 두툼한 육산(肉山)이다. 굵은 뼈는 살집에 숨어 있다.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후덕하다. 높되 험하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그 품이 아늑하다. 역시 ‘큰 밝음의 산’답다. 조선시대 화가 이인상(1710∼1760)은 1735년 겨울, 사흘 동안 눈 쌓인 태백산에 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100리에 이른다. 결코 그 공덕을 드러내지 않으니, 마치 대인의 덕을 지닌 것과 같다.”
겨울 태백산은 눈 밟는 재미로 오른다. “싸르륵 사그락” 방금 내린 싸락눈 밟는 소리, “보드득! 보드득” 행여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밟는 소리, 마치 곰삭은 홍어 뼈, 잇몸으로 씹는 것 같다. “저벅 부드득!” 발뒤꿈치부터 즈려 밟는 소리, “퍼벅! 퍼버벅!” 아이들이 종종걸음 치며 밟는 소리, “저벅! 절푸덕!” 내려갈 때 내디디며 밟는 소리, 발바닥 가운데에 은근히 부풀어 오는, 물렁한 촉감이 쏠쏠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 밟는 방식이 다르다. 여성들은 보통 나긋나긋 밟는다. 살몃살몃 지그시 밟는다. 살금살금 어르듯이 밟는다. 남자들은 퉁퉁 몸을 실어 밟는다. 다리를 쭉쭉 뻗어 퍽퍽 내디뎌버린다. 그러다 한순간 아이쿠! 넉장거리로 나뒹군다.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장비이다. 신발 속으로 파고드는 눈과 정강이의 찬 기운을 막아주는 스패츠도 물론이다. 신발은 발목 끈을 다시 한번 꽉 조여야 한다. 눈길은 조금씩 밀리는 맛으로 걸어야 맛있다.
겨울 태백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그만큼 완만하고 코스도 짧다. 사길령매표소, 유일사매표소, 백단사매표소, 당골광장 어느 코스나 5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오르는 데 2∼3시간, 내려오는 데 1∼2시간. 대부분 산은 7푼 능선 위쪽으로는 가파르다. 하지만 태백산은 8푼 능선 위쪽이 평평한 언덕 즉 평전(平田)이다. 영락없는 암소 잔등이다. 그곳의 5, 6월은 철쭉꽃이 장관이다. 겨울엔 눈꽃이 황홀하다. 8푼 능선까지 오르는 데에도 ‘깔딱고개’ 같은 것은 없다. 완만하다. 더구나 출발지점이 이미 해발 850m가 넘는다(유일사 주차장 850m). 꼭대기 장군봉 1567m까지 반쯤 거저먹고 오르는 셈이다.
역시 눈꽃의 으뜸은 상고대(Air Hoar)이다. 꼭대기 부근의 철쭉 분비나무 주목 잣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하나같이 눈을 흠뻑 뒤집어쓰고 있다. 상고대는 나무서리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얼어붙은 ‘얼음꽃’이다. 겨울나무의 사리 ‘눈물꽃’이다. 한 줄기 겨울햇살에도 반짝반짝 빛난다.
태백산 평전마다 키 작은 철쭉무리 가지에 얼음 꼬마전구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억새 쑥대머리에도 하얀 얼음꽃이 피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나무에도 주렁주렁 매달려 수정처럼 빛난다. 영락없는 크리스마스트리다. 금방이라도 깜박깜박거릴 것 같다.
나뭇가지들은 겨우내 상고대를 피우며 ‘얼었다 녹았다’를 되풀이한다. 살은 얼고 피부는 트다 못해 얼어터진다. 그래도 얼음꽃을 피우고 또 피운다. 강원 대관령 덕장의 황태들처럼 얼음구덩이에서 산다. 나무는 그렇게 얼음꽃을 수없이 피운 뒤에야, 비로소 새봄 황홀한 꽃을 피워 올린다.
태백산 보호주목은 모두 3928그루이다. 설악산 덕유산 소백산 주목보다 잘생겼다. 키도 크고 붉은 근육질 몸매가 탄탄하다. 붉은 열매, 붉은 껍질에 늘 푸른 뾰족 바늘잎. 그 사이로 주렁주렁 피운 하얀 얼음꽃.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그리고 땅바닥에 장렬히 쓰러져서 천년. 얼음꽃을 무려 삼천 년 동안 피운다.
태백산 천제단은 새해 1월 해돋이 으뜸 명소이다. 인터넷여행 숙박사이트 인터파크투어 조사에 따르면 2012 임진년 흑룡의 해 해돋이 예약건수는 태백산 천제단이 23.4%로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는 포항 호미곶 16.9%, 해남 땅끝 13%. 그렇다. 꼿꼿하게 서 있는 얼음꽃 주목나무. 그 뒤로 첩첩이 웅크리고 있는 겨울태백의 장엄한 어깨뼈. 용처럼 꿈틀거리는 추사체. 윙윙 불어대는 맵싸한 칼바람. 푸른 동해바다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해. 천제단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붉은 햇덩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벽 서너 시쯤 오르기 시작해 일출직전 장군봉이나 천제단에 이르면 된다. 삼대(三代)가 덕을 쌓아야 태백산 해돋이를 볼 수 있다던가. 날씨가 좋고 나쁜 것은 하늘의 뜻이다.
<김화성 전문기자의 &joy]태백산 눈꽃 트레킹mars@donga.com>
왕궁냄새 나는 마니산 참성단,토속적인 태백산 천제단
한민족은 ‘하늘의 자손’이다. 민족의 시조 단군 할아버지가 그 단적인 예다. 시월상달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풍습도 마찬가지다. 부족국가시대 고구려 동맹, 부여 영고, 동예 무천 등이 그렇다.
하늘의 제사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 안성맞춤이다. 태백산 천제단, 강화 마니산 참성단, 북한 구월산 천제단은 그러한 흔적이다. 산꼭대기에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쳤다. 참성단의 한자 ‘塹城’은 ‘성을 파서 제단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태백산 천제단(天祭壇)과 강화 마니산 참성단은 뭐가 다를까. 둘 다 모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나타난다.
신라시대 태백산 천제단에선 천신 즉 단군과 산신을 아울러 모시다가, 불교국가인 고려시대엔 태백산 신령을 주로 모셨다. 유교국가 조선 전기엔 산신도 빠지고, ‘천왕(天王)’을 모셨다. ‘신(神)’이 ‘왕(王)’으로 격하된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년) 이후 다시 ‘천신(天神)’으로 직위가 올라갔다. 나라가 바람 앞 등불 같은 신세가 되자, 단군 할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제사를 맡은 제관(祭官)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태백산 천제단은 신라 땐 왕, 고려 땐 국가가 파견한 관리가 주도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그 지방의 구실아치나 백성이 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 이에 비해 강화도 참성단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줄곧 국가 관리들이 제사를 맡았다. 각종 제사비용을 위해 별도의 땅 즉 ‘제전(祭田)’까지 내려줄 정도였다. 제상에 올리는 제수(祭需)도 차이가 있다. 태백산 천제단에선 조선시대 소와 삼베를 주로 올렸다. 요즘도 쇠머리와 삼베를 올린다. 또한 소, 삼베, 백설기를 빼곤 모든 제수용품은 날것 즉 생(生)으로 올렸다. 참성단에선 우리 눈에 익은 술, 떡, 탕, 차 등을 올렸다.
태백산 천제단은 토속적이고, 마니산 참성단은 왕궁 냄새가 난다. 천제단이 백성의 자발적 기도처라면, 참성단은 국가의 공식 제천의례 장소였다. 천제단이 정상 부근에 3곳이나 이어져 있다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너도나도 봉우리마다 돌로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낸 것이다.
태백산 천제단의 토속화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동학 등 신흥종교들이 ‘민족의 종산(宗山)’으로 떠받들며 그 아래로 모여든 것이다. 의병들은 천제단에서 ‘독립기원제’를 지냈다. 태백산 자락 아래 식민지 백성들은 너도나도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 민간신앙의 성지로 이어졌다. 요즘도 태백산 주위 곳곳엔 자생적 촛불치성 기도소가 많다. 산불을 막아야 하는 산림청으로선 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