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수왕의 승부수, 고구려 남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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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승부수, 고구려 남진 프로젝트
● 프롤로그
처음 타보는 거라 무척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네요. 오히려 좀 더 넓은 곳으로 나가 달린다면 말을 타고 광활한 영토를 달리던 고구려인의 기상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은 욕심도 생기는데요, 너무 맘만 앞선 건가요? 자, 오늘은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길 장에 목숨 수. 바로 장수왕입니다. 광개토대왕만큼은 아니지만 고구려왕들 중 그 이름이 많이 알려진 왕이죠.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이름처럼 아주 장수했던 왕입니다. 98살까지 살아서 이름도 장수왕이라고 붙여졌죠. 하지만 무엇보다 장수왕하면 고구려 역사상 영토를 가장 넓혔던,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룬 왕입니다. 하지만 장수왕이 어떻게 영토를 넓혀나갔는지, 또 어떤 생각으로 국가를 운영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광개토대왕에 가려 그리 많이 조명되지 못한 게 사실인데요, 여기 장수왕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송서에 나온 기록인데요. “련에게 말을 보내달라고 하니 말 800필을 보냈다.” 여기서 련은 장수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풀이를 하면 송나라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말을 보내달라고 하니 말 800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튜디오에도 말이 나와있습니다만, 이런 말이 800필이라, 엄청난 수죠. 더구나 당시 송나라는 중국 대륙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에서 송나라로 가려면 이 서해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 800필을 어떻게 바다 건너 송나라까지 보냈을까요? 그리고 말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말 800필을 바다 건너 송나라에 보내려면 어떤 배에 어떻게 실었을까. 제작팀이 찾은 곳은 전남 완도의 소세포. 그곳에 드라마 <해신>에 나왔던 배가 있다. 동력선이 등장하기 전 배는 이렇게 풍력을 이용해서 가는 돛단배였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해신>에서는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 그 당시의 배를 제작했다.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은 배 중에 고구려 장수왕 때와 가장 가까운 시기의 것이어서 여기에 말을 태워보기로 했다. 은퇴한 경주마 10마리를 어렵게 완도까지 운송했다. 겁이 많기로 유명한 동물이 말이라고 하는데 말들이 순순히 배에 오를까?
푸른 목초지에서 생활하던 말들은 포구라는 낯선 환경에 불안해했다. 말을 배에 싣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몰아줘야 겨우 배에 실을 수 있었다. 모두 오랫동안 말을 다루던 전문가들이지만 한 마리씩 배에 실을 때마다 한참을 진땀을 빼며 실랑이를 했다. 1600여 년 전 800필의 말을 배에 싣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을 배에 묶을 때도 요령이 필요하다.
유상규 / 말 전문가
"이렇게 배에 태우기는 처음인데요. 말이란 동물 자체가 겁이 많기 때문에 물은 좋아해요. 하지만 물에 건너가는 것 자체를 겁을 내고 있습니다. 앞이 막혀있으니까 위압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쪽으로 얼굴을 뒀고요. 반대로 해안 쪽을 보게 한다면 갈매기라든가 이물질이라든가 말이 놀랄 수 있어요."
고작 10마리의 말을 태우는데도 말을 배에 실어 출항하는데 1시간 남짓 시간이 걸렸다. 바다 건너 송, 남경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700km. 풍력을 이용해서 가면 일주일정도 걸리는 거리다. 말에게나 말을 운송하는 사람에게나 쉽지 않은 긴 항해였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말의 가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우선 고구려 말과 유사한 것을 찾아보았다. 제주 말과 몽고말의 혈통이 섞여 있긴 하지만 고구려에서 쓰던 북방의 말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제구는 크지 않아도 서양산 경주마에 비해 오히려 지구력과 힘이 좋다.
김준 축산연구사 / 제주도 측산진흥원
"여기 보호되고 있는 것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 되고 있는 거라 가격을 환산할 수 없고 천연기념물과 순수혈통들이 농가에서 사육되고 있고 거래되고 있는 걸 견주어서 얘기를 하면 마필이 견주능력이 있는 마필은 가격이 구백에서 천만원대 경주 능력이 우수한 개체는 2000에서 3000만원까지 호가하고 있어요."
고구려시기 말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제주마를 연구하고 있는 장덕지 교수를 찾았다. 하지만 고구려시대 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건 조선시대 것뿐이다.
장덕기 교수 / 제주마 문화연구소
"가격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목자의 3배. 가격이 비싼 제주도 흉년 들면 말 도적. 말 도적을 강제로 이주시킨다. 평안도, 함경도까지 600명에서 800명까지 여러차례 나누어서 도적들을 귀향을 보내고 또는 곤장을 때린다든지 팔에 제마라고 말 도적이라는 걸 인두로 지져서 영원히 남도록 이렇게 아주 가혹한 행위를 한 걸로 봐서 말 가격은 대단히 비싼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경국대전을 통해 당시 말의 가격을 알 수 있다. 말 한 필에 쌀 20석. 지금 쌀 가격에 대비해 가격을 뽑아보면 대략 800만원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엔 운송수단이자 군수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더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고구려는 만주와 북방에 걸친 유목지역으로 조선시대보다는 말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 말은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였기 때문에 그만큼 귀하게 여겨졌다.
윤명철 교수 / 동국대, 해양문화연구소
"당시 말 800필은 지금으로 말하면 800개 미사일에 해당할 정도로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바로 말을 운반할 수 있는 운송능력에 관한 것인데요.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을 운반한다는 건 조선공학적으로 보나 항해체로 볼 때 매우 어렸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11세기경에 바이킹 선단들이 말을 운반할 때 한 배에 병사 43명과 군마 2필을 운반하는 것이 적정량이었습니다 그러니 800필의 말을 운반한다는 것이 그것도 대동강하구에서 양자강 하구 지역까지 가는 것은 엄청난 의미의 대선단이 엄청난 조선술, 항해술을 겸비한 상태에서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 800필을 운반하려면 단 한척의 배로는 불가능 한 일. 이렇게 수십 척의 배가 말을 싣고 송나라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한 말을 송나라에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북중국에 있었던 강력한 세력인 북위는 수시로 동방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436년 북위는 북연을 침략해, 성을 포위한다. 그러자 북연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급히 군사를 보내 북연의 왕을 구출해낸다. 고구려로서는 북위의 침략을 대비한 사전 대응책이었다.
여호규 교수 /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북위와의 정면대결은 최대한 피하면서 고구려의 군사적 위용을 북위에 보내주는 그런 정책을 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구려가 진격하는 건 저지하면서 최대한 북연이 가지고 있던 역량을 고구려 국가역량으로 흡수할 수 있는 그런 전략을 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439년 송나라가 북위를 치려하니 말 800필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낸다. 고구려 장수왕으로서는 송을 통해 북위를 견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여호규 교수
"군사력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중장기병을 얼마나 보유했느냐의 여부가 판가름을 나게 합니다. 근데 남중국의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말을 기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중국의 송은 북방 어느 국가로 말을 수입해야 하는데 바로 그 수입선을 고구려와 송의 외교 관계 긴밀해지면서 고구려로부터 찾았고 또 고구려의 경우에는 북위 견제하기 위해 송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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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나라에 말 800필을 보냈다는 기록을 통해 그 시기 국제정세를 읽을 수가 있었는데요, 이것은 광개토대왕 때와는 아주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지도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
광개토대왕 때 북중국은 5호 16국 시대였습니다. 즉 5개 부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생겼다가 망하기를 거듭하는 그야말로 혼란스런 상황이었습니다.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침없이 동북아대륙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런데 5세기로 접어들면서 5호 16국 중 북위라는 나라가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주변의 소국들을 하나 둘 멸망시켜나가더니 결국 북중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장수왕이 즉위한 건 5세기 초인 412년 바로 이 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장수왕에게, 북위는 신경이 쓰이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는데요. 이러한 어려워진 국제정세를 풀기 위해 송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외교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장수왕은 어떤 외교 정책을 폈을까요.
“북위의 동방진격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또 북위가 각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외교망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북연의 군사를 파견해서 북위의 동방진격을 저지한 다음에 곧바로 남중국에 있는 송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합니다. 그러는 한편 북방 몽골 초원에 있는 유연과의 관계도 긴밀하게 하면서 바로 유연과 송과의 외교 관계를 매개해주면서 북위를 환상으로 포위하는 그런 외교적인 정책을 펴게 됩니다.”(인터뷰 요지, 여호규 교수)
송만이 아니라 북위 위쪽에 있는 유연과도 긴밀한 외교관계를 가져, 사방에서 북위를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즉 북위가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해나가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막는 것이죠. 장수왕은 이렇게 탁월한 외교술로 달라진 국제정세를 대응해나갔습니다. 그럼 장수왕은 북쪽의 안정에만 신경을 썼던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장수왕의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진정책입니다. 따라서 남진은 장수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코드이기도 한데요, 북방을 안정시킨 뒤 비로소 장수왕은 본격적으로 남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남진 흔적은 한반도 남단 곳곳에 남아 있다. 충북 청원군의 남성골산성. 지난 2001년 발굴된 산성이다.
"목책이 있던 구덩입니다. 근데 목책을 세운 방법이 구덩이 길게 파고 군데군데 보통 전봇대만한 큰 기둥 세우고 단단하게 점토로 고정을 시켰습니다. 그 걸로도 부족해서 바깥에서 돌과 흙을 이겨서 흙 담장을 쌓듯이 바깥에 벽체를 보강해서 올린 그런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지방도로 터널공사를 하기 위해 사전에 발굴 작업(2001년)이 진행됐다. 처음 발견된 건 목책을 꽂았던 구멍. 5m 이상의 큰 목책을 세웠던 흔적이다. 그런데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차용걸 교수 / 충북대 역사교육과
"놀랐습니다. 처음 시굴단계에서는 백제 토기도 나오고 이른 시기의 삼한시기 토기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걸로 할 때 삼한시대 목책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발굴을 진행해 보니까 이것이 백제 혹은 삼한시대보다는 마지막 사용한 연대가 고구려이고 그에 따라서 처음 견해가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토기를 구워냈던 가마터가 무려 14개 나왔는데, 이 가마터에서 고구려 토기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고구려가마터는 중국이나 북한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성과였다. 당시 발굴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국립청주박물관을 찾았다.
"이렇게 생긴 자배기, 이런 형태고 요런 형태의 손잡이가 달리고 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시루가 됩니다. 이런 건 이제 아가리가 깨졌지만 항아리, 물병, 병사들 물병 이런 항아리 종류가 납작 바닥입니다. 마침 백제 토기가 있어서 비교가 되는데 백제 토기는 다 둥근 바닥이거든요. 이렇게 받침을 놓지 않으면 서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받침이 없습니다. 백제 토기는 받침을 만들기도 하구요. 띠로 고리를 만든다고 해서 띠고리 손잡이."
남성골 산성에서 토기류 외에 각종 고구려 무기들도 출토돼 군사집단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14개의 가마터는 어떤 의미일까?
최종택 교수 /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토기 굽던 가마라든가 여러 시설이 발굴되고 유물로도 무기와 군사용 무기 외에도 토기 생활용 토기와 농기구 이런 게 나오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단순히 군사집단으로의 전쟁을 주업무로 하긴 하지만 평상시에는 농사도 짓고 토기도 제작하고 이런 다양한 집단이 합쳐져 있는 군사집단이지만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집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언제 청원지역까지 내려와 성을 쌓았을까? 당시 발굴팀은 남성골산성에서 나온 유물의 목탄 흔적을 가지고 방사성 탄소연태측정을 실시했다. 그 결과 남성골산성의 축조시기를 알 수 있었다.
윤민영 책임연구원 / 서울대학교 기초과학공동기기원
"산성 시료의 경우에는 가장 최하값이 370년에서 620년 사이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 되는, 의미가 있는 게 470년에서 490년에 연대가 많이 집중되고 있었고요."
5세기말이라면 바로 고구려와 백제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때다.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부대는 한강을 넘어 백제의 수도를 공격했고 일주일 만에 한성을 함락했다. 그리고 도망가던 백제 개로왕을 잡아 아차산 밑으로 끌고 가 목을 벤다. 이렇게 한성을 함락한 뒤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군은 한반도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왔던 것이다. 그때 쫓겨 내려가는 백제군을 추격해 내려온 곳이 이곳 청원지역. 금강 너머 불과 100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 공주가 있었다. 백제의 새 수도인 웅진을 코앞에 두고 고구려는 성을 쌓아 백제와 대치했다. 목책성이지만 5m가 넘는 굵은 목책을 두 줄로 쌓고 그 사이에 진흙을 다져 넣은 뒤 마지막으로 불화살 공격에 대비해 바깥 면을 돌로 두른 견고한 성이었다. 그런데 석성을 쌓던 고구려가 왜 이곳에는 목책성을 쌓았을까?
차용걸 교수
"역사상 전진기지는 항상 처음엔 목책을 세웠다가 안정되면 토루를 하거나 돌을 이용해 굳게 쌓는 법인데 여기서는 목책단계에서 돌이나 석축을 일부만 하고 그 안정된 석축 고구려의 특징적인 안정된 석축방법이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불안한 정세 가운데 15년 내지 20년간 남방 병략의 전초기지로서의 도시역할을 했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남진을 계속하고 있던 상황.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쉽게 쌓을 수 있는 목책성을 선택한 것이다. 그럼 이후 고구려는 어디까지 내려갔을까? 이곳은 백제성인 대전의 월평산성이다.
“남쪽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요, 원래는 여기가 돌로 쌓인 성벽이고 이쪽이 성 안쪽입니다. 이쪽이 밖이고 밖으로는 갑천이 흘러서 자연해자역할을 하고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와서 작은 능선의 성을 쌓았습니다. 원래 성이 5m 가량 돌로 쌓여있었는데 무너지면서 흙이 덮어서 흙이 보이지만 원래는 석성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안쪽에는 흙을 다져 쌓은 토성이 있고 그 밖에 돌을 붙여 쌓은 성이다 다 돌이 아니고 무너지면서 안에 있던 흙이 덮으니까 돌이 안 보인다.”
발굴 당시 사진을 보면 토성 바깥으로 돌을 쌓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고구려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최종택 교수
"월평동 산성은 원래 백제가 6세기 말 7세기 전반에 쌓은 석성입니다. 근데 여기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는 건 석성이 쌓이기 전에 구릉을 이용했을 때 그때 고구려 유물입니다. 그래서 출토상황은 주로 백제성벽 아래쪽에 고구려 유물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유물을 보면 대략 4세기, 5세기 후반 5세기 말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유적도 장수왕의 부대가 계속 남하하면서 남겨놓은 유적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475년 한성을 함락한 장수왕은 쫓겨 내려가는 백제군을 따라 충북 진천, 청원을 거쳐 대전까지 밀고 내려온다. 백제의 새 수도인 웅진에 바짝 다가간 것이다.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은 마치 백제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강하게 압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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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에서 계룡산만 넘으면 바로 웅진, 즉 공주입니다. 직선거리로 정확히 계산은 안 되지만, 차를 이용하면 4, 50분 걸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죠. 그러니까 고구려는 한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웅진 목전까지 밀고 내려가 백제를 위협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수왕이 이렇게 무서운 기세로 백제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은 뿌리 깊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4세기 초부터 두 나라 간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당시 상황을 잠시 보시죠.
4세기 초반 고구려와 백제 사이엔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 그런데 313년 고구려는 낙랑군을 축출하고 바로 1년 뒤 대방군을 멸망시킨다. 이후 국경을 맞닿게 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게 된다. 드디어 369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때 고구려 고국원왕은 백제에게 참패한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전쟁이 벌어지지만 이때도 고구려는 무참히 패배하고 결국 왕까지 잃고 만다. 고구려와 백제 간에 전세가 역전된 건 광개토대왕에 이르러서였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남쪽으로 진격, 한강이북의 58개성을 함락하게 된다. (∴ 313년 낙랑군 축출 → 314년 대방군 축출 → 369년 고국원왕, 백제군에 패배 → 371년 백제군, 평양성 공격 → 고구려 고국원왕 전사 → 396년 광개토왕 한강이북 장악)
4세기는 백제가 가장 전성기였을 때입니다. 그러니 고구려에게 백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더구나 장수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국원왕까지 전사를 했으니 어쩌면 백제에 대한 원한도 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사실 장수왕은 이미 즉위 초부터 남진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평양천도입니다. 그렇다면 평양천도의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면 남진에 대한 장수왕의 의도를 엿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단행한 건 427년. 불과 즉위 15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 건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평양에는 고구려의 왕궁터가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주춧돌만으로도 건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주춧돌이 모두 3240개. 그 주춧돌로 추정해볼 수 있는 건물지는 모두 51채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는 당시 출토된 독특하고 화려한 문양의 기와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 안학궁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유물이 있다.
차순룡 강사 / 조선중앙력사박물관
"치미라고 할 때에는 샘치 자에 꼬리 미자 써서 샘의 꼬리와 같이 만들었다고 붙이는 이름입니다. 높이가 2.1m에 달하는데 용마루 맨 위에 장식기와로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왕궁이나 사찰 같은 중요건물에만 올렸던 장식기와인 치미. 그런데 그 높이가 2.1m. 동양최대의 사찰이었다는 신라 황룡사의 치미보다도 큰 크기다. 안학궁 뒤로 또 하나의 성[대성산성]이 있다. 산능선을 따라 쌓은 성이 전체 9km. 마치 1500년 세월이 빗겨간 듯 견고하게 쌓은 성은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고구려의 독특한 석축 방식이 잘 드러나 이 성을 통해, 고구려의 당시 위상을 느낄 수 있다. 남아 있는 주춧돌과 유물들을 가지고 안학궁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주춧돌이 있던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독특하고 화려한 기와를 이용해 지붕을 올린다. 무려 2.1m에 달하는 거대한 치미가 건물 맨 윗 지붕에 올려진, 당시 웅장했던 건물들의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다.
전체 38만 평방미터의 면적 위에 세워진 크고 화려한 건물 51채. 이것이 장수왕이 새로 마련한 왕궁이다. 전쟁을 대비해 안학궁 뒤엔 또 하나의 성을 쌓았다. 평소엔 안학궁에 그리고 전시엔 대성산성으로 들어가는 고구려의 독특한 평지성 산성체제를 평양에서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수도를 옮기고 왕궁을 짓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박성봉 교수 / 경북대 사학과
"사실상 당연히 구세력들이 반발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개로왕이 중국 쪽에 고구려를 응징해달라는 편지를 낸 국서속의 당시의 사정이 언급되어 있죠. 많은 귀족들이 도륙되었다고 나오는데."
백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다소 악의적으로 천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만 귀족들을 숙청하고 천도를 단행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장수왕은 왜 이렇게 평양천도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
박성봉 교수
"압록강을 넘어서면 산이 그다음 등장하는 것이 황량한 벌판인데 그런데 비해 살아나가는 조건은 단연 압록, 청천, 대동 이렇게 내려가면서 한반도 살기 좋은 조건이라는 건 상상이상으로 많은 호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그 점이 그때 당시 발견된 거 같아요."
압록강 건너 지금은 중국 땅인 집안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었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집안은 군사방어에는 효과적이나 땅이 척박해 농사를 짓기는 어려운 자연환경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고구려의 사정이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큰 산과 골짜기가 많고 들과 물이 부족하여... 좋은 밭이 없어서... 충분히 배를 채울 수가 없다.” -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편
농업환경이 좋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에 비해 평양은 기름지고 너른 평야를 가진 땅이다. 이것이 장수왕이 평양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다. 하지만 평양이 갖는 이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이 평양천도의 또 다른 이유다. 대동강은 서쪽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나간다. 즉 대동강하구는 중국으로 뻗어나가는 외교와 무역의 창구인 것이다.
윤명철 교수
"고구려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성장하려면 당시 세계 중심부였던 중국대륙과 교섭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항로의 문제가 됩니다. 국내성 출발, 압록강 하구에 내려와서 양자강 하구까지 가야 되는데 이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연근해항로는 상당히 많은 거리를 많은 시간에 거쳐서 가야하는 단계가 있고요. 두 번째 당시 국제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때 중국이 통일국가가 아니라 남북국시대였다. 그리고 이 남북극관계는 전쟁벌이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입장에서는 이 지점에서 갈 때는 반드시 북위에 의해 해상봉쇄 내지 납포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대동강에서 출항할 경우 밑으로 내려와서 황해도 끝자락 이 장산곶 일대와 산둥반도는 직선거리로 250km밖에 안됩니다. 당시 항해기술로 볼 때 빠르면 하루 내지 이틀거리밖에 안됩니다."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고구려) 사신의 왕래가 항상 있었다. 고들은 (북)위 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다.” - 남제서 고구려전
압록강보다 대동강을 통하면 좀 더 빠르고 쉽게 중국 남북조와 교류를 할 수 있다. 실제 기록을 통해 평양천도 이후 남조는 물론 적대국인 북조와도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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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 만큼 천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대동강하구를 통한 바다로의 진출은 장수왕 시기 달라진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꼭 필요했던 사업이었습니다. 장수왕이 바다 건너 송에 말 800필을 보낸 것도 시기를 따져보면 439년, 평양천도가 427년이니 그 뒤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장수왕의 남진정책엔 해상으로 진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수왕은 평양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475년 백제를 쳐 한성을 함락하고 웅진까지 위협할 정도로 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엔 장수왕의 또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그 의문을 풀기위해선 475년,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상황을 좀 더 살펴봐야 합니다.
대전까지 밀고 내려갔던 고구려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백제 수도성의 하나였던 몽촌토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475년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전쟁에서도 몽촌토성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박순발 교수 / 충남대 고고학과
"물론 일반인들은 이것은 성으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도 학계에서 본다면 이건 분명한 토성이라는 건 인식할 수 있었고 본래 광주 산맥자락에 잔구로 남아 있던 곳이었는데 산지 지형 이용해서 축성하기 때문에 부분 부분 끊어진 부분은 인위적으로 성토를 하고 산자락은 급경사를 이루도록 깎아내고 말하자면 굉장히 축조 노동력은 적게 들면서 방어력은 상당히 높은 특성을 갖고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몽촌토성도 475년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야 했다. 몽촌토성에서 버티던 개로왕이 도망간 뒤 성은 고구려 군에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이후 몽촌토성의 주인은 바뀌게 된다.
박순박 교수
"실제로 이 일대 조사하는데 여기저기서 고구려 토기가 나왔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이 일대 지역에서 당시 조사할 때 네모난 큰 구덩이라는 뜻으로 방형유구라고 그렇게 명칭을 붙인 바가 있습니다만 숲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그런 구조물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에서 고구려 토기의 전형적인 모습인... "
1980년대 6차례에 걸쳐 몽촌토성을 발굴조사 했는데, 그때 고구려 토기는 물론 고구려 온돌건물터까지 나왔다.
박순발 교수
"네귀달린 목긴항아리라고 보는 것인데 고구려 토기 전형적인 것인 게 이것이 있어서 몽촌토성에서 나온 토기들 가운데 이것이 고구려 토기라는 걸 알게 된 그런 토기입니다. 몸체의 길쭉한 정도 거기에 시간적인 변화가 보이고 또 하나는 구연부 입부분에 어느 정도 퍼지느냐 하는 그 부분도 시간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손잡이 부분이 배가 불러서 위로 길쭉한 형태는 대개 시기가 5세기 대 이후가 되겠습니다."
유물들 통해서 이곳에 고구려 군이 머문 건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한 바로 그 직후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네귀달린 목긴항아리는 일상생활용기가 아닌 제의용이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박순발 교수
"목 긴 항아리가 결국은 고구려 내에서도 일상적인 토기가 아니고 제의에 관련된 그런 용도의 토기라고 본다면 한강 유역 일대에서 결국은 몽촌토성이 가장 중심 되는 곳이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군의 지휘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즉 475년 한성을 함락한 뒤 고구려의 총 지휘부는 몽촌토성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휘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고구려 군은 남쪽으로 내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진천의 대모산성과 청원의 남성골 산성을 중간 기지로 삼으면서 대전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보면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토기는 25년에서 30년 단위로 그 형태가 바뀌는데 이곳 토기의 모양을 보면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이다.
박순발 교수
"몽촌토성에 종속했던 기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토기 형태의 변화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한세대 정도 따라서 475년부터 해서 500년을 전후한 그 시기 정도가 몽촌토성이 고구려 군이 주둔했던 가능성이 점쳐집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 고구려군은 어디로 간 걸까? 한강이북의 아차산 일대는 대표적인 남한 땅의 고구려 유적이다. 이 일대에서는 고구려 보루 20여개가 발견되었는데 97년부터 발굴조사를 시작해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 되고 있다. 지금도 아차산 보루는 고구려 유물유적의 보고다.
"한 쪽이 뾰족하고 이 안에 투공 구멍이 있어요. 자루를 넣는 구멍이 있어서 그래서 긴 창의 바닥 아래쪽 창 고달이. 깃대든 창대든 간에 땅에 박는 것 창날이 아니고 창 반대쪽..."
이곳에서 나온 철제유물이며 토기들의 연대를 추정해보면 몽촌토성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최종택 교수
"고구려거라는 건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주로 토기를 통해서 고구려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몇 세긴지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유물은 고구려 중기 말에서 후기 구체적으로 연대 말하는 6세기 전반경... 그런 시기 유물이다."
즉 아차산 보루의 토기는 6세기 초로 5세기 후반이었던 몽촌토성보다 바로 한 세대 뒤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종택 교수
"장수왕대에 한강변에 왔던 이 고구려 군이 강남에 있는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현재 발견된 유적으로는 진천, 청원, 대전까지 계속 진격을 해 내려가고 그 부대들이 백제군이 다시 세력을 키워서 다시 밀고 올라오는 상황이 되니까 한강 이북에 아차산 일대에 진을 치고 방어태세를 갖춘 것이 아닌가, 그렇게 분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중국일대와 북한지역에 세운 고구려의 석성들과는 규모가 다르다. 정타원형으로 성을 쌓았는데 그 규모가 600m 이하. 발굴 팀이 이곳을 산성과 구분지어 보루라고 이름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보루 안에는 군사들이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온돌 등이 나왔다.
최종택 교수
"여기 있는 곳은 군사용 막사입니다. 통상 이정도 규모 둘레 200m 규모, 물 저장시설 두 개 있고, 온돌방이 10개 정도 들어있는 그런 시설들인데 대략 100명 정도 군사가 주둔하던 시설입니다."
발굴결과를 토대로 아차산 보루성의 모습을 복원해 보면 이런 모습이다. 지금으로 치면 10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규모 부대로 한강유역을 지킬 수가 있었을까? 아차산 일대에선 홍련봉 2보루와 같은 유적이 모두 20여개가 발견되었다. 거대한 산성을 쌓는 것보다 짧은 기간에 적은 인원으로 지을 수 있는 보루를 여러 개 지어 효과적으로 방어를 했던 것이다.
최종택 교수
"한강 이북에 아차산 일대 보루 분포 보면 풍납토성, 몽촌토성 바로 건너편 강변에 구의동 보루 같은 보루가 작은 게 여러 개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개 군사수가 10명 정도가 되는 보루라고 추정이 됩니다. 조사결과를 보면 그래서 강변에 10명 보루들이 여기서 보이고 그 보루에서 일정거리 두고 홍련봉 1보루, 2보루가 있고, 뒤에는 아차산이 여러 개 더 있는 것이죠."
보루마다 간격은 불과 4, 500m. 보루 간에 거리가 가까워 긴급한 상황에서도 수신호나 음성신호로 연락이 가능하다. 규모는 작지만, 여러 개의 보루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하나의 큰 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아차산 보루를 거점으로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최종택 교수
"이 아차산이라는 곳이 아차산 좌우에 평지 교통로가 있는데 그곳을 관할 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구요.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남지역과 바로 대치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한강이 1차 방어선 역할을 하고, 그 북쪽에 주변 잘 조망되는 언덕이기 때문에 이곳이 고구려 입장에서는 강남 쪽과 강북 쪽 현재 서울 중심부가 되는 서쪽지역까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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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차산 보루는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입니다. 4~500m 간격으로 견고하게 쌓은 보루를 통해 한강유역을 지키려는 고구려 장수왕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한강유역을 지키려고 애썼던 건지 의문이 생기는데요. 우선 경제적인 이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한강하구에 자리한 김포평야는 중요한 농업생산지입니다. 즉 평양처럼 한강유역은 경제적으로 이점이 많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삼국 역사상 한강은 특별한 곳입니다. 삼국의 최전성기와 한강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4세기 백제, 5세기 고구려 그리고 6세기엔 신라가 전성기였는데 그때가 바로 한강을 차지했던 때입니다. 그렇다면 장수왕에게 한강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일까요?
한강은 대동강과 마찬가지로 서해로 나가는 창구다.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섬 아닌 섬이 된 백제와 신라가 중국과 교류하는데 한강은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렇다면 고구려에게 한강은 어떤 의미인가? 우선 백제와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4세기 전성기를 누렸던 백제는 한강하구를 통해 요서, 일본까지 뻗어나가 활발한 교류를 했다. 백제의 교역망은 차단되고 만다. 실제 484년 중국 남조로 향하던 백제 사신이 고구려 수군에게 저지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명철 교수
"바로 이 지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백제가 국제관계속에서 능동적으로 진입할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길 뺏긴 건 백제가 항로를 봉쇄당해서 결국은 중국의 북조정권과 교섭할 수 없고 초기 단계 같은 경우는 남조 교섭하는데도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웅진으로 내려간 백제가 서해로 나갈 수 있는 창구는 금강하구. 하지만 남조로 가려면 당시 항로상 금강에서 서해 한가운데로 나가야 하는데 경기만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수군의 감시망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즉 장수왕은 한강하구를 통해 한반도내에서 패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윤명철 교수
"경기만을 장악해야지 고구려가 아주 쉽게 북조와 남조 간에 외교할 수 있고, 또 한 가지 백제, 가야, 신라가 북조정권과 교섭하는 것을 중간에서 차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기만 일대 출항하게 되면 북위에 봉쇄 피하면서 충분히 남쪽 지역까지 갈수 있어 이런 항로 확보 때문에 장수왕 때는 23회에 달하는 송과의 교섭이 있었고요. 그 이후에도 남제가 들어섰을 때 평양과 남제 교섭은 활발했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대동강하구보다 한강하구가 남조와 교류하는데 훨씬 용이하다. 거리도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북위의 간섭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수왕 시기 고구려는 바다로 중국남북조와 교류를 하고 대륙을 통해서는 거란 물길 등을 통제한다. 그리고 멀리 왜까지도 관계를 맺는다.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장수왕대에 와서 왜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건 일본서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상권을 장악하려면 선박기술과 항해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 시기 어떤 배로 바다를 항해했을까. 고대 선박 전문가를 만나 당시 배를 추정해 보기로 했다.
인터뷰) 고선박전문가
"기록에는 없습니다. 강에는 배가 있고 여기 화물선은 대동강으로 평안도 해안으로 다니는 바닷 배의 전형적인 그림인 것 같습니다."
현재 실물배중 가장 시대가 앞선 것이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시대 배다. 그런데 이 배는 그림속의 조선시대 배와 그 모습이 유사하다.
인터뷰) 고선박전문가
"고대는 급진적으로 발전된 게 아니고, 서서히 100년, 200년, 300년 조금씩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1900년 것을 가지고, 1200년 것을, 1200년대 것을 가지고, 그러한 500년대 의 선박을 복원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동력선이 등장하기 전의 돛단배가 몇 백 년의 시차에도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완도 앞 바다에서 인양된 배의 모양을 보면 전통한선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평평하다는 것이다.
인터뷰) 고선박전문가
"우리 배 평저선이면서 연안선이라고 합니다. 연안선이란 바닷가를 다니는 배를 말합니다. 왜 평평하게 했느냐 우리 지형지물을 적응하기 위해서는 대개 남서해안은 평평한 갯벌, 조수 간만의 차가 많이 있고 우리 지형은 대개 리아스식 침강해안이라고 해서 점차적으로 바다로 내려가면서 깊어지는 이런 형상이어서 그런 지형에는 평저선이 가장 적합한 것입니다."
전통한선과 평양식 배의 특징을 바탕으로 먼 바다로 나가던 고구려시대 배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한 달 여 만에 설계도가 완성됐다. 설계도를 근거로 배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해 봤다. 먼저 바닥을 평평하게 하고 삼판을 차례로 올린 후 가로대로 맞물리게 해서 갑판을 덮는다. 그리고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도록 2개의 돛을 단다. 그런데 평저선은 먼 바다를 나갈 때 파도에 약하고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전문가에 따르면 고구려 배에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인터뷰) 고선박전문가
"고구려 배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물(배의 앞부분) 날씬하게 이물 각도를 30도 정도로 해서 파도 헤치고 나가는데 유리하게 했고, 길이하고 폭의 비율을 4:1로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서남해안의 3:1보다 좁게 그러면서 속도가 더 빨리 나가게 할 수 있게 했고, 높은 파도에서도 능히 항해해서 갈 수 있는 구조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선박제작기술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바다를 통한 무역도 활발히 했다. 송에 말 800필을 보낸 것도 정치외교와 무역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위한 것이었다. 특히 말은 실위에서 수입해 송으로 또 다시 보내는, 일종의 중계무역을 하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물류중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렇게 들어온 다양한 문물은 한강을 통해 내륙으로 전해진다. 한강하구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춘천, 충주 등 중부 내륙 깊숙이 닿을 수 있다. 당시 이런 물길은 경제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윤명철 교수
"이 경기만 지역을 장악하고 한성을 점령함으로 인해서 고구려는 즉 다시 말해서 한반도 중부 이북에 모든 해상권 장악권과 육상에 관한 권한을 장악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구도가 되냐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육지를 장악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 지중해의 물류 허브역할을 한 셈이죠."
장수왕대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유적 유물들이 최전성기의 고구려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강력한 왕권에 경제적인 발판이 있어야만 축조가 가능한 것이 대형고분이다. 그리고 장수왕 집권기인 5세기 때 유난히 많이 그려진 벽화는 당시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했음을 의미한다. 기록을 통해서도 이 시기 고구려가 풍요로운 시대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구의 증가는 바로 안정과 풍요를 의미한다.
윤명철 교수
"장수왕도 기본적으로 정복군주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사 활동을 매우 활발히 했고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정치가였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를 단순하게 고구려 국내정치로 보는 게 아니라 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관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동아시아 전체에서 고구려를 봤습니다. 그래서 그 세계 속에서 고구려를 중심에 놓기 위한 다양한 전략과 정책을 구사한 대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강하구를 통해 서해해상권을 장악했던 장수왕. 5세기 장수왕이 꿈꿨던 고구려는 외교와 무역을 통한 동아시아의 중심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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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 사서인 위서와 삼국사기에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장수왕이 숨을 거두었을 때 이야기인데요.
“위나라 황제가 이 소식, 즉 장수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을 쓰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고 애도의식을 거행했다.”
중국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위나라 황제가 고구려왕에 대해 극진한 예를 표했다는 건데, 이건 당시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국제적인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기록입니다. 오늘은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외교정책을 통해 1500년 전 장수왕의 생각을 읽어봤습니다. 정복군주로 불리는 광개토대왕이 대륙을 통해 동북아로 나아갔다면, 장수왕은 일찍이 해상의 중요성을 인식해, 대륙은 물론 바다로도 뻗어나가 동아시아 중심국가로 우뚝 서고자 했습니다. 남진은 바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장수왕의 승부수였던 것입니다. 장수왕은 바뀐 국제정세를 읽고 거기에 맞춰 국가적인 목표를 세울 줄 알았던 뛰어난 외교가요 전략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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