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심광주)
심광주, 2000,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
제2기 박물관 대학 강의교재 - 한민족의 예술과 문화 -, 토지박물관.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
심광주(토지박물관 학예실장)
Ⅰ. 한강이북지역 고구려유적의 분포와 특징
지금까지 남한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이 關防遺蹟1)이다. 토기나 기와를 제작하던 생산시설이나, 집단 취락지 또는 고분 유적 등이 발견될 개연성은 있지만 아직 명확히 확인된 바 없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을 검토함에 있어서도 이미 조사된 관방유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2)
한강 이북지역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고구려성은 대략 38개소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한강이북지역의 관방유적이 120여 개 정도임을 감안할 때, 약 30%에 달할 정도로 숫적인 면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유적은 크게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과, 천보산맥과 불곡산을 중심으로 한 양주일대, 그리고 임진강 유역 이 그것이다.
한강유역에서 발굴된 최초의 고구려유적은 구의동보루이다. 1977․1978년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해발 53m의 구릉 정상부에서 처음으로 고구려 보루가 발굴된 이후3), 1987년 몽촌토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성내에서 백제토기와 함께 다량의 고구려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4) 그후,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주관하여 아차산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정립회관 고구려보루, 홍련봉1․2보루, 아차산 1․2․3․4보루, 용마산 1․2․3․4 보루, 봉화산보루 등 12개소의 고구려유적이 조사되었다.5) 이후 계속된 조사에 의하여 아차산 시루봉보루와 망우리1․2․3․4보루 및 불암산보루, 수락산보루 등의 고구려유적이 추가로 조사되었다.6) 따라서 지금까지 한강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은 20개소에 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조사된 유적 중 이미 없어진 백련봉보루 및 워커힐호텔 건축으로 없어진 보루 등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양주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조사된 것은 1998년이다. 토지박물관에서 양주군 일대에 대한 광역지표조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28개의 관방유적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중 고구려유적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유적은 도락산2․3보루, 천보산1․2보루, 독바위보루, 불곡산2․5보루 등 7개소 정도이다. 양주일대의 유적 또한 지표상태로 확인했기 때문에 발굴조사 등을 실시하게 되면 더 많은 유적이 찾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임진강 유역에서 고구려보루가 처음으로 보고된 것은 199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의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였다.7) 이 조사에서는 신답리 석실분 3기 외에 무등리1보루와 호로고루 유적이 고구려 유적으로 조사되었다. 이후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 하여 발간한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8)에서는 덕진산성과 당포성, 아미성 등이 고구려 유적일 가능성이 있음을 피력하였으며, 1995년에 발간된 연천군 『향토자료집』9)에는 무등리1보루, 아미성, 당포성, 호로고루, 두루봉 보루 등이 고구려유적일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1995년에 간행된 『경기도 연천군 군사유적-지표조사보고서』에서는 국사봉보루를 추가하였다. 따라서 임진강일대에는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을 모두 포함하면, 이번 조사에서 새로 확인된 무등리2보루 유적을 포함해 10개의 고구려 관방유적이 조사된 셈이다
이들 고구려 관방유적에 대한 개략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유적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군사작전에 있어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원칙은 적의 움직임을 쉽게 관측할 수 있고, 공격과 방어에 유리한 전략적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구려유적은 지형적으로 높지는 않더라도 남쪽을 향하여 넓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축조되었다.
고구려 유적의 이러한 공격과 방어의 방향성은 백제나 신라와는 반대방향이 됨으로서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는 백제나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시계확보가 어렵고 배수진을 치게된다. 따라서 고구려유적은 양방향 모두 전략적으로 양호한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신라나 백제 유적에 비해 훼손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차산 일대의 일부 유적이나, 도락산, 천보산보루 등은 고구려 이후에는 군사용으로 사용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두 번째는 고구려 유적들은 面이 아니라 線으로 분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넓은 영역의 통치와 방어를 위한 面으로서의 관방체계가 아니라 전략적 거점을 중심으로 한 線으로서의 진출입로의 확보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한강유역의 아차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보루들을 보면 요로를 따라 500-1,000m 거리에 하나씩 20여 개가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양주일대에서도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임진강 일대에서는 이 線이 남-북의 종방향이 아니라, 동-서로 긴 횡방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위치가 대부분, 임진강을 도하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임진강 일대 역시 기본적인 성곽배치체계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유적의 분포위치를 통해 볼 때 고구려의 주력군대의 이동루트는 개성방면에서 장단을 거쳐 호로고루가 있는 호로하나 칠중성이 있는 칠중하를 건너 협곡이 있는 감악산 서로인 323번 지방도 보다는, 감악산 동로인 368번 지방도 쪽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감악산 동로를 지나서는 3번국도를 따라 내려와 의정부․상계동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고 있음을 추론 할 수 있다. 장단-파주-고양루트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고구려의 주력인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바로 도하하기 위하여 장단에서 고랑포 쪽으로 우회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임진강을 도하한 고구려군은 다시 습지나 하천이 가로막고 도로가 불편한 파주지역으로 우회할 필요 없이 추가령지구대를 따라 일찍부터 도로가 발달한 3번 국도로 내려오는 것이 가장 용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 성의 규모와 형태적인 특징이다. 현재 한강 이북지역에서 발견되는 40여 개의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둘레 400m를 넘지 않는 소규모의 보루들이다. 그중 100m 내외의 것들이 가장 많으며, 비교적 큰 규모가 200-300m 이며, 400m 가 넘는 것은 아차산에 있는 몇 개의 보루와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 성 정도이다. 따라서 성이라고 하기보다는 보루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성들이 위치하는 해발고도는 도락산 2․3보루의 경우 400m 가 넘지만 比高는 300m를 넘지 않으며, 다른 보루들도 200-300m 인 경우가 많으며, 100m 내외인 경우도 있다.
요동지역과 집안일대, 그리고 평양과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는 고구려 산성들이 대체로 수 km에서 10km가 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남한지역에 축조되는 고구려의 성들이 높지 않은 곳에 작은 규모로 축조된다고 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고구려의 보루들이 이처럼 소규모인 이유는 보루가 배치되는 상황과도 부합된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점령한 지역에 대한 정치․경제적인 통솔권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군사작전을 펼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규모가 클 경우 축성하는 데에도 많은 인력과 경제적인 소모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데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마병을 위주로 한 소규모의 인력으로 장기간 안정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처럼 보루 위주의 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강 이남지역에서도 고구려의 유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대규모의 산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해발 100-200m 내외의 구릉지에 위치하는 보루를 중심으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10)
또한 고구려 보루들의 구조적인 특징을 보면 대체로 구릉의 정상부를 삭평하고, 돌아가며, 머리띠를 두르듯이 석축을 하였다. 석축의 높이는 1-2m 이지만, 신라의 보루처럼 많은 성돌을 사용하지 않고, 매우 경제적으로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내의 구조물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집수시설이다. 구의동이나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형태는 방형이며, 1개 혹은 2개의 집수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수혈형태의 건물 내부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에서는 건물의 벽체시설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짚을 섞은 燒土덩어리 들이 발견되는 것도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Ⅱ.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
1. 호로고루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9번지
?위치 및 현상
瓠蘆古壘는 임진강 북쪽의 현무암 垂直斷崖 위에 있는 삼각형의 江岸平地城이다. 파주나 연천방면에서 37번국도를 타거나, 의정부방면에서 3번국도와 323번 지방도를 타고 적성에 도착하여 시가지 중간쯤에 북쪽으로 시장을 관통하여 난 길을 따라가면 두지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틸교를 지나 약 2km 정도 직진하면 첫 번째 사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가면 장남면사무소이고, 직진하면 322번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 좌측의 포장된 농로를 따라가면 멀리 벌판 위에 얕으막한 구릉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이 호로고루이다. 호로고루는 임진강 북안의 넓은 벌판 위에 우뚝 솟아있어 마을 주민들은 ‘財尾山’, 또는 ‘財尾城’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분의 성벽이 훼손되어 성벽 단면이 노출되어 있고, 성내부는 1m 정도가 삭토된 상태이며, 버섯재배사가 들어서 있다.
호로고루가 있는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三國史記?에 보면 이 성이 접하고 있는 부근의 臨津江의 명칭은 ?川․瓠瀘河 또는 瓢河로 불리었으며,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 사이의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전쟁기록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임진강 하류방면에서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으로서 육로를 통해 개성지역에서 서울지역으로 가는 최단거리 해당하기 때문이다. 임진강은 호로고루 동쪽의 두지나루에서부터 크게 곡류하면서 이곳에 이르면 강심이 얕은 여울목을 이루는데,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며, 이곳에서부터 임진강하류쪽으로는 강폭이 넓고 강심이 깊어진다. 따라서 이 여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호로고루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임진강은 오랜 기간 동안 백제와 고구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으로 기능을 하였으며, 현무암대지를 따라 형성된 10m를 넘는 단애는 공격의 장애물이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임진강을 따라가며, 석벽이 없는 지점이나 이처럼 도강이 편리한 여울목 지점은 공격의 루트이자, 또한 전력을 기울여서 사수해야할 방어의 대상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을 瓠蘆灘 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을 통과하여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우회하여 도하한 지점이기도 하다.
호로고루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최초의 지지자료는 조선 현종11연(1670)에 편찬된 ?東國輿地志?이다. 동국여지지에는 ?호로고루는 부의 동쪽 32리 호로탄 위에 있다. 그 동쪽은 적성현과의 경계이며 두 개의 루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석벽으로 인하여 견고하다. 전하기를 삼국시대의 屯戍處라고 한다.?고 하였으며, 이후의 기록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哲宗 재위년인 1849~1864년에 편찬된?輿圖備誌?에서는 ?호로고루는 부의 치소로부터 동쪽을 32리 지점인 적성과 경계를 이루며 적성의 유계성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서벽을로 인하여 견고하다. ?삼국사기?의 瓢瀘河는 즉 이것이다.? 하고 있다.한편 同書의 戰略 條에서는?신라 문무왕13년(673) 왕이 대아찬 徹川 등을 보내어 병선 100척으로 북변을 침범한 당․말갈․거란병과 아홉번을 싸웠는데 우리군대(신라)가 이겨 2,000여급을 참하고, 당병은 瓢瀘(匏瀘灘), 王逢(고양 행주산성부근) 두강에 빠져 죽은자가 수를 셀 수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大東地志?와 ?增補文獻備考?의 내용은 비슷하다. 한편?京畿邑誌?長湍縣 古蹟 條에서는, “…삼국시대의 고루이며 당의 劉仁軌가 병사들을 인솔하여 蘆河를 끊고 신라의 七重城을 공격한 것이 바로 이 성이다.”고 하였다. 호로고루는 1998년 토지박물관에 의한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성의 구조와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
호로고루의 전체 둘레는 대략 401m 정도이다. 그중 남벽은 161.9m 이고 북벽은 146m 이며, 동벽은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이 89.3m 이고 진입로 부분을 포함하면, 93,1m 에 달한다. 성내부의 전체규모는 2천평 정도이지만 성벽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과 외곽의 일부를 제외하면 사용가능한 면적은 약 1,600평 정도이다.
성 내부는 전체적으로 해발 22m 정도이며,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부분만 남-북을 가로막는 지상구조물을 쌓아 성벽을 조성하였고 나머지 두벽은 암벽의 윗부분에서 현재의 지표에 이른 높이 4-5m 정도만 돌아가면서 편축식으로 쌓았다.
동벽은 삼각형 모양의 돌출부위를 틀어막아 성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부분으로서 유일한 지상구조물이기도 하다. 동벽은 지표에서의 높이가 10m 이고, 하단부 폭은 약 40m에 달하며, 길이가 90m 정도여서 마을 주민들이 성이 아니고 ‘재미산’이라고 부를 정도의 거대한 인공구조물이다. 동벽을 구축하는데 소요된 토사와 흙의 규모만 해도 대략 15,996㎥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성벽의 정상부에는 장대가 있었던 약 10×5m 정도의 평탄지가 있었으나 한국전쟁당시 인민군 포대가 설치되면서 상당부분 훼손된 상태이며, 성벽 정상부 동사면에는 남-북으로 길게 성벽을 따라가면서 폭1m 깊이 2m 정도의 참호가 파여 있다. 또한 장대 동쪽부분은 성벽이 일부 무너진 상태이다.
동쪽성벽의 남쪽 단면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으나 성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상다부분 잘라버려 현재는 성의 전체 횡단면이 노출되어 있다. 성벽은 1m 정도 높이의 점토판축층 위에 중간부분은 사질판축을 하고 판축부의 좌우에 대칭을 이루도록 석축을 덧붙여 쌓고 외벽쪽은 보축을 하였다. 중간의 사질판축부는 상단의 폭이 360cm 이고 하단은 460cm 이며, 판축부에서 석축부분은 동쪽부분이 640cm, 서쪽부분이 740m 이고, 성벽 기저부의 폭은 32m, 단면부의 높이는 6m 정도이다.
남벽은 임진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석벽을 활용하여 성벽을 구축하였다. 동벽이 설치된 곳부터 삼각형 성의 꼭지점에 해당되는 지점까지는 161.4m 에 달하여 세 성벽중 가장 길이가 길다. 이곳은 현무암의 柱狀節理 현상에 의하여 형성된 11-13m 높이의 단애가 형성되어 있으며, 암반층위에서부터 지상에 이르기까지 4-5m 두께의 점토퇴적층을 돌아가면서 편축방식으로 석축성벽을 축조하였다. 부분적으로 면석이 노출되어 있는 부분을 보면 현무암반의 표면을 다듬고 40×15cm, 55×13cm, 38×22cm 정도 크기의 표면이 장방형으로 다듬어진 현무암을 기단석으로 놓고 높이 1m 정도까지는 약 80°정도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성돌은 폭이나 두께에 비해 안으로 물리는 길이부분을 길게하여 면석이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였으며, 아래단에서 윗단으로 올라가면서 약 5cm 정도의 퇴물림 쌓기를 하였다. 성돌은 1/3-1/2 정도 서로 물리도록 하여 바닥에서 5단부터 14단까지는 화강편마암 계통의 길쭉하고 폭이 좁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크기는 80×10cm, 35×10cm, 23×9cm, 50×11cm, 50×13cm, 50×10cm 이고 길이는 30-32cm 정도이다.
북벽은 남벽처럼 절벽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평균 약 40°정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절반 정도는 60°이상의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북벽은 성의 북벽을 따라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개울이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토사에 덮여 있으나 노출된 부분을 보면 면석은 확인되지 않지만 30-40cm 정도의 돌들이 성벽 내부에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내로 출입하는 시설은 현재 진입로로 이용되고 있는 동벽의 남쪽부분에 유일한 성문이 있었을 것이며, 단애를 이루고 있는 서쪽의 모서리 부분에는 강변으로 내려가는 줄사다리 등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으나 높이 1m 내외의 단이 2개가 조성되면서 3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동쪽부분이 서쪽보다 2m 정도 높기 때문에 동벽 중앙부에서부터 서쪽으로 80m 지점에 높이 1m 정도의 단이 하나 조성되어 있으며, 동벽 중앙에서 110m 지점에 높이 70cm 정도의 단이 또 하나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성내에서 가장 훼손이 심한 지역은 당초 가장 레벨이 높았던 구역을 이곳은 거의 1m 이상 삭토되어 성 외곽과 서쪽부으로 옮겨진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 자갈이 깔려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의 중간부는 상당부분 생토면이 노출되어 있으며, 두 번째 구역이나 세 번째 구역의 지하에는 유구가 아직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성내부는 전체적으로 삭평되어 건물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성의 외곽부분에 초석으로 보이는 방형의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성내에 많은 양의 와편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상당수의 고구려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고구려와편이 주로 발견되고 있느 곳은 현재 버섯재배사가 있는 동벽 기저부 부분과 성의 중간 서쪽부분이다. 성내의 중간부분은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의 와편들이 특히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건물들이 훼손되고 난 이후 성의 중간부에 주로 후대의 건물들이 들어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시굴조사과정에서 지표하 2.4m 지점에서 뻘층이 노출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저수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성내에서는 축사건립을 위하여 성내부를 1m 정도 삭토하는 과정에서 노출된 많은 양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그중 대부분의 유물은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종류의 기와편으로 성의 중앙부에서는 신라-고려시대의 와편들이 주로 발견되고 있는 반면, 성의 동북쪽과 서쪽하단부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와편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한편, 성의 판축부에서는 하단부에 적갈색 연질의 원삼국시대 토기편들이 약간 발견되고 있으며, 중간부분에는 고구려토기편, 윗부분의 후대에 개축된 부분에는 통일기의 신라와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와편들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니질의 태토로 산화소성된 적갈색 기와로서, 수키와의 경우 표면문양이 없으며, 암키와는 繩文과 鋸齒文, 格子文, 橫線文등이며, 암키와의 내면에는 모골와통의 사용에 의한 1.9-2.1cm 폭의 모골흔이 찍혀 있다. 측면은 와도로 2-3번 정면하였으며, 모서리부분은 귀를 접은 것이 특징이다.
호로고루의 정확한 축성시기에 대해서는 현단계로서는 알 수 없지만 성벽의 판축토 내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고려할 때 대략 4세기 말경에 토루나 목책 등의 초보적인 형태의 방어시설이 구축되었다가 국경이 남쪽으로 확장되어 임진강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지배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가 이지역을 상실하게 되는 시점은 대략 고구려의 멸망시점임을 고려하면 4세기말부터 7세기 후반까지 대략 250년 정도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내에서 발견되는 많은 양의 고구려와편으로 볼 때 호로고루는 규모는 비록 작지만 행정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호로고루는 현재 남한지역에 산재하는 40여개소의 고구려 유적 중에서도 고구려와편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삼국시대의 역사를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호로고루는 임진강일대에서만 발견되는 강안평지성으로서 판축토위에 석축을 덧붙여 쌓고 보축한 형태의 석축방법은 축성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으로 판단된다.
2. 고성산보루
?소재지 :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산12번지
?위치 및 현상
고성산 보루는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산 12번지와 왕징면 북삼리 산196번지의 경계지점인 해발 150m의 고성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전곡에서 324번 지방도를 타고와 화이트교를 건너면 삼거리가 나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우측의 8번 郡道를 따라 오면 무등리 1,2보루가 있는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을 지나 다시 2km 정도 가다보면 우측으로 갈라지는 소로가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 산의 허리에 이르면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며 내리막길이 된다. 여기서 북동쪽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쉽게 유적에 도착할 수가 있다.
이 유적은 조선시대의 지지자료를 포함해 일제시대 조사보고서에도 전혀 보고되지 않았던 새로운 유적으로, 1995년 연천 ?鄕土史料集?에 처음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후 육사박물관에서 실시한 연천군 관내의 군사유적 지표조사시에도 에서도 조사가 되었으며 보고자는 이 유적을 고려시대 이전의 봉수대로 추정하였다.
현재 산 정상부에는 원형의 석축시설이 있고 내부바닥은 4각형에 가깝게 함몰부가 형성되어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조롱박의 자루같은 좁은 통로가 개설되어 있다. 함몰부의 직경은 동서 5.4m, 남북4.4m 이며, 함물부의 깊이는 180cm 정도이다. 석축부는 25-40cm 정도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5-6단 정도 축조하였으나 석축 기법이 정연하지 못하며 함몰부 안에는 불에 그을린 석재들이 일부 남아 있다. 조롱박 같이 생긴 통로는 동서 2.4m, 남북1.4m 정도이며, 깊이는 지표에서 20-60cm 정도로 일정치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동서 장축은 7.8m 이고, 남북 단축은 5.4m 정도이며 전체둘레는 약 30m 내외이고, 사면은 30°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능선 사면과 하단부로 돌아가고 있는 참호시설의 단면에도 석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 이보다 약 10m 거리의 하단에는 폭 3.8m, 높이 1.2m 가량의 역시 중앙부가 함몰된 원형석축 유구가 있는데 중앙에 120×130×60cm 규모로 크기 30cm 가량의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방형유구가 있다.
원형 함몰부의 바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몇점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토기편은 황갈색의 연질토기로 기형은 호형토기였을 것으로 보이며, 표면에는 횡방향은 길이 0.4cm정도의 짧은 선이 0.3cm 간격으로 비스듬하게 연이어 찍혀 있는데 손톱으로 얕게 눌러 문양을 낸 듯하다. 태토는 정선된 점토에 운모와 석영립이 다량 혼입되어 있다. 전체적인 특징을 고려할 때 고구려토기로 추정된다.
육군박물관 조사보고서에서는 이 유적을 포함한 연천군 관내의 유사한 유적들을 봉수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유구의 현황이나 유구 내부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목탄을 고려할 때 한국전쟁이나 그 전․후에 구축된 군사시설물이라고 생각되며, 현존하는 이 군사시설물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유구가 상당부분 훼손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적인 봉수의 구조는 대체로 지상에 5거 또는 3거의 봉화를 올릴 수 있는 봉대를 구축하였으며 봉대의 구조는 지상에 돌로 구조물을 쌓아서 구축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봉수로의 경우 직봉이나 간봉 모두 연천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라고 하더라도 개경을 중심으로 한 봉수망이 연결되었을 것을 고려한다면, 이곳에 봉수를 설치할 이유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석축함몰부가 고려시대나 그 이전 시기의 유적이라고 한다면 현존하는 형태로 함몰부위가 남아있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부분 무너지거나 토사에 의한 퇴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울러 함몰부 내에서 고구려토기편이 몇점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유적이 한강변의 구의동유적 처럼 구릉의 정상부를 석축으로 둘러쌓아 만든 소규모의 고구려의 보루로써 무등리1,2보루와 함께 임진강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이 유적은 군사시설물에 의하여 중심부의 상당부분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현재 유구의 아래와 주변에 고구려의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3. 무등리1보루
?소재지 :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산44번지
?위치 및 현상
무등리 1보루는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산44번지 일대의 속칭 “장대봉”에 있다. 전곡에서 322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화이트교를 건너면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8번 郡道를 따라 500m 정도 가면 동쪽으로 해발 100m 내외의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가 장대봉이다. 보루는 이 장대봉의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지금까지 무등리 보루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지지자료나 일제시대의 조사보고서에 전혀 기록이 없었으며, 1991년 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실시된 군사보호구역 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조사보고되었다. 이후 연천 ?鄕土史料集?과 1995년 육군박물관에 의한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군사유적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다시 조사․정리되었다.
무등리1보루의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향에서 20°정도 편서하고 있다. 남북 지름이 69m 이고 동서 지름이 34.5m 이며 전체 둘레는 168.4m 정도인 소규모의 보루이다. 이곳은 임진강에 접해 있어 임진강 건너편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서 성내부의 움직임이 강 건너편에서도 관측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성 정상부에는 산불감시 초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성벽 외곽에는 성벽을 따라가며 군용 참호가 폭 2m에 깊이 1m 이상 깊게 파여 있다. 문지는 성에는 현재 남쪽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비록 규모는 작지만 성내부에서는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95년경 파평윤씨의 묘역을 새롭게 조성하는 과정에서 성 내부의 유구가 상당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성내에는 온통 붉은색의 고구려와편으로 덮일 정도 였다.
성의 동벽과 북벽은 군사용 참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또한 상당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노출된 모습을 보면 30-40cm 정도의 할석으로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500m 거리에는 무등리2보루가 있으며, 상호 수신호가 가능할 정도로 잘 잘 조망된다.
무등리1보루에서는 의외로 많은 양의 와편이 출토되었다. 와편은 1997년경 보루 내부에 묘역이 중장비로 묘역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노출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와편은 전형적인 고구려 와편으로서 대부분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표면에는 올이 선명한 승문이 찍혀 있다. 측단면은 몇차의 정면을 통하여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모서리 부분에는 역시 귀접이를 하였다. 내면에는 포흔이 남아 있고, 2cm 내외의 모골흔이 찍혀 있다. 약간의 와편에는 당포성과 아미성에서 출토된 와처럼 내면에 횡방향으로 승문이 찍혀 있으며, 수키와는 성형과정에서 찍힌 문양을 인위적으로 마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토기편은 와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이 적은데 역시 니질태토에 적갈색이나 흑회색의 연질토기로 표면은 마연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토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무등리 1․2보루가 있는 지역은 임진강이 남-북으로 직류하는 곳으로 이곳에는 군남면 진상리와 왕징면 무등리 사이를 연결하는 나루터가 楡淵津이 있었으며, 지금은 322번 지방도상에 화이트교가 가설되어 있다. 유연진에 대해 ?新增東國輿地勝覽?마전현 진도조에는 동쪽으로 7리에 있으며 연천과 통한다고 하였으며 ?大東地志?에서도 역시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무등리 보루는 바로 이 나루터를 지키기 위하여 구축된 성으로 생각된다. 임진강을 북안을 따라가며 구축된 다른 고구려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보루 역시 대략 4세기 말경부터 7세기 중엽까지 약 250여년 동안 고구려의 국경을 방어하는 주요한 성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등리 1보루는 고구려산성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지만 최근 성내에 묘역이 조성되면서 성내부 유구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4. 무등리2보루
?소재지 :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산29-1
?위치 및 현상
무등리2보루는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산29-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무등리1보루성이 있는 장대봉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어 해발 124m 봉우리까지 연결되는 능선으로서 유적이 있는 곳은 해발100m 내외이며 임진강에 바로 접하여 있다. 무등리1보루에서 북동쪽으로 내려가면 현재 경작되고 있는 밭이 있으며 이 밭은 최근 설치된 이동통신 기지국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능선으로 연결된다. 이 능선에서 북동쪽 건너편을 바라보면 구릉상에 돌출된 지점이 보이는데 그곳이 무등리2보루이다.
현재 외형적으로 볼 때 성벽이 토사에 묻혀 있어 堡壘라는 사실에 대하여 의문을 표할 수도 있으나 흙으로 덮인 성벽 부분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높이가 약5-6m 정도에 달하며, 비로 인하여 일부 노출된 단면에는 강돌과 할석으로 구축된 석축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가운데가 꼬부라진 반월형으로서 장축방향은 북동-남서향이다. 현재 성의 둘레는 244m 정도이며 문지는 계곡부를 감싸고 돌아가는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의 남쪽과 동쪽은 거의 수직단애에 가깝게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부분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편이다. 이곳에서는 동편으로 임진강 건너편의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과 도로가 조망되며, 무등리1보루와는 수신호도 가능할 정도이다.
성내에서 주로 유물이 발견되는 곳은 북동쪽의 허리부분으로 현재 경작되고 있는 밭고랑 사이에서 상당량의 고구려토기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성의 북동쪽 부분은 강에 접한 단애가 형성되어 있으며, 호우로 인하여 잘려나간 단면 중 두곳에서 다량의 탄화된 곡물이 발견되었다. 탄화곡물이 발견된 지점은 지표하 약 1m 지점이며, 탄화곡물이 포함된 층은 두께 1.2m 정도에 폭 10m 정도여서, 대규모의 군량미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탄화곡물과 함께 발견된 토기편이나 소토덩어리 등으로 미루어 이 유적은 고구려의 보루가 분명하다고 판단되며, 벽체시설의 일부라고 판단되는 소토덩어리들의 존재로 보아 상당수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서는 많은 양의 고구려토기편과 약간의 와편, 그리고 鐵鏃이 발견되었다. 토기편은 홍갈색이나 황갈색의 연질토기로서 태토는 泥質점토이고 표면은 마연하였다. 기형은 대부분 항아리 형태이며, 외반된 구연의 끝부분은 뒤로 말아 둥글게 처리하였고 대상파수가 부착되어 있다. 와편은 적갈색 연질의 승문와편이 몇점 출토되었다. 모두 작은 편이라서 특징을 알기 어렵다. 그외에 철촉이 한점 있다. 전체 길이는 21cm 이고 촉신부의 길이는 15.5cm 경부의 길이는 5.5cm 촉신부의 단면은 한변의 길이가 1.2cm인 정삼각형이며 무게는 75g에 달한다. 철촉은 현재 끝부분이 약간 결실되기는 했지만 거의 완형에 가까우며 부식도 심하지 않은 편이다. 이 철촉은 치명적인 살상력을 가지지만 무게로 볼 때 일반적인 활로 쏘는 것은 무리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아마도 천보룰 날릴 수 있는 고구려의 우수한 무기인 쇠뇌의 화살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의 북동부 단면에서는 탄화된 곡식과 함께 燒土 덩어리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점토에 짚 같은 것을 섞어서 바른 것이 불에 구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벽체나 바닥시설의 일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탄화곡물은 분석결과 쌀과 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쌀은 대부분 japonica로서 여러 가지 품종을 잡다한 상태로 가공하여 현미와 정미가 섞여 있으며, 좁쌀은 뉘가 약간 보일 정도로 잘 정백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고구려 병사들이 군량미로서 쌀과 좁쌀을 주로 이용하였으며, 장기간 보존을 위한 도정방법 등도 별도로 고려하였음을 알수 있다.
무등리 1․2보루가 있는 지역은 임진강이 남-북으로 직류하는 곳으로 이곳에는 군남면 진상리와 왕징면 무등리 사이를 연결하는 나루터인 楡淵津이 있었으며, 지금은 322번 지방도상에 화이트교가 가설되어 있다. 유연진에 대해 ?新增東國輿地勝覽?마전현 진도조에는 동쪽으로 7리에 있으며 연천과 통한다고 하였으며 ?大東地志?에서도 역시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무등리 보루는 바로 이 나루터를 지키기 위하여 구축된 성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 무등리2보루는 현재 성벽의 구조물은 잘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성의 북동쪽에서 노출된 단애면에서 대량의 탄화곡물이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이곳에는 군량미를 비축해 놓은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탄화곡물에 대한 절대연대 측정결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경우 1462±48BP(AD440-536)에 보정연대는 AD534-685년으로 분석되었다. 결과적으로 임진강의 북쪽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4세기 말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은대리성
?소재지 : 전곡읍 은대리 산80
?위치 및 현상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서 용암대지의 하천 침식작용으로 인하여 생긴 삼각형의 대지위에 형성된 江岸平地城이다. 적성방면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오다가 대교를 건너면 오른쪽에는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온다. 이 도로는 전곡시내를 통하지 않고 322번 지방도가 연결되는 도로인데, 이 도로를 따라 1km 정도 가면 좌측으로 신축한 연천보건소가 보인다. 보건소를 끼고 100m 정도 들어가면 은대리성에 도착하게 된다. 은대리성은 현재 동쪽과 북쪽성벽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상태이지만 성 내부의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은대리성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자료는 확인되지 않으며, 일제시대의 조사보고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 성의 존재를 최초로 보고한 것은 1995년 9월 연천군에서 발간한 ?鄕土史料集?이다. 이후 육군박물관에서 발간한 ?京畿道 漣川郡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에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조사되어 있다.
은대리성은 한탄강의 북안에 돌출해 있는 단애의 한쪽 끝을 막아서 만든 강안평지성으로서, 평면형태는 삼각형 모양이다. 성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400m 정도이고 지상구조물인 동벽의 길이가 120m 정도여서 전체 규모는 952m에 달한다. 성의 내부면적은 약 7천평 정도이며 그중 동쪽부분의 3천평 정도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나머지 부분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조성됭 있다.
성의 남쪽은 한탄강에 접하여 50~60m의 수직 단애가 형성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15~20m 정도의 단애가 40°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 동쪽부분을 제외한 다른 방면으로는 성으로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동벽은 은대리성이 성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주된 지상구조물로서 길이는 120m, 기저부의 폭은 10m, 성벽의 높이는 6m 정도이지만 성벽은 상당부분 무너져 내려 북쪽으로 가면서 높이가 2-3m 정도로 낮아지고 있다. 성벽은 토석혼축으로 하여 양쪽 기단부에만 석축을 하고 안과 기단 윗부분에는 토축을 하였다. 토축부분은 토층이 관측되지 않고 쉽게 무너지는 것으로 보아 판축방법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단순히 점토를 다져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동벽의 남쪽부분은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면서 성벽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벽은 남벽에 비해 경사가 완만한 북벽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성벽의 길이는 120m 정도이다. 북벽은 현재 높이 2m, 폭5m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성벽이 절개된 부분을 보면 성내부에는 기단석축을 하고 그 안쪽에 흙을 쌓은 형태로서 기본적으로는 동벽의 축조방법과 동일하다. 기단부 구축에 사용된 성돌은 대부분 현무암을 사용하였으나 강돌이나 할석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성내부는 평탄하며, 성의 서쪽 송림지역에는 몇기의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성내에서는 수습되는 유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경작지에서 수습된 유물중 일부는 고구려토기편으로 판단된다. 토기편은 회색연질이며 표면에는 점열문이 찍혀있다. 와편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은대리성은 당포성이나 호로고루와 같이 임진강일대에서만 발견되는 江岸平地城이다. 모두 강의 북안에 위치하여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임진강이나 한탄강이 사행곡류하면서 강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 강을 건너기 수월한 곳에 축성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임진강 일대의 현무암 대지가 하천침식으로 인한 柱狀節理 현상으로 인하여 형성된 자연단애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으며, 동쪽부분만 지상에 성벽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도 같다. 다만 지상구조물인 동쪽성벽의 축조방법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호로고루의 경우 판축토 위에 석축을 하였으며, 당포성은 전체가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해, 은대리성은 석심토축을 하였다. 이러한 차이가 후대의 개축이나 축성주체의 차이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의 주변환경 및 방어기능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세 성중 여건상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은 호로고루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음으로 당포성, 은대리성의 순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는 고구려의 중심부인 평양- 개성 방면에서 한강유역 일대로 접근하는 가장 빠른 교통로는 개성에서 장단을 거쳐 호로고루 앞의 고랑포를 건너는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대리성이 있는 지역은 한탄강 북쪽지역의 영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성이지만 교통로의 장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이용빈도수가 낮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은대리성에서 발견되는 유물의 빈도수가 세 성 중 가장 낮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당포성
?소재지 :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82번지
?위치 및 현상
일반적으로 당포성은 미산면 마전리에 소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번도에는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82번지 일대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성은 삼화리에서 마전리로 가는 당개나루터 동쪽의 현무암 수직단애 상에 위치한 江岸平地城이다. 파주에서 37번 국도를 따라 적성을 지나면 좌측으로 칠중성이 보이는데 이곳을 지나면 감악산 서로를 지나와 백학면쪽으로 연결되는 349번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우회하여 계속 37번국도를 따라가면 어유지리 마을에 이르는데 마을을 관통하면 임진강이 사행하며, 돌출된 돌기부분에 당개나루가 있고 그 건너편의 단애위에 당포성이 구축되어 있다. 현재 당개나루를 건너는 교량은 신축중에 있어 마포리 방면으로 우회하여야 한다.
당포성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유일하게 미수 허목의 ?記言別集? 券15 「戊戌舟行記」에 ‘…마전 앞의 언덕 강벽 위에 옛진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총사가 있고, 그 앞의 나루를 당개라 하는데큰 물이 흘러 나루길로 통한다. (麻田前岸江壁上有古壘今其上爲叢祠其前浦曰堂浦大水則津路所通…)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성은 1994년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간행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으며, 연천문화원에서 발간한 ?鄕土史料集?에도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이 성은 임진강의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과 임진강 대안 단애 위에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으로 기본적인 형태는 호로고루이나 은대리성과 흡사하다. 당포성의 경우 다른 성과는 달리 동쪽에 내성과 외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두 성벽이 동시에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당포성은 약 13m 정도 높이의 단애 위에 축조되었는데 성의 서쪽끝에서 내성까지의 길이는 200m 이며, 높이는 6m, 길이는 50m 정도이다. 외성은 내성에서 70m 거리에 있으며, 외성은 높이 4m 길이 150m 이나 동쪽부분은 오히려 평탄하고 서쪽부분에 경사면이 형성되어 있어 방어의 주체와 방향이라는 측면에서 약간의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 마을주민이 농로포장공사를 하면서 이 외성의 상당부분을 훼손하였는데 훼손된 성벽의 단면에서 많은 양의 와편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와편은 어골문을 주로하는 고려시대 이후의 와편으로서, 이 외성벽은 내성벽과는 전혀 별개의 구조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내성벽의 경우 전체적으로 석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남쪽 진입로 부분의 성벽이 일부 잘려나가 단면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곳의 축성방법은 호로고루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호로고루의 경우 석축의 기저부에는 판축을 하고 중심부에는 판구간을 둔후 그 양쪽으로 대칭이 되도록 성벽을 구축하였으나 당포성의 경우 성벽전체를 석축으로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단면상에는 면석 부분이 잘 확인되지 않지만, 호로고루와 축조방법상의 유사한 점은 체성벽의 보축을 하였다는 점이다. 현재 성벽이 무너진 지점에 체성벽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외벽은 폭2m, 높이 1.6m 정도이며,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쌓았다. 성돌은 40×15cm, 28×13cm, 50×12cm 정도이다. 석축이 있는 부분의 퇴적토와 성돌 사이에서 상당량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는데 삼국시대 와편을 포함하여 고려-조선시대의 와편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허목의 시에 보면 조선시대 이곳에 성황사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아마도 성벽의 정상부 장대지에 성황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는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특히 북쪽을 바라보며 참호가 많이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는데도 이 지역의 전략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에서 고구려 유물보다 신라계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중 분포빈도가 가장 높은 것이 와편이다. 와편 중에는 회흑색의 선조문계통 와편과 격자문․어골문․무문와편 등이 있으며 승문와편도 발견된다. 이중 승문와편은 호로고루나 무등리1보루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와의 제작기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면에는 승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고, 내면에는 1.3cm 내외의 모골흔이 들쑥날쑥하게 찍혀 있으며, 마포흔의 위에 횡방향의 승문이 약간 찍혀 있다. 선조문와는 단판고판으로 두드려서 문양을 찍었으며, 마포흔의 안쪽에는 絲刀痕이 남아 있으며, 측단면은 2차정면을 하지 않았다.
토기편은 황갈색 니질의 고구려토기편도 일부 발견되지만 회청색 경질토기류와 주름무늬병, 덧띠무늬병등 8-9세기에 일반화되는 신라계의 유물이 주종을 이룬다.
당포성은 양주방면에서 수철성과 아미성이 있는 감악산 동로를 지나 임진강을 건너는 최단거리에 있는 나루터인 당개나루를 瞰制할 수 있는 임진강의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마전지역은 개성으로 가는 주요 요로에 있는 지점임을 고려할 때 이 성은 임진강 남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서, 고구려가 신라나, 백제를 방어하기 위하여 구축한 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성은 고구려의 군대가 평양지역에서 개성을 거쳐서 백제의 한성지역으로 남하한다고 가정할 때 장단까지 와서 동북쪽으로 다시 올라가서 내려오는 우회코스이다. 따라서 장단까지 내려온 고구려의 기병은 말을 타고 임진도를 직접도하할 수 없으므로 말을 타고 직접 도하 할 수 있는 임진강에서 가장 아래쪽의 여울목인 호로하 즉 고랑포 쪽이나, 적성부근인 칠중하를 주된 도하지점으로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역사적인 자료와 지형 및 주변 성들과의 비교를 통해 볼 때 이 성이 장악하고 있는 당개나루는 호로고루 만큼 중요한 도하지점은 아니었던 것 처럼 보이며 오히려 통일신라대에 더 중요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당포성은 임진강이 국경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폐기된 것으로 보이며, 그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 것은 해방이후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이다.
당포성은 호로고루 및 은대리성과 함께 임진강․한탄강유역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강안평지성으로서 고구려의 축성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동쪽성벽은 2중으로 구축되어 방어력을 높인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최근 외벽이 훼손되면서 노출된 단면을 통해볼 때, 외벽은 후대의 건물지 담장으로 축조된 것으로 밝혀져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단일성벽구조로 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판단된다. 또한 내성벽의 경우 판축구조물위에 석축을 한 호로고루와는 달리, 전체를 석축으로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호로고루의 축성기법과 차이가 있다. 아울러 입구부분 성벽동쪽부분에는 면석이 노출된 곳이 있는데 돌틈 사이에서는 신라계의 기와편들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성은 고구려에 의하여 초축이 되고 신라에 의하여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7. 두루봉보루
?소재지 :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위치 및 현상
두루봉 보루는 호로고루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4km 지점의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와 파주시 진동면 용산리 산7번지의 경계지점에 있다. 이곳은 해발 69.8m 의 두루봉이라 불리는 산 정상부이다. 호로고루 성이 있는 원당리에서 322번 지방도를 따라 3km 정도 가다보면 직진하게 되면 장단으로 가게되고 왼쪽으로 가면 용산리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게 되는데 용산리쪽을 향하여 2km 정도 가면 석포를 지나서 오른쪽에 있는 산이 바로 두루봉이다. 두루봉 정상부에 서면 고랑포 건너편의 장좌리, 자하리, 장파리, 금파리 일대가 잘 조망되며, 남서쪽으로 고구려산성인 덕진산성과는 직선거리 7km 거리에 있다.
두루봉 보루는 돌출된 봉우리의 정상부를 이용하여 장타원형으로 조성하였으며, 장축인 남-북은 15m, 동-서방향은 10m 로 전체 둘레는 약 50m 정도이다. 정상부에는 군부대에서 북쪽부분에 직경 2.5m 에 높이 2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여기에 연결하여 폭 50cm 길이 12.5m의 교통호를 구축하였는데 교통호의 양측벽은 성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교통호 주변에는 약간의 평탄지가 남아 있고 30cm 내외의 할석이 노출되고 있다. 유물은 교통호 내부와 정상부, 그리고 정상부 바로 아래쪽으로 돌아가면서 만든 교통호 내의 단면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두루봉 보루는 전체 둘레가 50m 내외인 작은 보루임에도 불구하고 보루 내에서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토기편과 함께 발견되는 이 기와들로 미루어 비록 규모는 작지만 瓦家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해발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이정도로 소규모의 보루에 기와건축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삼국시대에 있어 기와는 관부나 사찰 등 중요건물에만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건축자재로서, 아차산일대의 대부분의 보루와 양주일대의 보루에서는 기와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좀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8. 아미성
?소재지 : 연천군 전곡읍 눌목리 산137-1
?위치 및 현상
아미성이 있는 곳은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산26번지 일대로 연천군 전곡읍 눌목리 산 137-1번지와 경계지점이다. 동두천이나 양주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368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감악산과 마차산 사이를 지나 전곡이나 적성쪽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성은 이 도로가 37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 적암리에 못미쳐서 좌측에 있다. 한편 적성쪽에서 오면 어유지리를 거쳐 전곡으로 가는 37번 국도와 368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거리의 우측산 정상부에 있다. 어유지리 쪽의 삼거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368번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은 두 개의 산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좌측의 해발 397m 높이의 산 정상에는 수철성이 위치하며, 우측에는 아미성이 위치하고 있다.
아미성은 감악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줄기가 말단부에 형성된 해발 260m의 봉우리 정상부에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감악산의 줄기와 동쪽으로 마차산 줄기의 사이에 좁고 평탄한 협곡을 이루고 있어 감악산 서로보다 평탄한 교통로를 이루고 있으며, 아미성은 이 교통로를 통제하기 매우 양호한 지점에 있다. 특히 정상부에서는 남쪽방면으로의 시계가 매우 양호해서 계곡을 따라 공격해 오는 적을 제어하기 매우 용이한 지점이다.
아미성은 阿未城, 阿彌城, 峩眉城, 老姑城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지역주민들 사이에서는 ‘할미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城의 초축에 대한 문헌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조선초기?世宗實錄?의 地理志를 제외한 이후의 대부분의 지리지에서는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다. 즉 조선 중기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아미성은 현동쪽 18리지점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는 1937척’이라 하였다. ?東國輿地志?에는 성의 명칭만 ’阿未城’에서 ’阿彌城’으로 글자만 바뀌었을 뿐?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輿地圖書?에서는 성의 둘레가 당시의 地尺으로 1,215尺 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京畿誌?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성은 북동-남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으로서 동쪽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반면 서쪽과북쪽부분은 대체로 무너진 상태이다. 전체 둘레는 290m 정도이다. 조선시대의 지지자료에는 아미성의 둘레를 1,937척 또는 1,215척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290m를 1,937척으로 환산하면 1척의 길이가 14.9cm밖에 되지 않으며, 1215척으로 환산하더라도 23.8cm 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성곽둘레를 기록한 척도가 포백척이나 영조척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감안할 때 오차의 폭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차에 대해서는 추후 산성의 위치비정 문제와 함께 심도깊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산 정상부에는 곳곳에 석벽이 노출되어 있어 자연 성벽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동남쪽부분에는 높이 670cm에 폭 10m 정도의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성돌은 화강암을 치석하여 장방형으로 만든 것으로 크기는 40×15cm, 30×15cm, 25×10cm, 30×17cm로 높이에 비해서 폭이 넓은 성돌을 사용하였으며, 면석이 떨어져나간 지점에도 뾰족한 견치석 뒤채움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정교하게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층과 윗층의 돌들은 대략 1/2-1/3 정도 물리게 하였으며, 퇴물림쌓기를 하지는 않고 자연스럽게 경사가 이루어지도록 축성하였다. 전체적으로 거의 비슷한 크기의 성돌을 활용하여 쌓았다.
성의 서쪽부분은 성벽이 대부분 붕괴되어 약 10m 정도 폭으로 성돌이 쌓여 있다. 성의 안쪽에는 참호가 구축되어 있다. 성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동북쪽은 역시 참호가 구축되면서 성의 유구가 상당부분 훼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부에는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평탄지가 여러곳 조성되어 있으며, 특히 서의 남서쪽 부분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있고, 이곳에 구축된 참호 속에서는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부분 당초문을 양각하거나 음각한 수키와와 격자문을 타날한 회색이나 적갈색의 연질와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성의 정상부분과 동쪽부분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승문이 타날된 고구려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성내에서는 약간의 토기편과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유물이 발견되는 곳은 성의 동북쪽과 서남쪽의 참호부근이다. 성의 서남쪽에서 발견되는 와편은 단판고판으로 찍은 태선격자문와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수키와의 등에는 음각또는 양각을 하여 찍은 당초문와가 발견된다. 와의 태토는 니질에 가깝고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측면 절단부는 2차 정면을 하여 고구려와로 추정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고구려와에서 보이는것처럼 암키와의 경우 내면에 모골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표면의 문양도 장판고판으로 찍은 승문이나 거치문 등이 아닌 단판고판에 의한 태선격자문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문양은 신라계의 와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반면 동북쪽 성벽기단부 외곽에서 주로 발견되는 와편들은 역시 니질에 적갈색을 띠고 있지만 표면에는 승문이 찍혀 있고, 내면에는 폭 1.9cm 내외의 모골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이것들은 임진강변의 호로고루나 무등리보루 등에서 출토되는 고구려와와 거의 같으며, 내면에는 마포흔 위에 횡방향의 승문이 타날되어 있는 것이 있다. 또한 성내에서는 동북쪽 정상부주변에서 약간의 고구려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고구려토기편은 니질태토에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표면은 마연을 하여 반들거린다.
아미성은 368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수철성과 마주보고 있며, 이곳에서면 특히 간파리쪽의 정황이 잘 관측된다. 현재 성내에서는 고구려토기편과 고구려와편, 및 신라계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보루가 먼저 구축된 이후 신라가 장악하여 현존하는 성벽의모습대로 개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 성은 둘레가 약 290m 정도에 지나지 않고 해발고도도 260m에 달하는 산정상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미성과 대응하고 있는 수철성의 내부에서 와편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미성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성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되는 고구려토기편과 고구려와편들은 고구려군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다시말해 임진강을 건너온 고구려군은 서울지역으로 진출함에 있어 길이 험준한 감악산 서로를 택하지 않고, 감악산 동로를 주로 이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자료가 될 것이다.
Ⅲ. 기타유적
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
?소재지 : 전곡읍 전곡리 178-1
?위치 및 현상
전곡리 구석기유적은 서울의 동북방 약 50km 지점에 위치한다. 의정부에서 출발하는 경원선철도편과 문산에서 이어지는 37번국도와 동두천에서 연결되는 43번 국도를 이용해 도착 할 수 있다.
전곡리 유적이 위치한 임진-한탄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심부에서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뻗은 마식령산맥과 광주산맥의 사이에 위치하며, 철원․평강 등지에서 분출한 현무암이 흘러내려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는 지역을 강이 흐르면서 침식과 퇴적작용을 반복하여 형성된 지역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지형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유적이 위치한 이 평탄한 대지상의 지형에서는 두터운 점토층이 전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이 붉은 색깔을 띄는 점토들은 제4기 지질시대 동안 퇴적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점토층이 있는 곳에서 흔히 석영암 또는 규암제의 석기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전지역이 석기 산포지라고 할 수 있다.
임진-한탄강은 심한 곡류를 이루며 흐르고 있고 강의 양쪽 혹은 한쪽은 현무암 특유의 주상절리현상에 의해 나타난 거대한 검은 현무암 절벽이 이루어져 있으며 현무암반 위로 유수에 의해서 형성된 퇴적층이 이루어져 있고 이들 퇴적층들은 일단 강이 현재의 유로면으로 떨어진 뒤로는 비교적 훼손을 덜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이유로 한탄- 임진강 유역 특히 전곡리 유적은 고생태학적으로 유적이 잘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유적은 1978년 4월 동두천에 주둔하던 미군병사인 그렉보웬(G. Bowen)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총 10차례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유적은 기반암인 현무암의 포타시움 아르곤 연대측정(K/Ar Dating)결과를 토대로 약 20-30만년전에 이곳을 흐르던 강에 의해 점토와 모래퇴적이 이루어질 때, 강의 주변에 살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나타난다고 주장되어 왔던 아슐리안형(Acheulean-typed)주먹도끼들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출토됨으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저명한 구석기학자인 모비우스(H. Movius Jr.)교수는 유럽과 아프리카와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석기가 발견되지 않으며 대신에 찍개류의 석기문화전통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세계구석기문화전통 2원론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전곡리의 주먹도끼는 기존의 세계구석기문화이론을 무너지게한 새로운 구석기자료가 된 셈이다. 정부는 이 유적이 발견된 이 후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 일대 약 23만평을 사적 제 268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렇듯 전곡리 석기 공작은 최초 발견 이후 지금까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출토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바 전곡리 구석기 문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주먹도끼류의 석기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주먹도끼류의 석기들은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구석기 공작 전체에서 독자적인 성격을 지닌 석기들로 이해되고 있다.
2. 연천 학곡리 적석총
?소재지 : 백학면 학곡리 20번지
?위치 및 현상
학곡리 돌마돌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정도 떨어진 자연제방 상에 위치하는 積石塚이다. 적석총에는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남쪽에 접해 임진강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적석총을 오래 전부터 마귀할멈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와 쌓았다는 전설과 함께 활짝각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신성시하였고 이 무덤으로 인하여 돌마돌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積石 하부의 모래언덕은 강의 방향(N-60°-E)을 따라 세장한 형태를 띠고 있다. 남동쪽면은 급경사를 이루면서 河床과 이어지고 나머지 면은 자연제방 자체이다. 길이가 약 30m, 폭은 北東端部가 최대로 17.5m정도이고 남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진다. 높이는 자연제방 상에서 약 2m , 강쪽에서는 5~6m 정도이다.
이러한 모래언덕 위에 한 변의 길이가 20~40cm 정도되는 강돌들이 군을 이루고 있다. 積石은 모래언덕의 평면 형태와 같이 東端部가 가장 넓고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지며 적석의 두께도 동단부쪽이 가장 두껍고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얇아진다. 적석의 규모는 길이 24.5m , 폭 4(서)-8m(동), 최대높이 1.4m정도이다. 적석부의 상면은 비교적 편평하나 군데군데 교란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부의 적석은 남동사면과 북동사면으로 이어진다. 북동사면상의 강돌은 양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비해 남동사면상의 강돌은 양이 많고 전반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위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 강돌 중 일부는 삼곶리의 예와 같이 본래부터 무덤보호시설일 가능성도 있다.
이 적석총은 연천일대에 분포하는 적석총 중 횡산리적석총, 이미 발굴된 삼곶리적석총과 함께 남아있는 적석총 중 상태가 가장 좋으며 축조연대는 삼곶리적석총과 비슷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99년 3월 현장 답사시 건물신축과 부지조성으로 인해 적석총의 남동자락이 잘려나감으로써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모래언덕의 남동쪽부분이 유실, 붕괴되어 상부의 적석이 흘러내리고 있는 상태였고 99년 8월에는 홍수로 남쪽의 상당부분이 붕괴되어 있었다. 빠른 시일 내에 정밀한 학술조사와 함께 보호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3. 연천 삼거리 적석총
?소재지 : 군남면 삼거리 707-1
?위치 및 현상
군남면 선곡리 마을의 서편 임진강변 자연제방상에 위치하는 積石塚이다. 선곡리 마을에서 서쪽에 있는 평야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임진강쪽으로 1㎞ 정도가면 자연제방에 조그만 모래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은 마을에서 원등산이라고 부르는데 본래는 상당히 컸으나 수년 전 원예농사용으로 굴토해 감에 따라 대부분이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일대는 행정구역상 군남면 삼거리와 선곡리의 경계지역이다.
모래언덕의 북․서쪽면은 河床과 이어지고 남쪽면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자연제방과 이어진다. 남쪽면에는 굴삭기로 흙을 채취해 간 흔적이 뚜렸이 남아 있는데 파헤쳐진 면의 층위는 미사 단일층이다. 모래언덕의 현재 크기는 최대길이 16m, 폭 4m 정도이고 높이는 하상에서 약 5-6m, 자연제방에서는 2.5m정도이다. 이 크기는 주민의 얘기를 참고로 했을 때 본래의 1/5 이하로 판단된다.
이 언덕의 북사면에는 한변의 길이가 40cm 정도되는 강돌들이 1~3겹 정도로 덮여 있고 정상부에는 이 만큼 현저하지는 않지만 강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주변의 자연제방에 강돌들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이 돌들은 인위적으로 갖다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중 북사면에 있는 강돌들은 양이 많은 것으로 보아 모두 정상부에서 흘러내린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삼곶리의 예와 같이 무덤보호시설일 가능성도 있다.
이전의 조사에서 모래언덕의 사면에 있는 積石에서 繩蓆文이 打捺된 灰白色軟質土器片과 빗살무늬토기편, 無文土器片, 人骨片 등을 채집하였고 또한 이 일대가 遺物散布地로 어망추, 토기편, 돌도끼 등이 채집되었다고 한다.
삼거리 적석총은 대부분이 파괴되고 그 잔해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경작, 유실, 등으로 머지않아 멸실될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최소한의 학술자료라도 보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인근의 선곡리마을에 통칭 ‘개무덤’이라 불리는 고분이 있었는데 일대가 주택지로 바뀌면서 멸실되었다고 한다.
4. 연천 우정리 적석총
?소재지 : 미산면 우정리 381번지
?위치 및 현상
북에서 남쪽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미산면 우정리와 군남면 진상리를 잇는 임진교 남쪽의 서쪽 자연제방에 위치하는 積石塚이다. 마을에서는 이곳을 예전부터 돌무더미라 불렀으며 마귀할미가 치마폭에 강돌을 날라와 하루만에 쌓았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1970년대 초 새마을 운동 당시 우정리마을에서 임진강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埋葬主體部가 있는 積石部에 철근 콘크리이트조의 취수탑을 설치하면서 적석총의 묘곽은 이미 파괴되어 버린 상태이다. 당시 취수탑 설치 과정에 참여했던 이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작업으로 노출된 묘곽에서 많은 수의 크고 작은 石製 구슬과 소량의 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고 하며 또한 북쪽부분에서 無文土器片과 剝片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현재 확인되는 자연제방상의 모래언덕과 積石部는 심하게 교란되어 있다. 모래언덕은 강의 방향을 따라 길쭉한 타원형이며 東斜面은 임진강과 이어지고 서쪽부분은 충적대지로 이어진다. 모래언덕의 크기는 길이 35m, 폭 22m, 높이는 강쪽이 3~4m , 자연제방 상에서 1m정도이다.
취수탑 아랫부분에 보면 한 변의 길이가 20~40cm정도되는 강돌이 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 돌들의 범위는 취수탑을 중심으로 동서 8m, 남북 8.5m이며 평면형태는 方形이다. 이 강돌과 콘크리이트 조각들이 뒤섞여 있는 점으로 보아 적석은 취수탑 건설이 대부분이 교란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미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이나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기초자료를 확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5. 경순왕릉
?소재지 :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위치 및 현상
경순왕은 文聖王의 6대손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이미 기울어 가는 사직을 지탱하지 못하고 당시 후백제 및 고려와의 무력대결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기보다는 차라리 고려에 귀부함으로써 전란에 의한 피해를 막고자 하였다. 재위 9년만인 935년 군신회의를 열고 왕자(마의태자)의 반대가 있었으나 신라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물려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고려 경종3년(978) 4월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에 다시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 중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며 사적 제 2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릉은 현재 민통선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점은 남방한계선 200m 전이기도 하다. 동향한 나즈막한 구릉의 정상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봉분의 규모는 직경 660cm, 높이 200cm로서 32매의 호석을 두른 원형봉분이며 곡장내에 있다. 묘 앞에는 410cm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으며 하단의 계체석에 석물들이 놓여 있다.
석물로는 상석, 묘표, 장명등, 석양 1쌍, 망주석 2기 등이 있다. 상석은 높이 23cm․너비 103cm․두께 44cm이다. 묘표는 비좌와 비신월두형으로 前面에 종1열로 ‘新羅敬順王之陵’의 비문이 있다. 비신에는 탄흔이 5개소 있는데 이중 1개소는 ‘敬’자에 있으며, 좌측 상단 측면에도 탄흔으로 인한 파손이 있다. 크기는 비좌 높이 19cm․너비 90cm․두께 60cm, 비신 높이 104cm․너비 47cm․두께 17cm이다. 장명등은 백색운모화강암으로 높이 160cm이며 4방에 화창석이 있다. 石羊은 석호와 더불어 대개는 두 쌍씩 있어야 하나 경순왕릉에는 석양만 1쌍이 있다. 좌의 것은 높이 52cm, 길이 123cm로 돌이끼가 있으며 목등에 탄흔이 있다. 우의 것은 높이 60cm, 길이 115cm로 돌이끼가 있으며 좌측 귀 파손 및 엉덩이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망주석은 왼쪽이 높이 160cm, 오른쪽이 높이 145cm이다.
1) 관방유적은 군사적인 방어시설에 대한 총칭으로서, 성이나 보루, 봉수 등을 말한다.
2) 설명내용은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조사하여 발간한 『漣川 瓠蘆古壘-精密地表調査報告書』(심광주․김주홍․정나리,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1999.2)의 내용을 주로참고하였음을 밝힌다.
3) 화양지구 유적발굴조사단, 『華陽地區 遺蹟發掘 調査報告』,1977,1978
4) 金元龍․任孝宰․朴淳發, 『夢村土城-東南地區發掘調査報告』,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5) 심광주․윤우준,「문화유적」,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유산』, 구리시․구리문화원,
1994,pp133-194
6) 심광주,「문화재」,『九里市誌 上』,구리시, 1996,pp326-412
7) 김성범, 「軍事保護區域 內 文化遺蹟 地表調査報告- 京畿道 漣川郡篇」,『文化財』25집, 1992,pp219-260
8)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京畿道 坡州郡 軍事遺蹟 -地表調査報告書』,1994
9) 이우형, 『鄕土史料集』, 연천문화원, 1995.pp537-560
10) 실례로 진천의 대모산성에서는 고구려토기가 발견된 바 있다. (차용걸․노병식, 『鎭川 大母山城-地表調査報告書』,충남대학교호서문화연구소, 1996,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