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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백수.白水 2012. 7. 2. 13:05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불상, 벽화

 

원문 http://blog.naver.com/naruluiha/120149394524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지만, 고려 건축물의 특징이 나타난다.

 

1. 극락보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전과 닮았는데, 기둥의 높이에 비해 간격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경사진 곳에 세워 앞쪽에 얕은 축대를 세우고 건물을 올렸다.




 

 



통일신라 시대 또한 포작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닮은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맞배지붕 겹처마의 주심포 양식이기 때문에 검박하고 단정한 느낌이다. 1983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명문에 따르면, 극락전 건립 공사는 국가적 사업으로 효령대군이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비탈진 곳에 세웠기 때문에 앞쪽에 얕은 축대를 쌓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로 정면의 가운데 칸이 양 칸보다 좁은 것이 특징이며, 기둥 높이에 비해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 안정적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보인다.

 

소슬빗살문이 건물 전체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건물의 측면을 보면 고려시대 주심포 건물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보다 간결해진 느낌이다. 기둥과 들보가 드러나 있는데,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하여 한결 정돈된 느낌이다. 소슬빗살문 또한 나무결이 드러나 건물 전체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법당 마루 아래에는 전돌이 깔려 있는데, 해체 복원 공사 때 뜯어냈다고 건물 내부에 습기가 가득 차서 다시 깔았다는 일화가 있다.

 

 

 

2. 아미타삼존상

 

 

무위사 삼존불은 거대해진 조선 후기의 불상과 달리 전각의 크기에 알맞게 조성되었다.

 

 

아미타삼존상은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있으며, 완쪽에 관음보살이 있다. 두 보살은 바깥쪽 다리를 늘어뜨린 자세를 취하였다. 얼굴 선이 부드럽고 단아하여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법당이 비좁게 보일 정도로 불상이 거대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조선 초기의 무위사 아미타삼존상은 건물의 규모나 후불벽화의 크기와 조화를 이루어 차분한 느낌이 든다.

 

 

 

3. 아미타삼존도

 

 

고려 불화가 조선 불화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작품이다(사진 출처: 문화재청)

 

 

극락보전 아미타삼존상 뒤에는 아미타삼존도가 그러져 있으며, 뒤벽에는 수월관음도가 그러져 있다. 본래 각 벽마다 그림이 가득했는데, 그림을 벽채로 뜯어내 보존각으로 옮겼다. 법당을 만들 때 불상을 먼저 모시고, 벽체에 수분이 빠진 후 그림을 그리므로, 극락보전의 벽화는 아미삼존상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삼존도는 붉은 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화려하고 섬세한 묘사가 고려 불화를 닮았다.

 

고려 후기의 아미타삼존도(사진출처 : 문화재청)

조선 중기의 영산회괘불탱화(사진출처 : 문화재청)

 

엄격한 상하구도를 보이는 고려 불화와 달리 협시보살의 키가 아미타부처의 어깨에 달하고, 좌우에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졌다. 16세기 이후의 불화에는 부처 주위에 나한과 보살이 가득하므로, 무위사 아미타삼존도는 고려 불화와 조선 불화의 과도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의 광배 또한 종전의 원형이나 주형(舟形)이 아니라 얼굴쪽이 잘록한 키형(箕形)이다. 화기에 따르면, 강노지(姜老至) 등의 시주로 혜련 스님이 그려 성종 7년(1476)에 완성했다고 한다.

 

 

 

4. 수월관음도

 

 

무위사 수월관음도(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무위사의 수월관음도 또한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었다. 남성적 인상의 관음보살이 선재동자를 내려보고 있는데, 선재동자는 일반적인 동자와 달리 늙은 비구로 보인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 모두 보름달처럼 표현되었으며, 아래쪽의 물결무늬는 관음보살이 바다 위에 떠있음을 나타낸다. 너울거리는 옷자락이 유려하여 불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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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의 스케치 여행]눈동자 없는 관음보살, 파랑새는 언제 오는가

 


불전을 짓고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한 노승이 찾아왔다. 그는 새로 만든 법당에 자신이 벽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차림은 비록 누추했지만 노승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한 주지는 그러라고 했다. 노승은 49일 동안 절대 법당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노승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법당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너무나 궁금해진 주지는 결국 49일째 되던 마지막 날 문에 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승은 온데간데없고 붓을 문 파랑새 한 마리가 벽화를 그리는 게 아닌가. 그림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찍으려던 찰나,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관음보살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맞배지붕과 후불벽화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전설 중 하나다. 파랑새가 그렸다는 벽화는 전남 강진의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 안에 있다. 무위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아무 걸림이 없다’는 말로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다. 이 또한 마음에 와 닿는다.


이 벽화를 담고 있는 극락보전은 국보 13호로 1430년(세종 12년)에 지어졌다.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조선 초기 건물이다. 유려한 처마안허리 곡선의 팔작지붕이 대부분인 오늘날의 전통 한옥에 익숙한 내게 맞배지붕의 맛을 알게 해준 건물 중 하나다. 600년 가까이 된 목조 건축의 정교함이라니! 그 놀라움은 네 벽 모두 그림으로 장식된 법당 안까지 이어진다. 극락보전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무위사를 처음 찾았을 때는 황량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번창했을 때 58개 동에 이르던 사찰이 지금은 주차장에서부터 막 틀을 갖춰가기 시작하는 신진 사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을 들어서자 계단 위로 드러나는 극락보전 맞배지붕의 육중함에 이내 마음을 사로잡혔다. 극락보전 계단을 올라 측면 문으로 삼존불과 후불벽화(後佛壁畵)를 바라본다. 파랑새가 완성하지 못했다는 관음보살의 눈동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혹시 없는 것이 아니라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닐까.

무위의 편안함

나도 텅 빈 법당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아 본다. 법당 특유의 냄새가 섞인 실내는 부처님의 미소가 가득한 것만 같다. 살포시 스며드는 바람에 눈을 떠 보니 작은 파랑새 한 마리가 법당 안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새는 불상 위를 몇 바퀴 맴돌더니 이내 벽화 뒤로 날아 사라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화 뒤의 관음보살을 올려다본다. 하얀 옷을 입은 관음보살은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다.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비구의 어깨에 앉은 파랑새 하나. 한쪽에 써 있는 오언율시를 본다.

海岸孤絶處(해안고절처) 中有洛伽峰(중유낙가봉)
大聖住無住(대성주무주) 普門峰不峰(보문봉불봉)
明珠非我欲(명주비아욕) 靑鳥是人逢(청조시인봉)
但願蒼波上(단원창파상) 親瞻滿月容(친첨만월용)

바닷가 외딴 곳 한가운데 낙가봉이 있더라
석가모니불 계시든 안 계시든 아미타불 만나든 못 만나든
빛나는 구슬 내 바라는 바 아니고 우리가 찾는 건 파랑새뿐
단지 바라는 것은 푸른 물결 위 보름달 같은 얼굴 보기를


여름 오후의 극락보전 안에는 파랑새 날갯짓의 희미한 향기만 남았다. 순간 내게 무위의 편안함이 찾아왔다. 새가 공기 속을 날듯 아무 걸림 없는 그런 무위. 전설이 가져다주는 미완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렇게 후불벽화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파랑새를 기다리는 듯, 깊은 여운을 남겼다.

 

<동아/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