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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지

백수.白水 2012. 11. 17. 08:43

익산 왕궁성

 

 

 

오래전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왕궁 터로 알려져 왔던 곳이며 조선시대기록에도 고대 왕궁 터로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이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운 도읍성이라는 학설부터 마한시대의 왕궁 터 또는 백제시대의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別都), 안승의 보덕국설, 그리고 백제멸망 이후에 후백제 견훤이 쌓은 궁성 터라는 학설까지 다양하게 알려져 있던 곳이다. 발굴조사결과 이 유적은 백제무왕(600-641)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馬韓)

 

 

기준(箕準)이 이미 위만(衛滿)에게 침공을 당하여 빼앗기고서는 그 좌우의 궁인(宮人)을 데리고 달아나 바다를 통해 한지(韓地)인 금마군(金馬郡)으로 들어가 살았다

.

그리고는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불렀다.

 

그 백성들은 토착(土着)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잠상(蠶桑)하고 면포(綿布)를 만들 줄 알았다. 각각 장수(長帥)가 있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이름하여 신지(臣智)라 하였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었는데, 성곽(城郭)은 없었다.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신분활국(臣濆活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古誕者國고리국(古離國노람국(怒藍國월지국(月支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소위건국(素謂乾國고원국(古爰國막로국(莫盧國비리국(卑離國점리비국(占離卑國신흔국(臣釁國지침국(支侵國구로국(狗盧國비미국(卑彌國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고포국(古蒲國치리국국(致利鞠國염로국(冉路國아림국(兒林國사로국(駟盧國내비리국(內卑離國감해국(感奚國만로국(萬盧國벽비리국(辟卑離國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일리국(一離國불미국(不彌國지반국(支半國구소국(狗素國첩로국(捷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신소도국(臣蘇塗國고랍국(古臘國임소반국(臨素半國신운신국(臣雲新國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일난국(一難國구해국(狗奚國불운국(不雲國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원지국(爰池國건마국(乾馬國초리국(楚離國)이 있었는데, 무릇 50여 국이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집인데, 모두 10여 만 호()이다. 풍속은 강기(綱紀)가 적었으며 초옥(草屋)과 토실(土室)을 지어 거처하였는데, 그 문은 위로 향하게 나 있었다. 풍속은 금은(金銀)이나 금계(錦罽)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영주(瓔珠)를 귀하게 여겨서 머리에 꾸미고 귀에 드리우는 데에 사용하였다. 남자는 백포(帛袍)를 입고 초갹(草蹻)을 신었으며, 성질이 용감하고 사나워 떠들어대며 일을 하고, ·방패··()를 잘 사용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목지국(目支國)

 

삼한시대 마한(馬韓) 54개 소국(小國) 중의 하나로 삼국지(三國志)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지국(目支國)은 초기 철기시대 이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 지역에서 형성, 발전되어온 토착 정치 집단의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 연맹체(小國聯盟體)의 중심 세력이었다.

 

목지국의 위치는 인천,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 충청남도 직산(稷山), 예산(禮山), 아산만 일대 등지에 비정되기도 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益山),전라북도 익산(益山),금강 유역,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榮山江) 유역 등지에 비정되기도 한다. 또한 사료상 목지국이 웅천(熊川) 이남에 위치한다는 점, 그리고 대체로 북에서 남으로 나열된 마한 50여국 중에서 백제국의 여섯 번째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위치가 아산만 이남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이는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주(南走) 기록이나 청동기 유물 및 고분군의 분포 상태 등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상호 결합하여 제시된 견해들이다.

 

목지국의 신지(臣智: 삼한 소국의 정치적 지배자)인 진왕(辰王)은 마한 소국 연맹체의 맹주로서 진한(辰韓변한(弁韓) 소국의 일부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왕은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마한 소국 연맹체의 연맹장이 될 수는 없는, 정치 권력이 아직 미약한 지배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왕은 삼한 소국에 대한 통제권을 기반으로 한군현(漢郡縣)과의 교섭을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왕의 역할은 마한 소국들에 대해 상징적 대표권과 실질적 통제권 양자 모두를 지닌 것이었다. 이로 보아 진왕의 성격을 연맹체적인 지배권을 동반한 교섭 주도권, 조정권, 상업·무역을 둘러싼 진왕국연합체(辰王國聯合體)의 주도권, 교역주도권 등으로 파악한다.

 

목지국의 존속 시기 및 진왕의 지배 영역과 지배 성격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양하다. 목지국 진왕은 삼한 전체를 통솔한 지배자라는 해석과 부족 연맹장(部族聯盟長)으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존재라는 해석, 3세기경의 백제 고이왕(古爾王)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목지국 진왕의 진한·변한 소국 지배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도, 이를 중국 군현(郡縣)에 근접한 한()소국과 멀리 떨어진 소국 사이에 형성된 공납 관계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국 군현과의 교역 과정에서 경상도 방면의 일부 정치 집단들에 대하여 확립된, 마한 소국의 우월한 위치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목지국과 관련해서는 진왕 문제와 함께 그 중심 연대, 지배 영역, 지배 성격 등을 둘러싸고 아직 많은 쟁점이 남아 있다.

 

보덕국(報德國)

 

 

674(신라 문무왕 14) 안승(安勝)이 세운 나라. 고구려 유민 안승이 황해도 재령지방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키고 당과 싸우며,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에서는 그를 받아들여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전북 익산) 에 있게 하고 보덕국왕을 봉했다. 이로써 보덕국이 생기게 되었으나 683(신문왕 3)에 보덕국을 폐하고 안승을 경주(慶州)에 불러들여 벼슬과 토지를 주어 귀족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