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탄과 웅연은 어디일까. 다시 미수 허목의 ‘무술주행기를 보자.
『...그 위가 징파도(澄波渡)이고, 또 그 위 귀탄(鬼灘)에서 웅연(熊淵) 문석(文石)까지 7, 8리인데, 문석이란 것은 웅연의 그늘진 벼랑의 돌 위에 초서(草書) 같은 글이 있는 것인데, 기이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다. 전에 어떤 고을 원이 부수려 했으나, 글자가 깊이 새겨져서 고칠 수 없었다 한다. 강가의 옛일[古事]은 기록할 만한 것이 많으나 물어볼 곳이 없었다. 징파도(澄波渡)에서 배에서 내려 돌아왔다. 미수(眉叟)는 쓴다.』
현 북삼교 근처인 징파나루의 위에 있다고 했는데 자료 어디를 찾아도 귀탄(鬼灘)은 나오지 않는다. 귀탄은 웅연에서 거리가 7,8리가 된다고 하니 먼저 웅연을 찾아보자.
연천군 중면 삼곶리의 고미포(古美浦)와 괴미소(熊淵)에 대한 유래를 보자.
고미포(古美浦)는 논골의 서쪽, 임진강 괴미소 옆에 있던 포구 마을로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중면 일대와 철원 지방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과 강화, 서해안 등지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새우젓과 소금배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장이 섰던 곳이다. 중면 사무소가 처음에는 이 곳에 있었으나, 1925년 을축(乙丑) 대홍수 때 강물이 크게 범람하면서 이 일대가 모두 유실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괴미소(熊淵)는 고미포 아래 임진강에 있는 깊고 큰 소다. ‘신성하고 높음', ‘거룩하고 으뜸이 됨’, ‘큰'의 뜻을 지닌 고어다. 이 ‘곰'으로 음이 변하면서 한자 지명인 ‘곰[熊]'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곶리 돌무지무덤’을 답사한 후 괴미소(웅연)를 찾으려고 했으나, 동네분들을 탐문해도 아는 이가 없었고, 휴일이라서 면사무소도 문이 닫혀있어서 그냥 돌아왔다. 현지를 답사 후 웅연석문(熊淵石文)사진을 올려놓은 분의 글에 웅연은 군담댐으로 부터 약2km의 거리에 있다고 했다. 오늘 면사무소에 전화해서 확인해보니 내가 짐작하고 있는 위치가 대강 맞다.
강 건너 앞산(왕징면 강내리) 끝부분의 모퉁이가 웅연(곰소, 고미소, 괴미소)이다. 임진강은 저산 모퉁이를 돌아 2km떨어진 군남댐으로 南流하는 것이다.
귀탄은 웅연 아래로 7,8리가 된다했으니 어느 곳을 지칭했는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군남댐과 북삼교의 중간쯤인 것은 분명하다.
웅연석문을 확인하려면 민간인통제구역인 강내리로 들어가서 절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
‘웅연석문’ 사진보기 ☞ http://cafe.daum.net/sodkso/GPpW/963?docid=3387168385&q=%B9%CC%BC%F6%20%C7%E3%B8%F1%B9%A6%BA%F1&re=1
미수 허목선생을 찾아서 | 들꽃내음 이야기 | 2011.06.02. 14:10
일전에 연천 문화원사무국장(이준용)이 미수 허목선생이 바위에 새겨놓인 石文下石 이란 명문이 임진강댐의 담수가 시작되면 수몰될 위기에 놓여있다 하여 이를 찾아 나섰다.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강내리 임진강 상류
석문과 하석의 글자체가 다르다. 石文 (석문이란 명문이 써 있는 )下石(아래)에는
귀신이 써 놓은 글이 있다고 한다. 下石 글자에서 石자에는 붉은색이 또렷이 보인다.
세로로 이어진 빗살모양의 형상(사실 이것은 물살에 의해 돌이 패어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던지 이것은 귀신이 써 놓은 神書라고 문화원 사무국장은 굳게 믿고있다.
바위는 침식에 약한 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귀신의 글자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왜 미수 허목이 바위 절벽에 명문하석이란 글을 새겨 넣었을까나 ?
=========================================================================================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http://blog.naver.com/isj5995/175969088
이 화첩(畵帖) 또한 양천현령(陽川縣令) 시절(時節)인 1742년(年)에 제작(製作)된 화첩(畵帖)으로 겸재(謙齋)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 작품(記念碑的 作品)이라 할 수 있는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 한강변 명승(漢江邊 名勝)을 그린 여성적 진경산수(女性的 眞景山水)라면, 이 화첩(畵帖)은 경기도(京畿道) 연천(漣川) 임진강변(臨津江邊)을 그린 남성적 진경산수(男性的 眞景山水)임
임술년(壬戌年 : 1742) 시월(十月) 보름날,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창애 홍경보(蒼厓 洪景輔 : 1692~1745)는 경기도 최북단(京畿道 最北端)의 삭령(朔寧)을 순시(巡視)하고 다음 고을인 연천(漣川)으로 가기 위해 임진강 상류(臨津江 上流) 우화정(羽化亭)에서 배를 타고 웅연(熊淵)에서 내리게 되었음
홍경보(洪景輔)는 옛날 송(宋)나라 소동파(蘇東坡 : 1036~1101)가 「후적벽부(後赤壁부)」를 지은 것도 임술년(壬戌年 : 1082) 시월(十月) 보름날이었음을 상기(想起)하고는 감회(感懷)가 일어 경기도 관내(京畿道 管內) 고을의 원님으로 당대(當代)의 문장가(文章家)였던 연천현감(漣川縣監) 청천 신유한(靑泉 申維翰 : 1681~?)과 당대(當代)의 화가(畵家)인 양천현령(陽川縣令) 겸재(謙齋)를 불러 함께 뱃놀이를 하며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이며, 이에 홍경보(洪景輔)는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라 이름 붙이고 그 서(序)를 다음과 같이 지었음
내가 순찰(巡察)하여 살피는 길에 경기도(京畿道) 산협(山峽)의 연천(漣川)과 삭령(朔寧) 사이에 다다르니 때는 임술년(壬戌年 : 1082) 시월(十月) 보름이었다. 양천현령(陽川縣令) 겸재(謙齋)와 연천현감(漣川縣監) 신유한(申維翰)을 우화정(羽化亭)에서 만나기로 약속(約束)하고 배를 타고 흐름에 따라 내려와 횡강(橫江)과 문석(文石)을 지나 해질 녘에 웅연(熊淵)에 정박(碇泊)하여 달을 얻고서야 파(罷)하였으니, 대개(大槪) 소동파(蘇東坡)의 뱃놀이를 모방(模倣)함이었다.
이 행로(行路)가 물길 40리(里)인데, 좌우(左右)가 모두 깎아지른 절벽(絶壁)이고 또 빈객(賓客)과 주효(酒肴)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소동파(蘇東坡)의 뱃놀이에 비교(比較)해봄이 거의 같지 않음이 없었다....
드디어 술을 들어 스스로 축하(祝賀)하고 이어 두 사또에게 부탁(付託)하기를, 나를 위해 오늘의 일을 부(賦)로 짓고 그림으로 그려주었으면 다행(多幸)이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신유한(申維翰)은 대문장가(大文章家)답게 주변(周邊)의 풍광(風光)을 한 폭(幅)의 풍경화(風景畵)처럼 펼쳐나가 다음과 같은 장문(長文)의 부(賦)를 지었음
높은 암벽(巖壁) 성벽(城壁)처럼 가파라서 구름을 꿰뚫었고 고목(枯木) 나뭇가지는 서리를 맞았구나. 조용히 출렁대며 머뭇머뭇 나아가니 문득 재빨리 바라봐야 굽이진 경치(景致) 구경하겠다.... 때마침 부드러운 산들바람 홀연(忽然)히 저녁으로 사나워져 노젓는 소리와 함께 번개 치듯 달려나간다..... 밝은 모래 마전하듯 덮여 있고 가린 안개 비단 장막(緋緞 帳幕) 이루는데, 말 타고 악기(樂器) 불며 강(江)기슭 들고 기다리는 횃불은 도시(都市)와 같다....
겸재(謙齋)는 신유한(申維翰)이 읊은 그 광경(光景)을 남김없이 그림으로 그렸는데
1) 「우화등선(羽化登船)」
「우화등강(羽化登江)」으로도 불리며 33.1cm × 93.8cm 크기에 서울(Seoul)의 한 개인(個人)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임진강(臨津江)에서 관찰사(觀察使) 홍경보(洪景輔)와 뱃놀이할 때 우화정(우화정)에서 배를 타는 장면(場面)을 그린 것인데, 장대(壯大)한 진경산수(眞景山水)이면서 속화(俗畵)를 연상(聯想)케 하는 군상(群像)이 삽입(揷入)되어 있어 진경풍속(眞景風俗)이라고 부를 만한 명작(名作) 임
2) 「웅연계람(熊淵繫纜)」
역시 33.1cm × 93.8cm 크기에 서울(Seoul)의 한 개인(個人)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이 그림은 웅연(熊淵)에서 배를 내릴 때의 광경(光景)을 기린 것으로 밤 풍경(諷經)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화면상(畵面上) 먹빛이 더욱 짙고 어둡게 칠(漆)해졌음
==================================================================================================================
웅연계람(熊淵繫纜)에서 계람(繫纜)은 <맬>계 <닻줄>람으로 닻줄을 배고, 배를 맴을 뜻하니 웅연에서 매를 띄우고 돌았다는 말이다.
우화(羽化)는 곤충의 번데기가 변태하여 성충이 되거나, 날개가 생겨 하늘을 나는 것을 뜻한다. 대개 우화등선(羽化登仙)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날개가 돋아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는 뜻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기분이 좋음’을 뜻한다.
여기서는 우화등선(羽化登船)으로 ‘우화정(羽化亭)에서 배를 타다’라는 말인데 우화등강(羽化豋舡)이라고도 한다. 강(舡)은 船(선)의 俗字로 배<강> 또는 배<선>이므로 그나저나 ‘우화등강’이라하면 그만이다.
지도상 연천군 중면 횡산리의 임진강 필승교에서 북으로 남방한계선 - 군사분계선 - 북방한계선을 지나 임진강을 오르면 역곡천이 임진강으로 흘러들어와 만나는 곳에 ‘우화정’이라는 표시가 있다.
우화정(羽化亭)은 현재 북한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중면 대사리 임진강변의 낭떠러지 위에 있었다고 전하는 정자이다. 유래는 《여지도서》와 《삭녕읍지》에 건물의 흔적만 남은 이곳을 우화대(羽化臺)라 불렀으며, 1667년(현종 8)에 삭녕군수 이산뢰(李山賚)가 정자를 다시 지어 우화정(羽化亭)이라 하였으나 조선말에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건축학적인 기록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우화등강(羽化登舡)이라는 진경산수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림에 의하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八作-)형식을 갖추고 있다.
대사리에 우화정다리(羽化亭橋, 朔寧渡)는 우화정 북쪽, 뒷내강에 있는 다리로 일제강점기 때 가설되어 연천군과 동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옆에 삭녕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모여드는 농산물 집판장이 있던 곳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우화정과 이 다리 부근에 세 가구가 살고 있었고, 예전 삭녕군의 관문이 되었던 이 곳 대로변에는 10여 기의 선정비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곡리 용암(한탄강 용암의 역류현장) (0) | 2013.06.08 |
---|---|
빙애(氷崖)와 장군나루(將軍渡) (0) | 2013.06.08 |
임진강상류 지도 (0) | 2013.06.07 |
연천(漣川) 삼곶리(三串里) 돌무지무덤(積石塚) (0) | 2013.06.07 |
임진강 강변길을 오르다.(임진교 - 군남댐) (0) | 2013.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