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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등마루 / 장파리(長坡里)

백수.白水 2013. 6. 21. 21:01

 

 

 

왼편으로부터 장파리 금파리 늘로리 덕천리 식현리가 보이고 멀리 자작리가 흐릿하게보이는 Wide Angle 랜즈로 찍은 사진.  

http://cafe.daum.net/yongyeun10/CO4b/282?docid=627193316&q=%B4%AD%B7%CE%B8%AE&re=1

 

37번 도로에서 본 장파리  

금파취수장에서 위로 임진강 리비교가 보인다.

 강 건너는 진동면 하포리.

 장파리 중심거리

보신탕 사주고 모델로 세웠다.

 

예스러움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농촌- 장마루

 

길은 긴 등마루로 올라선다. 고딕체의 낡은 간판. 유리를 끼워 짠 현관문. 바리캉. 비누거품을 내던 둥근 솔과 플라스틱 비누통. 분첩. 조로라 부르던 물뿌리개. 호랑이이거나 젖먹이는 돼지, 밀레의 만종과 기도하는 소녀. 국회의원 얼굴이 있는 달력. 묵직한 의자에 높이가 조절되는 목 받침. 칠이 벗겨진 의자 팔걸이. 팔걸이에 가로질러 아이를 앉히는 널빤지. 다 깎은 머리를 다듬을 때 닿는 차가운 비누 솔의 감촉. 겨울이면 연탄난로 연통에 빙글빙글 돌려 데운 비누거품, 피대에 슥싹슥싹 문지르던 면도날. 면도 거품을 스윽 문지르던 신문지 조각. 그렇게 해서 다듬어진 아이들의 머리 스타일은 하나같이 빡빡이거나 상고머리였던 옛날 이발관. 듣기만 해도 옛 이발관이 떠오르는 장마루촌 이발사.

 

동순은 한국전쟁으로 불구가 되어 장마루로 돌아온다. 황폐해진 마을에서 동순은 군대에서 배운 기술로 이발관을 차리고 주민들을 설득해 새로운 농촌을 개척해 간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놀음과 값싼 연애와 술에서 꺼내 삶의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시절을 보여 주면서 다분히 계몽적인 내용으로 진행된다. 원작자 박서림이 무대로 삼은 곳은 실제로는 장파리가 아닌 충남 서천의 신송리다. 그곳의 장마루는 전쟁 중 커다란 비극을 겪었고 그것이 소설의 토대가 됐다. 장파리는 1958년 소설을 영화로 만들 당시 촬영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영화는 장마루 거리와 이발소, 정미소 등을 오가며 펼쳐진다. 원작의 장마루가 아니더라도 전쟁은 국토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고 농촌의 모습 또한 서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50년대에 제작된 장마루촌 이발사를 실제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장파리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장마루와 이발관이라는 두 단어와 단어의 조합이 이루어내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장마루란 이름이 갖는 시골스러움에다 이제는 후미진 골목에서나 만날 법한 이발관의 결합은 영화와는 무관하게 단어의 결합만으로도 옛 시절을 추억하게 한다. 장마루촌 이발사는 영화와는 상관없이 떼어낸 이름만으로도 한 마을의 분위기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5, 60년대의 가난은 특정한 부류의 가난이 아니고 대다수 사람들의 경험이었기에 그 이름의 상징은 일반성마저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50년대 이후의 장파리는 영화 속 동순이 만들어 갔던 신농촌의 모습은 아니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조용한 시골마을이던 장마루는 서울 명동보다도 방값이 비싼 곳, 휘황한 네온사인이 돌아가는 값싼 연애와 술이 넘치는 유흥가로 변모했다. 윤락여성 소위 양공주가 7,8백 명에 이르는 환락가가 60년대 장파리 모습이었다. 무명시절의 조용필이 이곳에 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는데 그 무대인 라스트찬스 클럽 건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흑인들만 출입하는 홀을 비롯해 여러 미군클럽이 있어서 조용필뿐 아니라 많은 무명가수들이 장마루를 무대로 삼았다고 한다.

 

물론 현재 장파리는 이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다. 슬라브지붕에 간판 따위를 걸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운 길가 단층건물 정도가 당시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중 조용필이 노래했다는 라스트찬스 건물은 창고로 방치돼 있어 오히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내부에는 이집트벽화풍의 그림이 그려있다. 70년대 초 미군들이 나가면서 휘황한 네온사인은 꺼지고 미군들을 상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빠져 나갔다. 마을은 다시 50년대의 황량함을 떠오르게 했다. 소설가 박태순은 당시 이곳을 돌아본 풍경을 이렇게 말한다.

 

19729월 필자가 장파리를 찾아갔을 적에 그 곳은 미군부대 철수로 서부활극 영화에 나오는 폐허의 무법자 마을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유유하게 소달구지를 끌고 가던 노인은 말했다. “똥파리, 짱파리들이 모두 떠나버렸으니 이제부터는 쉬파리 들끓던 세월도 마감을 고하게 되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나의 국토 나의 산하중에서

 

똥파리, 짱파리, 쉬파리는 이곳의 동파리와 장파리, 금파리를 지칭한다. 노인의 말처럼 장파리는 그저 폐허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전쟁 이후 장파리 마을이 커진 데에는 단지 미군의 주둔만이 아닌 또 다른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인데 이곳 주민의 상당수가 바로 실향민들이라는 점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고향이 건너다보이는 장파리로 모여들었다. 이북 사람들이 아니라 고향을 눈으로 보고도 돌아가지 못하는 임진강 건너 장단사람들이 대규모로 정착했다. 이들은 아침에 농사지으러 갔다가 해 떨어지면 나오는 출입영농이란 방식으로 강 건너 고향 땅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강 건너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민통선은 완고해서 출입영농 신세는 벗지 못하고 있다.

 

장파리는 임진강의 범람이 만들어 낸 자연제방 위 긴 마루턱에 형성된 마을이다. 그 길이가 임진강이 닿아 있는 소개* 로부터 장좌리까지 6킬로미터에 이른다. 제방이 완연하게 솟아 보이는 구간만도 약 3킬로미터쯤 된다. 37번 도로로 장파리 근처를 지나다보면 마을이 길게 이어진 둔덕위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긴 등마루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어서 장마루라고 부른다.

 

[*. 우계 성혼선생은 1535년 서울 순화동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파주 파평의 우계에서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파산서원뒷산이 소를 닮았다하여 그 앞을 흐르는 늘노천의 옛 이름을 소개울(牛溪)이라고 불렀다. 소개는 늘노천이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곳으로 우계(牛溪)가 아니라우포(牛浦)라고 해야 할듯하다.]

 

전쟁 전 이곳은 단지 22채의 집이 있었을 뿐이다. 긴등마루로는 도로가 나 있어서 일제시대에는 서울에서 문산을 거쳐 고랑포, 개성을 오가는 버스가 다녔다. 목탄으로 움직이는 차였다. 하지만 서울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다. 고랑포 여울 아래쪽에 있는 장파리는 배를 띄우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주민들은 땔감이나 무, 배추 따위를 싣고 서울을 오갔다. 2,3백 가마를 실을 수 있는 제법 큰 배들이 수시로 오갔다. 장파리가 고향인 명영덕(81) 노인은 전쟁 전까지 몇 차례 뱃길을 오간 경험이 있다. 날이 좋으면 하루 만에 도착하고 궂은 날에는 2,3일이 걸리기도 했다. 한강하고 만나는 합수머리에 이르러서는 물때를 기다린다. 밀물이 오면 건너편 김포로 붙었다가 물을 타고 마포, 서강까지 올라갔다. 올 때는 그냥 빈 배로 돌아왔으며 임진강을 따라 그런 배들이 참 많았다고 한다. 그때 이미 임진강 철교가 있어서 교각 밑을 지날 때는 돛을 눕혀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실향민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커졌고 그 사이 미군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지금 장파리에서 미군들로 흥청거렸던 시절은 찾아보기 어렵다. 옛 거리는 색색의 예쁜 컴퓨터 글씨체 간판으로 새 단장 됐다. 예스러움에 세련됨이 덧칠된 장파리 풍경은 뭐라 말하기 어렵다. 스러져가는 건물에서도 간판만은 새롭다. 모든 농촌이 열을 올리고 있는 관광농촌 사업이 장파리에서도 진행되면서 주민들은 장파리 특유의 정취를 드러내기 위한 준비도 하는 모양이다. 장마루이발소나 미군클럽을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와 함께 장마루 커뮤니티센터에서는 장파리를 친환경탑라이스단지로 육성해 가는 것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새로운 퓨전농촌이 만들어질 모양이다. <임진강 기행 / 이재석>

 

 

그 골목엔 뭔가 있다 / 파주 장파리 상가 <2008-12-15 03>

 

 

 

 

“70년대 그대로 추억을 팝니다”

 

최소한 면사무소라도 있어야 그 주변에 몇몇 가게가 들어서는 게 일반적인 시골 풍경. 하지만 경기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는 관공서도, 유명 맛집도 없는데 상가 거리가 200여 m에 이른다. 택지지구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유독 이 마을에는 여관이며 술집으로 쓰였던 형태의 상가가 즐비하게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다방 마담은 중국동포로 바뀌어

 


13일 오후 가게 밖으로 뻗어 나온 연탄난로 연통은 느릿느릿 연기를 뿜어냈다. 가게 주인은 40여 년 동안 이발사로 일한 김희춘(71) 씨. ‘약장’이라고 쓰인 투명 플라스틱 장 안에 가위와 수동 이발기 ‘바리캉’, 빗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원래는 화초에 물 줄 때 쓰는 소형 플라스틱 물뿌리개도 이발 뒤 머리 감기용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었다.

건너편의 ‘대흥상회’는 이름만 봐서는 뭘 파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지금은 사라진 석유 풍로의 심지, 군용 양말, 파리 끈끈이, 군 전역자 기념품 등이 진열돼 있다. 군인들이 위장망을 설치할 때 사용하는 줄과 군용 양말, 군대에서 쓰던 ‘인삼비누’, 구두약 등등. 하지만 이 물건을 찾는 손님은 거의 없다. 주인 김민자(64) 씨는 “매일 군인들이 찾아와 부대에서 쓸 물건을 사가느라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었다”며 “미군이 떠난 이후 한국군 부대도 이전해 가면서 1970년대 이후 그 모습이 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마당을 한가운데 놓고 ‘ㄷ’자 모양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는 옛날 여관도 그 모습 그대로다. 영업은 하지 않지만 입구에는 ‘실종 어린이’ ‘수배자’ 전단이 붙어 있고 공동화장실 화살표도 그대로다. 다방에선 마을 노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커피가 2000원에 팔리고 있다. 도라지 위스키를 내놓던 멋스러운 마담 대신 한국말 서툰 중국동포가 노인들에게 정성껏 커피를 타주는 것이 세월에 따른 변화의 모습이다.

 

미군 떠나니 조용필도 떠나고…

 

6·25전쟁 이후 대규모 미군 부대가 마을 주변에 주둔했다. 장파리 일대는 1960년대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설 정도로 급성장했다. 클럽이 생기고, 여자 종업원이 800명을 넘어 온갖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가수 조용필도 무명시절 이 마을의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한 주민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는 서울 명동보다 이 동네 돈벌이가 낫다고들 했지. 나도 이 마을에 들어와 임차로 시작해 가게를 사고, 재산을 두 배로 늘려 집도 샀지.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허허.”

1970년대 중반 주한미군 철수가 시작되면서 이 마을은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군도 마을에서 먼 곳으로 옮겨가 경기가 되살아날 불씨는 완전히 꺼져 버렸다. 열창하던 조용필의 모습도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큰돈을 벌어 가게를 늘리고 집을 마련한 주민들은 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한 채 이곳에 터를 잡고 지금껏 살아왔다. 그 덕분에 상가들은 1960, 70년대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게 됐고 지금도 일부 가게는 영업을 하고 있다.

물론 주민들은 당시를 그리워하면서도 기지촌 이미지를 깨끗하게 지우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심정이 반영되어서인지 파주시는 올해 이 마을 상가 간판 정비사업을 벌여 현대식 디자인으로 ‘말끔하게’ 교체했다.
추억에 잠긴 주민들과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가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현대식 간판의 유일한 흠이었다.
< 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