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한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도 사로국 6촌 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에서 부족의 일을 결정했다.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역시 지(智)라는 명칭을 붙였다. 신라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인 진흥왕순수비 등 비석들의 금석문에서도 이 시대 명칭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라인의 이름은 2~4자인데 인명 속에 존칭 접미사는 항상 포함돼 있고 특히 이들 중 50%에 지(智)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이사부나 거칠부 등 신라의 명재상 이름 뒤에도 ‘지’자는 항상 붙어다닌다. 지 혹은 치는 이른바 극존칭 접미사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지’자는 신라가 율령을 반포하고 강력한 왕권국가로 발돋움한 법흥왕(재위 514~540) 이후 흔적이 사라진다. 왕의 이름에 대왕이나 태왕만 붙이고 귀족들은 관등성명만 기록됐다. 대신 치는 일반인들의 언어 생활에 녹아 들어갔다. 15세기부터 벼슬아치나 구실아치(아전) 등 관리들을 지칭하는 단어에 치가 붙었다. 갖바치(가죽장인), 옥바치(옥장인), 풀무아치(대장장이) 등 장인들에게도 이런 치를 넣어 불렀다. 이치 그치 저치 등 사람을 부를 때도 썼고 점바치 양아치 동냥치 장사치 등 사람을 얕잡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인 금관총에서 나온 둥근자루큰칼(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고 한다.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굴된 이 무덤에 대한 조사 보존처리작업을 진행하면서 밝혀졌다고 한다.
글자에서 왕을 뜻하는 마립간이나 대왕 등의 단어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과 금관 등 위세품이 함께 출토된 것을 볼 때 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지(智)자 호칭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권력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라의 극존칭어가 지금은 비칭처럼 쓰이고 있는 게 언어의 전락사인 것인지.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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