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4.30(토)
천하길지로 알려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에 다녀왔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이곳에는 원래 가야사(伽倻寺)절이 있었고 무덤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 지르고 탑을 부순 후에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부친의 묘를 옮겨 쓴 것이다.
대원군은 7년 후에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나보다 더 문외한인 아내도 묘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자리가 참 좋다고 찬탄을 한다. 묘 뒤편으로 주산(主山)인 석문봉을 비롯한 가야산의 능선들이 묘를 감싸 안아 아늑하고, 묘 앞으로 덕산쪽의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1836년에 죽은 후에 처음에는 경기도 마전현 미산면 백자동(현 연천군 미산면)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연천군 남면 남송정(南松亭, 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 큰피우개(大稷洞) 부락)에 장사되었으며, 다시 충청도 덕산현 덕산면 상가리(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개장되었다.

가야사(伽倻寺)는 가야산의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었다.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는 전하지 않으나 한때는 수덕사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1177년(명종 7) 3월에 공주 명학소(鳴鶴所)의 천민 망이와 망소이가 난을 일으켜 이 절과 황리현(黃驪縣: 지금의 여주)·진주(鎭州: 지금의 진천) 등을 빼앗았다. 또 1799년(조선 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에 금탑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으로 탑의 사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경관이 수려한 상가저수지의 모습.
중계탑이 서있는 곳이 가야산의 주봉인 가야봉(678m)이다.
뒤편 봉우리가 석문봉(653m)
옥양봉(621.4m)
상가저수지 둑에서 내려다본 남원군 묘. 기와집이 ‘남은들상여’보호각이고, 그 뒤가 묘소다.
와룡담(臥龍潭)
골담초
으름나무
‘아시아 전통성황 굿 연구원’와 ‘한국민속신문사’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고종의 등극 배경과 과정
흥선대워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은 원래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에서는 멀었으나, 뒤에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 은신군의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계동궁의 상속권 및 왕위 계승권에 근접하게 되었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당시 조정은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력의 경계를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으므로 이하응과 뜻을 같이 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첨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조선조 말 야심가였던 흥선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동 김씨 세도가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종친들은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가기가 예사이던 시절이라 흥선군은 한편으로는 파락호로, 또 한편으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 오랜 계획을 실천에 옮긴 교두보가 바로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곳으로 옮긴 일이다. 그 옮긴 장소와 옮기던 내력이 모두 숱한 뒷얘기로 남았으니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소상히 전하고, 조금씩 다른 점이 있지만 예산의 향토사가 박흥식 씨의 『예산의 얼』에도 전한다.













묘비의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라 한다.





묘지에서 내려다본 ‘남은들상여 보호각’과 그 뒤로 상가저수지둑, 그리고 가야봉의 모습이다.

묘소에서 본 상가리마을.
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지관이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한편으로는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알려 달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두번째 일은 가야사를 폐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중들을 쫓아내고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하고, 충청감사에게 중국 명품 단계벼루를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쫓아내고 마곡사의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절집을 폐허로 만든 뒤에는 탑을 헐어 내는 일이 남았다. 탑을 헐기 전날 밤 잠을 자던 흥선군의 네 형제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꿈에 수염이 흰 노인이 나와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벌인다면 네 형제가 폭사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 깬 형들이 꿈 이야기를 하니 모두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흥선군은 “그렇다면 이곳은 진실로 명당자리”라며 운명을 어찌 탑신이 관장하겠느냐고 하여 형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탑을 부수자 바닥에 바위가 드러났는데 도끼가 튀었다. 그때 흥선군이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말란 말이냐” 하고 하늘에 소리친 뒤 도끼를 내리치자 바위가 깨졌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1845년에야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곳에서 묘를 옮겼다. 뒷날 도굴의 일을 염려하여 철 수만 근을 붓고 강회로 비비고 봉분을 했다. 임시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舊壙地)라고 하여 지금도 움푹 패어 있다.
남연군 묘의 지세는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는 석문봉(石門峰)이 주산이 되고, 바라보아 오른쪽으로는 옥양봉,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청룡세를 이루고, 왼쪽으로 백호의 세는 가사봉, 가엽봉에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청산 월봉에 뭉쳐 감싼 자리이다. 동남향을 바라보면 평야를 지나 멀리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산(鳳首山)이 안산이 된다. 남연군 묘 앞에 있는 장명등 창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그 동그란 창 새로 보이는 곳이다.
또 청룡맥의 옥녀폭포의 물과, 백호맥의 가사봉 계곡의 물이 와룡담에 모였다가 절 앞에서 서로 굽이치며 흐르니 임수(臨水)의 지세도 얻었다. 가야사는 그 두 물줄기가 합치는 곳에 있었다. 금탑이 있던 자리라는 남연군 묘는 그 뒤 우뚝 솟은 언덕배기이니, 흔히 절 마당이나 법당 앞에 탑을 놓는 방식과는 달리 절 뒤쪽의 언덕에 탑이 있었던 것만도 예사 자리는 아니다. 옛 탑 자리, 곧 남연군 묘에 올라가려면 요즈음에 해놓은 층계를 꽤 걸어올라가야 하며,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시야는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남연군 묘의 산도
흥선대원군은 이 자리에 남연군 묘를 쓴 지 7년 만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載晃, 아명은 命福)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이 아이가 고종이 되었으며 그 아들이 순종이 되었으니 2대 천자를 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두 임금을 끝으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맥이 끊기고, 남연군 묘는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파헤친 바 되었으니 과연 그런 수난을 당하고 2대 천자의 결말이 그렇게 난 자리가 결과적으로 명당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오페르트 사건은 고종 5년인 1868년에 일어났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왔다.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내린 그들은 한국 천주교인을 앞세워 와서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다. 밤중에 일어난 급습이었으므로 막을 틈이 없었는데 날이 밝아오고 썰물 때가 다가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해 버렸다. 대원군이 선견지명으로 비벼 놓은 강회 때문에 정작 그다지 파헤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대원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잔존하는 천주학쟁이를 가일층 엄단하라”고 지시했으니 이땅 천주교 신자들은 또 한차례 회오리바람을 맞아야 했다. 한편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물의를 일으켜서 자본주 젠킨스는 불법파렴치죄로 기소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버렸다.
흥선대원군이 폐해 버린 가야사는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수덕사보다 앞에 들고 있어, 수덕사보다 큰 절이었던 듯하다. 형승(形勝)조에 설명한 ‘금탑’(金塔)은 “그 윗머리는 구리쇠로 씌우고 네 모서리에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걸어 늘어뜨리고 풍경을 달았다. 그 형태가 웅장하고 만든 법이 기이하고도 교묘하여 다른 탑과 다르다”고 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공주 마곡사에 있는 라마교 방식의 탑처럼 탑 상륜에 구리쇠로 보개를 씌웠는데 빛을 받으면 반사하여 번쩍이므로 금탑이라 한 듯하다. 그렇다면 고려 말기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고 적고 있다.
또 가야사 보웅전에는 철불 세 분이 모셔져 있었는데 불에 타 녹아서 쇳덩어리가 되었다. 철불이었다면 신라 하대 또는 고려 초중기의 것일 수 있다. 뒷날 봉산면의 대장장이가 파묻혀 있던 쇳덩이를 녹여 쓰려고 했으나 가루가 되었다고 한다. 남연군 묘 아래쪽의 넓은 절터는 지금 논밭으로 변해 버렸는데 군데군데 깨진 석등, 부도, 탑비 조각이 있었으나 더러는 묻히고 더러는 캐 가서 건물 자리와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석등 화사석은 보덕사에 옮겨져 있다.
보덕사
탑을 깨부수고 절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린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몇 달 뒤에 가야골 아래 상가리에 한양에서 목수를 보내어 은덕을 보답한다고 지은 절이 보덕사(報德寺)이다. 장남 재면(載冕)의 이름으로 지은 이 절은 왕실의 원찰이 된 셈이다. 규모로는 보잘것없어서 가야사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던 이 절에 있는 가야사 석등 화사석은 그나마 가야사가 어떤 절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팔각의 몸돌에는 돌아가며 창이 넷 뚫려 있고 그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귀신을 밟고 있는 형상으로 갑옷이 정밀하고 천의 자락이 날리는 품이 예사 조각과는 다르다. 석등의 몸돌만도 높이가 87㎝나 되니 전체 크기는 꽤 컸을 듯하며 형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야사 석등의 운명만 보아도 가야사가 양택으로 명당이었는지도 의문스럽다. 2대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도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까지가 왕이 되었기에 붙은 후대의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남연군 묘에 얽힌 처절한 이야기들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한 구석으로 남아 있다.
[출처] 남연군 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20쇄 2012.돌베개)
보덕사 마당으로 옮겨진 석등의 화사석에는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귀신을 밟고 있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몸돌만도 87㎝나 되니 석등의 크기도 꽤 컸으리라 짐작된다
남은들 상여
옥계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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