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김삿갓이 산골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유숙할 곳을 찾아들었는데 마침 한방에서 처와 첩을 함께 데리고 자는 사람을 만났다. 하여 아침에 익살스런 시 한수를 써놓고 떠났다고...
戱贈妻妾 희증처첩 처첩을 희롱하다.
不熱不寒二月天 불열불한이월천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이월에
一妻一妾最堪憐 일처일첩최감련 아내와 소실을 같이 불러들여 어여삐 사랑을 즐기네.
鴛鴦枕上三頭竝 원앙침상삼두병 원앙베개에 머리 셋이 나란하고
翡翠衾中六臂連 비취금중육비연 비취 이불 속에는 팔 여섯이 잇닿아 있구나.
開口笑時渾似品 개구소시혼사품 함께 웃을 때는 어우러진 입모습이 品자와 같고
飜身臥處燮成川 번신와처섭성천 뒤집어져 드러누운 옆모습이 내川자를 이룬다.
東邊未了西邊事 동변미료서변사 동쪽일이 채끝나기 전에 다시 서쪽 일을 해야 되고
更向東邊玉打拳 경향동변타옥권 번갈아 다시 동쪽으로 기울여 아름다운 몸을 어루만지네.
最(최): 가장, 제일, 으뜸, 모두, 우두머리, 모이다, 모으다, 정리되다, 끊어지다
堪(감): 견디다, 참다, 참아내다, 뛰어나다, 낫다, 맡다, 싣다, 낮다, 즐기다, 하늘, 天道
憐(련):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여기다, 어여삐 여기다, 귀여워하다, 사랑하다, 同情, 이웃(린)
衾(금): 이불 침
枕(침): 베개, 말뚝, 머리뼈, (베개를)베다, 드러눕다, 잠자다, 가로막다, 방해하다, 임하다, 향하다
臂(비): 팔, 팔뚝, 쇠뇌(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잇따라 쏘는 큰 활) 자루
渾(혼): 흐리다, 혼탁하다, 뒤섞이다, 멍청하다, 어리석다, 속이다, 온통, 순수한, 천연의
飜(번): 번역하다, 뒤집다, 엎어지다, 날다, 나부끼다, 굽다, 구부러지다, 근심하다, 사랑하다
玉(옥): 구슬, 상대편의 것을 높여 이른 말, 아름답다, 소중히 하다.
打(타): 치다, 때리다, 말하다, 사다, 세다, 더하다, 및, 와, 어떤 動作을 함을 뜻하는 접두어
拳(권): 주먹, 쇠뇌활, 힘쓰다, 소중히 받들어 지키다, 구부러지다, 근심하다, 사랑하다
김병연 [金炳淵, 1807~1863]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김삿갓(정비석의 대하소설)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 자 가량 되어 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蘭皐 金炳淵之墓라는 일곱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인용은 작가 정비석이 소설 <김삿갓>을 쓰기 위해 일흔 다섯의 노구를 무릅쓰고 김삿갓 묘를 찾았을 때의 일화 중 한 부분이다. 천재 시인 김삿갓의 묘는 그렇게 초라하게 남아있었다.
소설 <김삿갓>은 작가가 김삿갓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 번째 장의 이 같은 구성은 '전기'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소설 <김삿갓>은 소설적인 흥미와 재미로 독자들을 매혹시킨다.
김삿갓의 일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김병연으로, 1807년(순조7년) 3월 13일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 전후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이었다. 시 짓는 재주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오던 그는 고금의 시서와 사서를 닥치는 대로 섭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본시 글공부만 좋아하고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홀어머니 이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20 살 되던 해에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에 참가하게 된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1811년(순조11년) 12월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관련이 있다.
당시 가산군수였던 정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金益淳)은 국가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병연은 평소부터 가산군수 정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 이라고 존경해왔던 반면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던 터라 김익순을 탄핵하는 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장원을 차지한 그는 술 한잔 걸치고 기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집안내력을 가르쳐 주시니 반역자 김익순이 바로 김병연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삼대를 멸하라는 그 당시의 법대로 김병연 역시 죽어 마땅하였지만 어머니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도망쳐 숨어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를 들은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그의 아내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와 홀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역적의 자손인데다 그 조부를 욕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탔으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여 삿갓을 쓰게 되었고 이름도 김병연 대신 김삿갓이라 스스로 부르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금강산을 특히 좋아했던 그는 서민속에 섞여 상류사회를 풍자하는 시를 짓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살펴보며 수많은 시를 뿌려놓은 난고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마침내 전라도 동북땅 적벽강 흔들리는 배에 누워 기구했던 한평생을 회고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차남인 익균이 거두어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외로웠던 육신을 모셔 놓았다.
저자 정비석은 <작가의 말>에서 김삿갓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한국 사람치고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나 이름만 알았다 뿐이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흔히 '한평생 술이나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객사한 거지 시인'으로 알고 있기가 고작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禪) 시인이었다.
1807년 개화 초기에 당대의 명문이었던 안동 김씨 가문에 태어난 김삿갓은, 20세 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시로써 이름을 천하에 떨쳐 왔었다. 그러던 그가 자기 가문의 치욕적인 비밀을 알고 나자, 김병연이라는 본명까지 깨끗이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오직 삿갓과 죽장만을 친구삼아 거지처럼 동가식 서가숙하며 떠돌아다니다가 57세를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 자체부터가 전고에 그 유례를 찾아 보기 어려운 극적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는 남의 집 문전에서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도 슬프고 외로울 때마다. 수많은 시를 남겨 놓았는데, 그의 시는 모두 선미(禪味)가 넘쳐나는 시들뿐이어서, 시에 있어서도 독보적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삿갓은 개화 초기의 시대적인 희생자인 동시에, 한평생을 서민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웃고, 서민들과 함께 울며 살아온 서민 생활의 거룩한 고행자였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서 김삿갓의 자재 무애했던 시의 세계를 소개함과 아울러, 그가 끝없는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직접 겪어 온 가지가지 행적들을 김삿갓식으로, 풍류적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특이한 생애는 그 자체가 이미 한국적인 서민 생활의 애환이요, 해학이요, 풍자요, 익살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도 길고 문화도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반과 상민의 생활 풍토만은 근본적으로 달랐는데, 김삿갓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여 항상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해 온 유일한 서민 시인이었다. 김삿갓은 진실로 서민 속에서 자생한 위대한 생활 시인이었던 것이다."
저자 정비석이 바라보는 김삿갓은 서민의 대변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비석의 소설 <김삿갓>은, 서민들 속에 있는 김삿갓에 주목한다. 그 속에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객사한 거지 시인 김삿갓과는 조금 다른, 서민들의 애환과 풍속을 시로 승격시키는 김삿갓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 그는,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재치와 기행의 천재였다. 또한 그는 점잔 떠는 얼굴에 침을 뱉는 독설가이기도 했다. 작가 정비석은 그런 김삿갓의 거침없는 인생을, 서민들과 함께 숨쉬었던 김삿갓의 행적과 결부시켜 소설 <김삿갓>이라는 대작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출처: 한국문예위원회 - '작품전문/줄거리' 정보>
김 삿갓 노래
1,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열두대문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2,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거리 저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3, 바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개나리 봇짐지고 가는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자는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 김 삿갓 삿갓 김 김 삿갓 삿갓 김삿갓 김삿갓 삿갓 삿갓 삿갓
1807년 개화기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하여
10살 전후에 사서 삼경 독파 이십 세 전에 장원 급제 했네
안동 김씨에 본명은 김병연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둘에 처 하나
중국의 이태백 일본의 바쇼 그렇다면 보여주자 대한민국 김삿갓
백일장 과거에서 조상을 욕한 죄로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이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양반 또한 버렸네
그 후로 한 평생 삿갓을 쓰고 삼천리 방방 떠돌아 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보고 김삿갓 김삿갓 삿갓이라 하네
김삿갓 김삿갓 나는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너무 너무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 김 삿갓 삿갓 김 김 삿갓 삿갓 김삿갓 김삿갓 삿갓 삿갓 삿갓
삿갓 쓰고 죽장 짚어 바람 부는 대로 구름처럼 떠돌며
착한 서민의 친구 되어 못된 양반 혼내 준 의리의 사나이
도인에는 도 시에는 시로 맞서 시 짓기 내기에 져 본 일이 없네
산첩첩 수중중 구경하고 동가식 서가숙 방랑하네
외롭고 고독한 방랑의 생활 술은 삿갓의 유일한 친구
한 잔하면 시상이 떠올라 두 잔하면 세상이 내 것이라
한잔에 시 한 수 또 한잔에 시 한 수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김삿갓 김삿갓 삿갓 삿갓 삿갓 삿갓
김삿갓 김삿갓 나는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너무 너무 좋아 김삿갓
김삿갓 김삿갓 김 김 삿갓 삿갓 김 김 삿갓 삿갓 김삿갓 김삿갓 삿갓 삿갓 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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