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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양씨의 시조

백수.白水 2012. 8. 30. 16:28

1. 모흥혈 신화 이야기

한라산 북녘 기슭에 있는 모흥혈(母興穴)에서 땅으로 부터 세 성인이 솟아 나오셨는데 맏이가 양을나 둘째가 고을나 세째가 부을나 이시다. 그래서 이 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모흥혈(毛興穴)이라는 모(毛)자도 셋 건너 긋고 새을(乙)자를 한 글자로서 삼을나(三乙那)라는 뜻으로 모(毛)자가 쓰여졌다고 하며 삼성(三姓)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벽랑국(璧浪國: 완도라는 설이 있슴)의 세 공주님과 결혼을 하고 기름진 땅을 찾아 활쏘기로 거처할 땅을 점쳤는데 양을나의 지역을 제일도 고을나의 지역을 제이도 부을나의 지역을 제삼도라 하였다. 그 후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말과 소를 기르게 되니 백성이 날로 늘고 부유해져 갔다.

  

2. 삼 성 전

삼성전 :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의 위패를 모신 사당

소재지 :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

향사일 : 후   손 - 춘계대제(양력 4월10일), 추계대제(양력 10월 10일)

           도지사 - 건시대제(양력 12월 10일)

 

삼을나가 탄생하신 삼성혈 유적지내에 삼을나의 위패를 모시는 삼성전이 있으며 실록에는 양을나가 맏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기록에 따라서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순으로 위패가 모셔져 있다.

 

3. 양(良) 고(高) 위치(位次) 개환사건(改換事件)

탐라개국 삼신인의 위패는 삼성사 창건초기에 제1위 양을나 제2위 고을라 제3위 부을나 순으로 모셔져 있었는데 고을나의 후손이 계획하여 양을나 위패 자리에 고을나 위패를 바꾸어 모시게 되자 제주목사가 조종에 상소를 올려서 처음과 같이 바로잡았다.

 

제1위가 고을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영주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인데 영주지는 고씨 족보의 수필서이기 때문에 근거가 희박하며 동국통감, 탐라지, 여지승람, 고씨 구보서에도 제1위가 양을나라고 기록되었으니 고을나 후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현대에 와서 고씨 문중에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양성지가 고려사지리지를 편수하고 고려사를 개정하였는데 이 때 조작을 하였다는 것이다.

 

탐라시조의 내용은 고려사지리지의 기록이 우선 하는데 양성지의 인품은 사서를 조작할 위인은 아니지만 조작을 시도하였다고 해도 고려사지리지는 세종 시절에 편수하였는데 양성지는 세종시절에는 실세가 아니었으며 또한 고려사 편수자들이 공정하지 못하여 세종으로부터 벌을 받던 시절이었다.

 

탐라국은 백제로부터 제1관등의 작록을 받을 만큼 통합된 국가형태를 갖춘 시절도 있었지만 고려 초기에 탐라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고 몇 개의 부락으로 구분 되어서 각기의 군주가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고려에게도 큰 교섭력을 가지지 못하였고 탐라의 성주는 고려 조종으로부터 4~5품 작위 정도 밖에 받지 못하였다. 탐라에서 성주와 왕자라는 작위는 조선 태종 때 까지 지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 탐라국은 고려 초기에 소멸되었다. 고려와 교섭하였던 기록을 살펴보면 탐라의 성주와 왕자는 교섭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다. 1043년에서 1068년까지 고려와 5번 교섭을 하였고 성주, 왕자, 자식들이 기록되었지만 중복된 인물은 단 한명도 없다.

 

탐라는 천년왕국을 이루었고 삼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열국보다 위상이 높았으며 양씨, 고씨, 부씨가 서로 협력하여 탐라를 개국하였고 개국 당시에는 누가 더 높고 낮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씨족마다 독립된 통치지역이 있었는데 후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왕과 신하와 백성의 관계로 맺어졌던 것처럼 조작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세 씨족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천년왕국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육지의 그 어떤 열국보다도 위상을 높일 수가 없었을 것인데, 후손들은 서로가 자신의 씨족이 통합된 탐라의 국주이었다고 내세울 뿐이다. 동시대에 탐라의 여러 성주가 고려와 교섭하였던 기록이 남아서 우리 씨족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허무한 메아리로 사라질 뿐이다.

 

4. 신화를 통한 사실의 역사 찾아내기

 

 

우리 족보에서는 양을나 할아버지가 단군과 같은 시기에 탐라를 개국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그 시대의 제주도는 나라를 이룰만한 문명수준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탐라국을 건국한 세 성인은 북방에서 내려온 군장이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으며 제주도 출신으로서 현대 인문학의 거목이신 신용하 교수는 제주도 삼성신화에 나오는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의 『을나』가 고구려나 부여, 여진 등의 군장 및 왕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착안하여 양씨, 고씨, 부씨를 고구려 계통으로 파악하였다.

 

양씨는 고구려 지배세력이었던 맥족 중에 양맥족과 그 음이 통하고 고씨는 고구려 왕족의 성씨와 그 음이 통하며 부씨는 고구려 원류 성씨이었던 부여씨와 그 음이 통한다고 하여 남하한 고구려인임을 제기하고 있으며 비록 학계에서 검토 중인 단계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 족보의 기록내용 보다는 더 신뢰 받는 견해이다.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의 저자인 김성호는 양씨의 족원을 부여의 해모수와 고구려의 고주몽에서 찾고 있는데 양(梁)씨는 고구려 소수맥 유역에 살던 양맥(梁貊)의 ‘梁’과 관련된 맥족(貊族)이고 고구려 최초의 왕성이던 해씨(解氏)가 梁씨로 개성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근거에 비해 가설이 너무 앞서는 극단적인 이야기이다.

우리 성씨가 회자되고 있으니 양씨의 족원이 어떻게 되는지, 을나 할아버지의 탐라개국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우리 양문에서도 숙고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양씨의 족원과 관련하여 양맥(梁貊)족의 이 회자되고 있으니 간략하게나마 양맥을 소계 한다.

 

고조선의 종족은 동이족이라고 하며 동이족 중에 양이(良夷)족이라고 하는데 양이(良夷)는 낙랑(樂浪)이라고도 불리었고 고조선이 멸망하고 설치된 낙랑군은 그 종족명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다.

 

양맥(梁貊)의 “梁”은 양이(良夷)의 “良”이 전가된 글이고 맥(貊)족은 통칭으로 쓰일 때는 이(夷)족과 같은 뜻이니 양맥(梁貊)은 梁夷(양이) 또는 良夷(양이)가 된다. 즉 양맥(梁貊)은 고조선의 지배부족인 良夷(양이)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맥족은 고구려의 지배부족이고 양맥은 맥족의 지파이나 고구려 개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맞선 강력한 세력이었다. 주몽께서 고구려를 개국하기 이전부터 고구려 서쪽에는 양맥이 있었고 양맥과 인근 하여 고구려현이 있었는데 유리왕 때 비로서 고구려현+양맥은 고구려가 되었다. 양맥(良夷 - 梁夷 - 梁貊)과 양씨(良 - 梁)씨는 어원의 변화가 같고 인문학의 대가이신 신용하 교수께서도 양을나의 족원을 양맥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집안동쪽 압록강변에는 국동대혈이라는 암혈이 있는데 고구려 왕이 제사를 주관하던 곳으로 삼성의 신화와 유사하다고 고구려 전문가들이 이야기 하고 있고 고구려와 제주도의 옛 결혼제도가 유사하였다라고도 이야기 하고 있다.

출처 : 천 산
글쓴이 : 천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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