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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백수.白水 2012. 12. 3. 07:42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하는 사람들]

 

<사례, 하나>

우선 위서의 정의를 먼저 보도록 하죠. 위서란 책의 서지(書誌)사항, 즉 책과 문서의 형식, 체제, 성립, 전래에 연관된 사실 또는 그것을 기술한 사항(간단히 말해서 '이 책을 누가 언제 썼는가')을 조작한 책을 일컫는 말입니다. 내용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근데, 환단고기를 보면 이게 이상합니다. 간단히 환단고기의 서지사항을 살펴보면, 저자: 계연수. 연도: 1911. 형식: 삼성기, 북부여기,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모아서 편찬. 전래: 191130부가 간행되었으나 전부 소실되고 이유립이 1979년 기억을 되살려 필사해서 세상에 드러냄. 뭐 제대로하면 삼성기, 북부여기, 단군세기, 태백일사에 대해서도 서지사항을 검사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넘어가죠. 어차피 위에 것만 해도 드러나는데. 일단 전래부터 믿을 수가 없죠. 그리고 계연수의 실존도 문제인데, 계연수의 실존을 드러내는 책이 '정신철학통편''해동인물지'입니다. 문제는, '정신철학통편'에 나온 계연수에 대한 내용은 친일종교인 단군교(대종교 내의 친일파들이 떨어져나가서 만든 종교입니다)에서 말하는 내용과 완전히 똑같고, 해동인물지는 단군교의 후신인 태백교에서 편찬한 겁니다. 그리고 이 2개를 제외하면 계연수에 대해 전하는 글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환단고기에 대한 서지사항에 의심이 갈 수밖에요. 단 하나라도 거짓이면 다른 것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다음으로 진서론 쪽 반론은... 뭐 솔직히 별 거 없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보면 '환단고기 안에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증거가 있으니 환단고기는 진서다!' 이런 내용이니까요. 12. 뭐 그래도 오성취루는 반박을 하자면... 프로그램 돌려보면 오성취루가 나온다고 하는 데, 그건 오성이 28수 중에서 루성을 향해 늘어선 게 아닌 그냥 단순한 오성취합, 그냥 일렬로 늘어선 게 고작이죠. 거기에 1년 오차까지 있고.(천문학에서 1년 오차면 매장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례, 둘>

 위서는 쉽게 비유하면 방학 마지막 날 한꺼번에 몰아쓴 일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맞을지 몰라도 매일 매일 써야 한다는 정의에 맞추면 이미 일기는 아닌거죠. 그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 더 들면 사라진 역사서 구삼국사를 제가 발견했다고 합시다.해보니 내용은 얼핏 맞거나 맞을 확률 높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쓴 거죠. 알고 보니 즉 내용은 거짓이 아닐 수 있어도 책을 둘러썬 제반 상황은 거짓인거죠. 특히 저자가..이러면 위서입니다. 그리고 위서가 되면 사료로는 쓰지 않습니다.

분명 그 책이 쓰여 졌다고 주장되는 시기보다 후대에 나온 것이라

그 시절 나온 다른 책을 보고 썼고 그 책을 보면 되기 때문이지요. 환단고기 위서론의 증거는... 1. 안함로 원동중 등등의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그 책을 썼는지 아니 실존이라도 했는지가 불분명합니다. 게다가 안함로 원동중은 안함 노원 동중을 잘못 끊어 읽었다고 하죠.2. 이 책을 모았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 길 없습니다3. 그리고 계연수의 대해 전하는 이유립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스승이 토막살해 당하는 걸 봤다는 사람치고는-옹호론자들의 주장 너무 정신적으로 평온해 보입니다. 사실 그 정도라면 엄청난 트라우마로 거의 폐인이 되어야 하거든요.4. 이유립의 행적이 심히 미스터리입니다5. 게다가 이유립은 원본을 분실하고 기억력으로 재생했다고 했습니다. 대체로 이런 책들은 그냥 지가 지어놓고 기억력 드립 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6. 조선 시대 사람이 쓴 책에 단군 국조 운운 나오는데...단군이 국조가 된 시점은 대한제국부터 입니다.7. 이 책이 공개된 1979년 이전이 고고학 연구는 반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수정되거나 혹은 새로 발견된 고고학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8. 문헌사료적으로 기존 사서 짜집기가 90퍼센트 이상이고 독자 사료가 없다시피 합니다.9. 우리보다 앞서 일본이 이러한 책들을 펴냈죠. 그것의 영향을 받아 구한말 고대사 과장 서적이 나왔죠. 환단고기도 그 맥을 계승하고 있습니다.10. 단재 신채호 등의 오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11. 정작 환단고기에 나오는 천부경 삼일신고를 단재 신채호는 위서라 했습니다.

 

[위서론에 대한 반박]<필명:시크릿(manushya)>

 

1. 수서령(收書令).

수서령이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 성종 때 8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예로부터 전해져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 이 서적들은 전하지 않지만,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담고 있는 책들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서령이 내려진 책들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이 발견됩니다.

 

○ 세조 3년 5월 26일 (무자)
8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 · 대변설 · 조대기 · 주남일사기 ·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 안함노원동중 삼성기… 1백여 권과 동천록 · 마슬록 · 통천록…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위 東國輿地勝覽 首陽山城 조에는 "세간에 전해 오기를 안함, 원노, 동중 3인이 산 중에 땅을 택하여 수양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또 옛 고죽군의 터가 남아 있다.(世傳昔有安含元老董仲三人卜地以築之山中又有孤竹郡遺基"라고 적혀 있다. 한.중 고대사에 조그마한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이 문구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黃海道 海州牧 관내는 伯夷,叔齊가 굶어죽은 首陽山 자리가 아닐뿐더러 옛 고죽군孤竹郡 자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국여지승람에 적혀 있는 首陽山城 문구에 나오는 안함, 원노, 동중 3인 운운 내용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문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조실록 3년조에 나오는 [安含老元董仲三聖記] 문구가 桓雄, 桓仁, 王儉에 관한 傳記가 아니고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安含, 老元, 董仲 3 聖人의 기록]이라면 안함, 노원, 동중 3 聖人의 傳記는 민간에 널리 알려 민간이 본받도록 해야지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운운"하는 이런 어명을 내릴 일이 아니다

 

▶ 삼성기를 해주海州에 수양산성을 쌓은 3 승려에 관한 傳記라고 주장하나, 그런 서책이라면 古記 수집과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서책을 수거하는 수서령收書令에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삼성밀기三聖密記는 환인,환웅,단군시대의 해와 달 숭배사상, 하늘에 제사지내는 祭禮, 土俗信仰, 天壇 설치 등 葬祭에 관한 내용 등이 들어 있어 삼성기三聖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기 등 古記가 금서에서 풀릴 때도 圖讖, 天文.地理.陰陽 서적류 등으로 분류되어 금서 목록에서 풀리지 않았습니다.

 

▶『세조실록』에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 적힌 것은 안함로와 원동중 두 사람이 『삼성기』를 지었음을 뜻한다. 『세조실록』의 다른 구절“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몇 사람인지 혼동할 여지가 있는 경우 『세조실록』은 사람 숫자를 표기하였다. 이로보아『삼성기』의 저자는 그 두 사람이 분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역사서가 아닌 지리지다.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1530)』보다는 역사서인『세조실록(1455~1468)』이 신뢰도가 높고, 시대적으로도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립이 먼저 확인된 다른 책들을 배꼈다는 논리와 안맞는다. 더구나 『세조실록』이 후대의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 신라 십성은 도, 위촉, 안함, 혜숙, 의상,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입니다. 그중에서 표훈과 안함을 댓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훈삼성밀기 옆에 안함로,원동중 삼성기의 안함은 안함이던 안함로이던 신라 십성중 한명인 안함입니다. 수양산성을 쌓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가정은 이유립씨가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을 보고 안함로,원동중이라는 이름으로 없는 삼성기를 적었다는 가정하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오형기 필사본(1949)도 그렇지만 환단고기 책(1979년 광오이해사본)이 나오기전에 봤다?이유립씨는 그의 행적,재정 등을 고려했을때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 삼성기'라는 기록을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말이 안되는 중상모략인거죠.

 

2.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에 나와 있습니다. 계연수 선생님의 기록이 하나도 없었다면 큰일날 뻔했네요. 그리고 이유립 선생의 증언 등을 통해서 계연수 선생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태클 거는 분이 계시는데요 . 1920년에 나온 정신철학통편에 계연수가 나오는 것은 14살의 어린 이유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 책에 개입을 할 수도 없구요. 친일로 매도한다고 책에 나와 있는 것이 없는것이 되는건 아닙니다. 실존이라는 것이 관계도 없는 내용으로 매도하고 있죠. 그러지 마시길.

지금 모든 것은 이유립씨가 조작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기때문에 스스로 그 의혹속에 빠질뿐입니다. 이유립 선생의 증언에 대해서 그것이 허위라는 증언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1864~1920)와 스승 이기(1848~1909)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입니다.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입니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에게서 구하였습니다. [단국세기]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의 소장본이었습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인데 헌종 6년(1840)에 식년시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습니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학 이기와 운초 계연수 초상화>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습니다. 이기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5세 때 향시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습니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류하였는데, 석정 이정직(1840~1910), 매천 황현(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三才라 불리었습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건창(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습니다.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습니다. 1894년(고종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습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 어윤중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나철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 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 해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습니다. 또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자급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등과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습니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이암의 현손으로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태백일사]가 가보로 전해졌기에 이기는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기의 지도와 감수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최종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두 책이 전하는 내용도 몇 가지 큰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해동인물지]는 계연수의 자는 인경人卿, 호는 운초雲樵 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의 책을 섭렵한 후 1890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등을 간행하였다고 전합니다.

 

 

<정신철학통편 1920년 발간 >

 

<해동인물지 1969년 발간>

 

하지만 이 기록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계연수는 1890년이 아니라 1911년(辛亥)에 책을 발간하였고,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를 환단고기에 함께 묶어 간행하였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필자가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 회장인 양종현(1948~)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계연수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897년(34)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습니다.

1909년 대영절(3월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 해 5월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그 자리에 참여 하였습니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서문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1943)와 오동진(1865~1930)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습니다.
 


<홍범도 와 오동진>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三一心法(태고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습니다.

 

1912년 49세 임자 5월에 광개토대왕성릉비 징실고를 발표하였다. (아래 내용 참고)

 

1914 (51세) 3월 16일 대영절에 단해 이관집 석천 최시흥 송암 오동진 백하 전효운 벽산 이덕수 일봉 박응백 창춘당 양승우 직송헌 이용담 국은 이태집 녹수 서청산 백주 백형규 등 12 선인과 더불어 삭주 천마산에서 제천 혈맹을 거행하고 역사회복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습니다.

 

이듬 해 1915년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구에 배달의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별파대, 기원독립단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 지 10여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 8호까지 발간하였습니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습니다.

 

 

1919년 조선인의 십보장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해외에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들이 마음에 새겼던 십보장을 소개한다.

 

(1) 우리는 조선인이다. 세계 인류와 함께 평등하며 신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기본 권리를 버릴 수 없다.
(2)우리는 환웅천왕님이 처음 태백산에 천강하옵신 목적과 사명을 오늘도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3)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져야 하므로 어떠한 폭력에 대하여 우리의 원칙과 주장이 좌절될 수 없다. (4) 우리는 조국의 주권과 국토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의 일체의 행동을 방관할 수 없다. (5) 우리는 일본의 무력침략과 또 그 외에 방조하는 구미 열강들의 외교사상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6) 우리는 모든 파당과 차별을 초월하여 오직 항일투쟁의 통일강화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7) 우리는 국권회복의 목표를 세우고 오직 현실의 지평선에서 모든 물질과학의 전 분야를 하나에의 길로 이끌어서 먼저 민족의식의 귀일을 사회적 조직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8) 우리는 적의 어떠한 굴욕과 속박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찾고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9) 우리는 끝까지 국토를 지키면서 조선인이 먼저 외국의 침략세력에 대한 치욕의 역사와 오늘의 비참한 생활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다. (10) 우리는 매일 아침 마음속으로 성지 백두산을 향하여 염표문을 외우고 가족과 함께 전곡사백이 저축으로 항일운동을 돕지 않을 수 없다

.

신시개천 5860년 3월 16일 (서기 1919) 리상룡,계연수,홍범도,신채호,리탁,최시홍,오동진,리관집,리덕수,김효운,편강렬,량승우,최석준,허경호,박룡담,리봉우,리태즙,주상옥,라창헌,박웅백,최지풍,리용담,김병수,서청산,백형규,김황석,리동규

 

광무 23년(1919) 기미년 3월 대호산 만세에 참가, 같은 해 3월 16일 이상룡, 홍범도, 여운형, 신채호, 이탁, 최시흥, 오동진, 이관집, 이덕수, 전효운, 편강열, 양승우, 최석순, 허기호, 박용담, 이봉우, 이태집, 주상옥, 나창헌, 박응백, 최지풍, 이용담, 김병주, 서청산, 백형규, 김활석, 이동규 등 24인 서명으로 [朝鮮人 十寶章]을 발표하고 4월에 이상룡 막하에서 군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 (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당시 밀정을 파견한 위순사감독 감영극(감연극)은 조선역사를 고취하는 놈은 일본의 대동방 평화정책을 방해하는 것이니 모두 잡아 없애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양종현-백년의 여정, 106쪽)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66쪽~ 71쪽)>

 

 

3. 왜 폐인이 되야하죠? 어이없는 답변입니다.

오히려 환단의 뿌리 역사를 전해야 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한 계기가 됩니다. 사람마다 큰 충격을 주는 사건에 대한 반응은 다릅니다.


4. 어떤 행적? 그의 행적은 다 밝혀져 있습니다.

 

[환단고기]를 대중화시킨 이유립 (1907~1986)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계연수의 토막 난 시신이 수습될 때, 그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14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었습니다.이유립은 계연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릴 뻔했던 [환단고기]를 굳게 지켜 오늘의 한국 사회에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입니다. 이암과 이맥의 후손인 이유립은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관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세 살 때 천자문을 익힌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읽다가, “漢武帝討滅地(한무제토멸지)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이 나는 싫다하고 동몽선습을 더 읽지 않았는데, 듣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특이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유립은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눈을 뜬 것입니다.

 

 

이유립은 13세 때(1818) 배달의숙에 들어가 계연수와 최시흥, 오동진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역사 강의를 듣고 [환단고기]를 공부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단원을 통솔하는 단장이 되었습니다. 그 해는 계연수가 일제의 칼날에 참혹하게 도륙되던 해로, 그 무렵 이유립은 소년통신원으로도 뽑혀 독립군 사이의 통신 연락을 도왔습니다.

 

이유립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24세 때는 해학 이기의 신교육의 뜻을 이어받아 삼육사를 조직하고 잡지 <삼육>을 발행하며 일제의 역사 왜곡을 널리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일제는 7월호의 내용을 문제삼아 <三育>을 폐간시키고 삼육사도 강제로 해체하였습니다. 33세에는 신풍학원을 세워 교사로 종사하며 학생들에게 조선의 얼과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창씨개명 불응, 무궁화 심기 운동 등을 이유로 들어 이마저도 중단시켰습니다.

 

1945(39) 광복을 맞은 후, 배달의 건국일인 103일에 단학회 동지들과 천마산에서 8.15 해방 경축 천제를 올리면서 단학회 기관지<태극>의 주간이 되었습니다. 이 잡지 역시 다음해 1월 신년호에 신탁통치 반대론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발행이 금지되고 말았습니다.

 

광복은 되었으나 여의치 않은 활동 여건 때문에 이유립은 1948 5월 월남을 하다가 안내인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해주 내무서에 수감되었습니다. 4개월여에 걸친 수감 기간에 고문과 급질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소생 기미가 없자 내무서 인근에 버려졌습니다. 다행히 폭우 속에서 정신을 차린 이유립은 추석 바로 다음 날에 어렵게 삼팔선을 넘었습니다. 그 후 북한을 두어 차례 다녀왔는데, 이때 [환단고기]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월남하여 친척집에 살다가 1963(57)에 대전 은행동에 정착하였고, 그 해 11월 단학회를 단단학회로 개칭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유립이 남하한 직후,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그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였습니다. 현 단단학회 회장이자 이유립의 제자인 양종현에 의하면, 오형기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환단고기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1949년에 오형기는 이유립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을 빌려 가서 필사하였습니다. 이때 오형기가 책의 말미에 발문을 붙여 썼는데, 책을 지은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인 발문을 오형기가 임의로 쓴 것에 대해 이유립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대전시 은행동 107번지 이유립 선생 생가>

 

이유립은 대전 은행동 자택에 단단학회 본부를 두고, 1965(59)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사 관련 저술과 더불어 역사 교육을 실시하고, ‘국사 광복을 외치는 전단도 만들어 돌였습니다. 이후에 간도 땅문제에 관심이 컸던 박창암(1923~2003)과 연결되어 1976(70)부터 월간 <자유>에 역사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채우며 [환단고기]가 전하는 우리 역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1976년은 이유립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합니다. 박창암의 배려로 의정부로 올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백내장 수술 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에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로 알고 밀린 집세 대신으로 이유립의 책을 모두 팔아 버린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던 [환단고기] 초간본도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오형기 필사본이 있었기에 [환단고기] 전수 맥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환단고기]대중화의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유립의 젊은 문하생 조병윤이 1979년에 서울에 있는 광오이해사에서 오형기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입니다. 이른바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되자,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사태 수습 차원에서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원고는 1979년 그 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를 발간하였습니다. 이유립의 나이 77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평생 지키고 외쳐 온 [환단고기]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공표한 것입니다.

 

그런데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전, 일본어로 번역된 [환단고기]가 일본에서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가지마 노보루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검토하다가 [환단고기]를 동북아 역사와 일본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책이라 여기고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가지마 노보루는 한문으로 적힌 [환단고기]를 번역하려고 고심하던 중 박창암과 인연이 닿아 한국을 방문하여 이유립을 대면하였습니다. 그 후 이유립이 우리말로 풀이하고 주석까지 붙인 [환단고기]원고를 박창암에게서 받아 본 후, 마침내 1982년에 실크로도 흥망사라는 부제를 붙인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동경에서 출간하였습니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아시아의 至寶라 극찬하였습니다. 하지만 번역에 오류를 범하였을 뿐 아니라 책의 핵심 내용을 훼손하고 왜곡시켰습니다.

 

환국->배달->고조선->북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대진(발해).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지는 한국 역사를 배달->야마토일본->나라일본->헤이안시대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로 둔갑시켜 번역하였고, 동방 한민족의 역사가 중동 유대족의 역사에서 발원하였다는 황당한 주장도 하였습니다.

 

그때 국내에서는 이유립, 임승국 등이 수년 동안 <자유>에 우리 고대사를 연재해 왔고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미 출시된 터라,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신교 문화가 조금씩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쓴 [환단고기]가 역수입되자, 한국 역사학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일반 대중도 환단고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유립은 군인과 일반인을 상대로 역사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다가 80(1986)를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이유립은 평생 동안 일신의 영화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 광복에 매두몰신하였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헌신하며 [환단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린 한암당 이유립! 그는, 환단고기의 모든 글을 감수하고 조선의 망운에 목숨으로써 답한 해학 이기와, 환단고기를 처음으로 발간하고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운초 계연수, 두 분과 마찬가지로 국사학의 대부입니다. 이분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오늘날 한민족의 정통 사서 [환단고기]를 볼 수 있고, 9 천 년 한민족사의 정통 맥과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71~ 76)

다시 요약정리해봅니다.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 연보

 

1907년 음력 11 14일 묘시에 평안북도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학령산 아래 청학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輯)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 또는 중정 호는 한암당 또는 정산초인,단하산인,호상포객,단학동인

 

세 살(1909)부터 어머니(태천 백씨)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6(1912)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8-9(1914-15) 송암 오동진 장군에게 노래를 배우고 조련 실습을 받음.

 

13세 때인 1919 4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吳東振)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14)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18(1924) 1924 4월 삭주읍 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그해 2학기에 4학년으로 진급 .
1927
3월에 6년제 졸업 . 재학중에 삼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김병선과 함께 매일 오후 방과후 2시간씩 역사와 상식을 강의.

 

21(1927) 1927년 신간회 삭주지부를 최석홍,김호원 등과 함께 발기하였다가 해산을 당함.

 

24세인 1930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回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종지를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 7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비문징실은 아래 참고) 1932 3월 기소 중지되고 그해 10월에 우리들의 노래사건으로 한때 구금된 일도 있음.

 

<1931 3 2일자 동아일보 >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12항을 이유로 고발당함. 결국 군수 독고휘의 명령으로 신풍학원이 폐쇄됨.

 

35(1941) 삭주 출신의 당시 21세인 신매녀와 결혼

 

39세인 1945 4월 건국동맹 평북책 이우필의 권유로 삭주책을 맡음. 그해 8월초에 전봉천의 대동아전쟁거부론철시사건과 관련 구영포 헌병대로부터 소환당하는 중에 8.15 광복을 맞이함. 10 3일 천마산 제천대회에서 8.15광복 봉고제를 거행함과 함께 이용담 선생이 주재하는 단학회 기관지 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 1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특별 경비사령부 삭주 파견대에 구금되고 태극은 폐간당함. 41세인 다음해 3 9일에 출감.

 

42(1948) 1948 5 2일 월남 도중 해주 소재의 내무국 보안 제7대 정보과에 구금됨. 그해 9 4일 출감. 그해 음력 8 16일 밤 10시경 폭우속에서 총성을 들으며 삼팔선을 넘는데 성공.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59(1965) 1965 4월 기관지 <커발한> 발행

 

현제 단단학회 회장인 양종현은 이유립을 1967년 고등학생 시절부터 약 20년간 모시면서 역사를 배웠다.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란 비난에 대해서 그는 환단고기 초간본을 좁은 방에서 스승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배운 기억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결코 위작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환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대영절(大迎節. 3 18) 개천절( 10 3)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7(1973) 1973 3 10일 대동문화사에서 [광개토성릉비문 역주] 간행

 

69(1975) 1975 5 8 [세계문명동원론]을 미국의 하버드.워싱턴,콜롬비아,하와이,캘리포니아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감.

 

70세인 1976 3 16 [커발한 문화사상사]를 발간. 그해 10 8일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영.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름장마철(8), 환단고기 초간본을 분실. 군산 공안과에 백내장 수술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책을 팔아버림.

 

<1978년 10월 22일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와의 대담>

 

75(1981) 1981년 한미연합사에서 초청강연

 

77(1983) 환단고기 배달의숙본 간행 1983 <자유>지에 게재된 글을 모아 [한암당 이유립사학총서]펴냄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

 

"이유립은 말년에 매우 가난했다. 1985년 8월 10일 그를 찾아간 박정학(치우학회장)에 의하면, 그는 김포읍 산자락의 새로 지은 집에 거처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하는 처지였다. 당시 이유립의 가족은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부인은 군산에, 막내 딸은 대전에 살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박정학 등이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주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살게 했다. 이후 그는 집필에만 전념, 고려원에서 대배달민족사를 발간한다."

80 (1986) 4 18일 새벽 1시 강서구 화곡동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출처 : 양종현 백년의 여정 등>


 5. 

1949년 오형기 필사본이 있었고 이 필사본을 통해서 오형기 발문이 붙은 광오이해사본이 출간됩니다(79년) 이유립 선생은 필사를 한 사람이 발문을 썼다며 불쾌해하였다고 합니다.
(위서론자는 모든 것이 거짓으로 보이기때문에 이런 내용도 지어냈다고 하겠죠)

그후 이 필사본과 달랐던 내용을 기억하여 오형기 필사본의 틀린 부분을 수정한 것입니다.

오형기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이 돌아가셧을때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환단고기>의 판본 문제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이유립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吳炯基였습니다. 오형기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환단고기>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1949년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한 후 발문跋文을 써 붙였습니다.(아래 참고) 그러나 책을 지은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인 발문을 오형기가 임의로 쓴 것에 대해 이유립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 필사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유립의 문하생 조병윤이 1979년에 서울의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에서 이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입니다 이른바 ‘광오이해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된 것입니다.이에 사태 수습 차원에서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습다. 원고는 1979년 그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가 발간하였습니다.

 

 6.

단군은 고려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져왔습니다.

 

삼국사기 : 선인왕검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1(247) 조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왕험(王險)성에 도읍했다고 하였다[或云王之都王險]”라고 전한다. 여기서 선인 왕검은 곧 단군으로서 단군의 왕험성 도읍에 관한 다른 기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구당서 : 가한신구당서(舊唐書)’ 고구려 조의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는 기록에서 기자신 앞의 가한신이 단군이다.흉노, 돌궐 등 유목민족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선우, 가한이라고 표기하는데 이들 단어는 모두 단군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당시 단군조선의 제후였던 이들이 자신들의 호칭을 천자인 단군으로 쓸 수 없으니까 단군을 변형시킨 선우, 가한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삼국유사 ,제왕운기일연이 삼국유사 왕력(王曆)에서 고구려 시조에 대해 성은 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쓴 것이나 이승휴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시라(尸羅·신라고례(高禮·고구려남북옥저·동북부여·(((·백제) 등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세계(世系)는 역시 단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고 쓴 것처럼 단군은 민족사의 시조였다.

 

조선시대 단군인식

이런 인식은 조선 때도 연면(連綿)했다. 조선은 개국년(1392) 8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라며 제사를 지내게 했다. 영조는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영조실록’ 41128)”라고 말했고, 정조는 우리 동방의 개국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정조실록’ 16812)”라고 말했다. 이처럼 개국 시조=단군은 조선에서도 하나의 상식이었다.

 

무씨 사당석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 있는 무씨 사당에 있는 석실 벽화이다. 무씨 사당은 서기 147년 중국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 졌다. 뒷날 강물이 범람하여 땅에 묻힌 이 사당은 18세기 후반에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전한(기원전 202~기원후 24)때 만들어진 무씨사당의 석실 화상석의 그림은 그 내용이 단군신화와 흡사하다. 이 화상석을 군신 치우의 전투도라고 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는 단군신화와 유사함 내용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1,200여 년 전에 발해 연안에 알려져 있었음을 뜻한다.

 

 

(그림1)은 환웅이 환인에게서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으로 내려오는 장면이다. 오른편 위쪽에 있는 두 사람이 환인과 환웅이다. 사이에 있는 천사가 쥐고 있는 구슬 3개는 환인이 환웅에게 준 천부인이다. 가운데 날개 달린 말이 끄는 마차는 환웅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래쪽을 보면 가운데 환웅이 두 무사를 거느리고 있고, 그 옆에는 둥근 산봉우리 세 개가 보인다.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로 천사가 막 내려오고 있다. 이곳이 태백산 봉우리이다.

 

(그림2)는 풍백, 운사, 우사를 그렸다. 왼쪽에 바람신인 풍백이 있다. 구름 위에 앉아 깔때기를 입에 대고 한바탕 바람을 불려고 하고 있다. 그 옆에는 벼락 신(운사?)이 여섯 동자가 끄는 수레에 앉아 있다. 벼락신은 두 손에 각각 망치를 쥐고 양쪽에 있는 북을 치고 있다. 구름 속에 떠 있는 벼락 신 수레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여섯 동자 앞에는 크고 작은 두 사람이 한 손에 병을 쥐고 있다. 한 사람은 달려가고, 또 한 사람은 병을 쏟으려 한다. 틀림없이 비를 관장하는 우사이다.

 

고구려 각저총 벽화

 

고구려의 각저총 고분 벽화에는 씨름하는 두 명의 역사 곁에 있는 큰 나무 밑둥 좌우에 곰과 범이 짝을 이루며 등장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단군 사적의 주요 내용을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신단수로 추정되는 큰 나무위에 새(새는 하늘을 상징하는데 당시 하늘은 배달국의 천황인 환웅이었음)가 있고 나무를 맞대고 두 마리의 짐승이 등을 돌리고 서있는데 그 짐승이 바로 곰과 호랑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장천 1호분 고분벽화장천 1호분 고분벽화를 보면 단군신화를 암시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면 아래쪽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사냥을 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사슴과 멧돼지호랑이 등 잡는 동물의 숫자도 많습니다. 또 개가 사냥에 따라 나서고, 사냥하는 사람 거의 모두가 말 위에서 활을 쏘아 맞춥니다. 다만 왼쪽 나무 아래에 있는 남자는 화살에 맞은 채 도망치는 멧돼지를 잡기 위해 다시 활을 당기고 있네요. 여기에 곰은 나무 밑 움에 숨어 있고, 뛰쳐나온 호랑이는 사냥꾼의 사냥감이 됩니다.

 

<고구려 장천 1호분 고분벽화 수렴 모습(). 아래쪽 확대한 모습 (곰과 화살맞은 호랑이)

 

구월산 삼성사

 

일연 탄생 이전에 (고려 목종 9(1006) 이전에) 이미 구월산에는 환인(桓仁환웅(桓雄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三聖祠)’가 건립되어 있었다. 이로서 단군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이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살아있는 한국사1 -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6.10.02 조선일보 중에서 등

 7.  

요하문명 등 여러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습니다.그 내용은 환단고기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홍산문화(요하문명)이 우리 한민족의 상고시대 도시국가라는 증거

 

1. 적석총 - 장례문화는 민족의 고유 사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돌무지무덤'이라불리는 적석총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무덤형태입니다. 중국한족은 토광묘를 씁니다.

 

<우하량 적석총 복원도 :우하량 근처에서 발견된 한변 100m의 거대한 적석총,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천년이 앞선다. 거대한 건축믈들을 쌓으려면,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과 사회분화가 이루어진 강력한 제정일치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2. 수암옥 - 홍산과 흥륭와 문화(BCE 6200년)에서 발견된 옥기의 재질은 수암옥입니다. (압록강 바로 위, 수암) 같은 요하문명인 흥륭와에서 나온 옥귀걸이와 동일한 형태가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 6천년경으로 추정되는 발견된 흥륭와옥귀걸이, 사해옥귀걸이, 고성문암리 옥귀걸이의 모양이 모두 같은 것은 그 당시 이 세지역이 서로 단일 문화권이라는 증거이다

 

3. 웅녀상 - 곰을 大地의 神으로 인식한 것은 한민족 고유의 토템입니다.

 

* 웅녀상은 여러 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상신 숭배로 보여집니다. 웅녀국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되며 특이한 것은 여신상이 너무나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것인데, 이것은 '神化된 인간'을 숭배한 것으로 인격신을 섬겼던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도 맞습니다.

 

 

4. 용봉문화 - 천자문화와 연관되있는 것으로 '채옹'도 인정했듯이 천자문화는 한민족으로부터 나온 문화입니다.

 

 

5. 역사기록 - 요하문명이 나온 곳은 후에 고조선의 강역입니다. 고구려때까지 우리 땅이었던 곳으로 상고시대부터 우리 한민족의 주 활동무대입니다.

이 곳에 도시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너무도 당연히 환단고기에 나오는 배달국 신시밖에 없습니다.

 

 

6. 유전자분석 - 홍산문화에서 나온 유골을 mtDNA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낸 35.71%가 16172라는 하위 변이에 속하며 이는 중국한족에서는 잘나타나지않고, 대부분 우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나타나는 변이입니다. 실제로 현대 한국인중 일부는 이 유전자변이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만약, 'N9a-16172'라는 유전자변이형태를 가진 분이 있다면 이분들은 웅족의 직계후예입니다. ^^ 우리나라에는 6~7%가 N9a이라는군요.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유골 mtDNA분석 결과 http://yayul.egloos.com/2426041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 徐子峰 교수

 

7. 빗살무늬토기 - 중국학자들은 황하 지역과 전혀 다른 요서 지방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이 빗살무늬(지(之)자문) 토기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학자 '왕혜덕'이나 조선족 대련대학 '유병호' 역시 요하문명의 특징은 빗살무늬 토기와 조상 숭배 풍속이며, 대련대학 '설지강' 역시 흥륭와 문화의 특징은 빗살무늬(지(之)자문) 토기라고 주장하였다.

 

중국학자 '풍운학'은 지(之)자문(빗살무늬) 토기는 요서 일대(요서 문명)와 흑룡강 중·하류 지역, 한반도, 일본 등지에서 발굴되는데 이들은 모두 같은 문화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는 중국 중원의 황하 일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북방 계통의 문화이다. 요하 문명의 주도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빗살무늬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결국 BC 6000년 당시 부터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요서 지방과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결국 예·맥족(고조선과 고구려)으로 이어졌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출처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7) - 빗살무늬 토기문화 경향신문 2007년 11월 16일>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습니다.

 


< 6천년전 반가부좌하고 있는 여신상 & 5천 3백년전 남자 수행상 >

 

이 지역의 이 시대는 고조선이전 배달국 환웅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환웅은 수행과 영성문화의 모델이었음은 삼국유사나 환단고기를 통해서 그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

 

책상다리,양반다리,결가부좌(結跏趺坐)는 우리 배달민족 만의 고유한 좌식생활 양식이었습니다 환국,배달국,고조선을 거치면서 구들문화가 점차 발전하였고, 뜨거운 아랫목에 방석을 깔고앉는 좌식문화가 정착되면서 책상다리,가부좌 틀기가 자연스럽게 생활화한 것입니다.

 

인도,중국,일본 등지에는 원래 온돌문화가 없었습니다. 차디찬 맨땅이나 마루바닥에 엉덩이 대고 앉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방석문화나 가부좌식 주거문화가 출현할 리도 없었습니다. 찬 마루나 의자에서 생활해야 하는 민족이 굳이 힘들게 조그마한 방석에 올라앉아 가부좌를 틀어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입니다.


擇三七日하사 祭天神하시며 忌愼外物하사 閉門自修하시며 呪願有攻하시며 服藥成仙하시며 劃卦知來하시며 執象運神하시니라

 

(환웅께서) 삼칠일을 택하여 상제님께 제사지내고 바깥일(外物)을 꺼리고 삼가 문을 닫고 수도하셨다. 주문을 읽고 공덕이 이뤄지기를 기원하셨으며, 선약을 드시어 신선이 되셨다. 괘卦를 그어 미래의 일을 아시고, 천지변화의 움직임(象)을 파악하여 신명을 부리셨다.(執象運神) <역해譯解 : <환단고기>‘삼성기’, 안경전 역주, 18~19쪽>


 8. 그렇지 않습니다. 근거를 대주시기 바랍니다.사례를 하나 들어보죠

 

중국 하나라의 멸망과 은나라 건국에 관한 단군세기 기록입니다.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우리는 단군조선의 의중에 따라 하나라와 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신빙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조선)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위 <단군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설원의 기록은하은 교체기에 성탕이 포악무도한 걸왕을 내쫓고 은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두나라 간의 패권 싸움에서 성패의 관건을 쥐고 있던 구이 곧 단군조선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준다.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그러나 이런 중국 사서와 비교해서 환단고기가 입증되는 내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보면 어떻게 보시나요?

" 아 . 이유립이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을 보고 단군세기를 지어냈다! 아 위대한 발견!" 머 이렇게 생각하시는건 아니겠죠?

9.

그렇지 않습니다. 근거를 대주시기 바랍니다.

 

10.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상고사]와 [환단고기]의 관계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뻬낀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문화로 상세하게 기술 되어있습니다.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상호 17세손'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는 700년이고 광개토태왕은 추모왕의 13세손'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이러한 부정확한 내용을 비판합니다. 즉 [삼국사기]에서 부정한 [신당서]의 기록 '가언충의 구구려 900년 유국설'을 근거로 할때 [삼국사기]는 고구려 역사 200년을 삭감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를 보면 그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집니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상호 17세손'의 내력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환단고기를 통해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천제자인 제1세 해모수->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 -> 제3세 고진의 아들 -> 제4세 옥저후 불리지 -> 제5세 고주몽--- 제 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으로 정립됨으로써, 고구려 900년 유국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조선상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데 그친반면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 기록의 본래 진실까지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 없는 낭설일뿐입니다.

- 글출처 : 환단고기 완역본(상생출판 97p~98p)

 

 

11.

단재 신채호가 천부경을 위서라고 말했던 사건의 전말

我國은 古代의 眞書를 焚棄한 때(李朝太宗의 焚書같 은)는 있었으나 僞書를 造作한 일은 없었다. 近日에 와서 天符經三一神誌등 이 처음 出現하였으나 누구의 辨駁이 없이 古書로 信認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我國書籍은 各氏의 族譜중 그 先祖의 事를 혹 僞造한 것이 있는 이외에 는 그리 眞僞의 辨別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接壤된 隣國인 支那, 日本兩國은 從古로 交際가 頻繁함을 따라서 우리 歷史에 參考될 書籍이 적지 않다. 그러나 僞書많기로는 支那같은 나라 가 없을 것이다. 僞書를 辨因치 못하면 認證치 않을 記錄을 我史에 認定하는 誤가 있다 .104)

104)『조선일보』, 1931년 6월 18일 . 조선사 8. 이 글이 『조선 일보』에 연재될 당시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 북경 회의 ’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여순 감옥에 갇혀 있던때이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천부경 인식이 바뀐 것은 1931년이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난 것이다 . 이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게 된 것은 당시 『조선 일보 』사장이던 안재홍이 어렵게 사는 단재부인을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연재했던 것이다 .

신채호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위서를 조작한 적이 없었는데 『천부경』『삼일신고』에 대해서 고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회분위기를 지적하면서 위서로 말하자면 오히려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천부경』이 후인위조라고 했던 처음의 주장을 뒤집어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고대의 경전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학계에서는 신채호 글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我國은 古代의 眞書를 焚棄한때(李朝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僞書를 造作한 일은 없었다. 近日에 와서 天符經三一神誌등이 처음 出現하였으나 누구의 辨駁이 없이 古書로 信認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라는
부분만 발췌하여

신채호가 『천부경』을 위서로 비판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채호는 우리가 비록 진서를 태운적은 있어도 위서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천부경』과 『삼일신고』역시 변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서로 몰고 있는 사회분위기를 개탄한 것이다.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석사학위논문 '일제강점기의 천부경 연구' 이숙화 논문 2008.2 中

 

위의 내용을 보면, 신채호 선생은 결코 천부경을 위서라고 한적이 없다는걸 알 수 있다. 왜 자꾸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발췌해 보면서 환단고기를 위서라 우기는지 이해를 할수가 없다..

 

 

 

12. 아 그러세요? 천문학에서 1년 오차면 매장당해야죠ㅋ 그런데 그게 과거 고대사를 다루는 사서라면 그건 대단한겁니다. 왜 천문학자들은 오성취루를 보고 조작할 수 없는 증거라고 말하는것일까요?

 

박석재 "천문학자의 양심을 걸고 오성취루는 조작할 수 없습니다"

EBS 박석재 강의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9uXo9075Vq8

 

 

환단고기 단군세기 오성취루 현상 천문관측 프로그램 실연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2012년>
재위 50년 무진(BCE 1733)년에 오성이 누성에 모이고 황학이 날아와 금원의 소나무에 깃들었다.재위 61년 기묘년(BCE 1722)년에 흘달 단군께서 붕어하시자 만백성이 음식을 끊었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다. 해를 넘겨서 장례를 치렀다. 우가 출신 고불이 즉위하였다.

별자리 관측 프로그램중 대중화 되어있고 신뢰성 있는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습니다.어떤 것으로라도 해보세요. 직접 다운받아서 프로그램 시연하실 수 있습니다.

1. 스태리 나잇 (Starry Night)
추천도: ★★★★★
http://www.starrynight.com/
천문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프로그램은 100% 알게 됩니다.
천문프로그램 No.1 이자 진리, 원조이죠.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자랑합니다.

Starry Night은 일선 학교 및 천문대 등의 천체 교육 및 천문 동호회 등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는 소프트웨어로써, 미국 나사(NASA)에서 제공한 각종 천체의 실사 및 실물에 가까운 그래픽 이미지 등을 통해 경이로운 천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좌표 및 시간 설정 등을 통해 특정 지점의 천체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태리 나잇의 정확도와 신뢰성 http://goo.gl/l56as


2. 스텔라리움 (Stellarium)
추천도: ★★★★
http://www.stellarium.org/
스태리나잇같은 천문 프로그램의 가격이 부담스러우시다면, 물론 무료 프로그램도 존재합니다.
제가 사용해본 경험에 의해, 이 프로그램이 스태리 나잇 다음으로 좋은 것 같습니다.
Stellarium을 통해 실시간으로 120,000개 이상의 별, 별자리, 행성, 천체 대상 등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장점 : 무료 < 스태리 나잇의 경우 한글판이 아니라면 모두 영어지만, 스텔라리움은 한글완벽구동
단점 : 구체적이지가 않다, 볼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

3. 별바라기

별바라기1.0은 국내에서 최초로 개발된 국산 별자리 프로그램입니다. (1997년 처음 개발)
밤하늘의 멋진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오늘 밤에 보이게 될 별들의 위치와 행성
들의 위치를 미리 알아볼수 있습니다. 별들의 위치를 컴퓨터를 일일이 계산해서 뿌려
주는 방식이므로 별과 별자리들의 위치가 정밀한 것이 특징입니다.
별자리 공부나, 천체관측을 준비 할 때 참 편리한 프로그램입니다.


 

환단고기 썰물 입증은 조작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오성취루 현상 입증이 진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박교수님께서 오성취루만 입증했냐면 썰물 기록도 입증했다. 현대에서도 수천년전의 썰물 기록을 만약 조작하려면 수천년간의 실로 엄청난 방대한 천문 기록 등을 취합하여 지극히 까다로운 과학적 분석으로 가능하다.
이런 계산은 일반 컴퓨터로는 어림도 없고 이른바 슈퍼 컴퓨터를 동원해야한다.

박창범 교수는 오행성의 결집에 이어 썰물에 대한 기록도 검증해보았다.(중략)
해와 함께 조석력을 일으키는 중요 요인인 달은 불규칙한 궤도 운동을 하며, 일기의 변화로 인한 영향 때문에 조수 간만의 정도는 항상 다르기 마련이다. 이 기록을 본 후 큰 썰물이 기록된 기원전 935년을 전후한 200년간 해와 달의 위치를 계산하고, 이들이 지구에 미친 조석력의 세기를 계산해 보았다. 그 결과 4년 후인 기원전 931년에 가장 강한 조식력이 발생했음을 발견했다. 이 썰물 기록이 사서에 임의로 삽입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보니 0.04 퍼센트에 불과했다.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