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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白水 2011. 4. 18. 08:02

 

[DBR]‘검은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보여준 인내의 리더십

 

 야코포 디 키멘티 다 엠폴리의 ‘카테리나와 앙리의 결혼식’. 앙리 2세(신랑)와

카테리나 데 메디치(신부)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교황 클레멘스 7세다.

‘검은 왕비’로 불리는 카테리나는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연 메디치 가문의 딸로 검은 옷을 자주 입어 ‘검은 왕비’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카테리나는 적의 비방이나 무시, 욕설 앞에서도 적에 대한 증오심을 품지 않았다.

적을 미워하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카테리나는 끈기 있게 적을 관찰하고 분석하다가

마침내 그 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때가 오면 과감하게 실행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79호(4월 15일 발행)에서

카테리나의 리더십을 집중 분석했다. 주요 내용을 간추린다. 》

○ 프랑스 궁정에서의 굴욕
1516년에 피렌체의 실질적 영주로 등장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로부터 군주론을 헌정받았다.

하지만 로렌초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이 책을 읽지 못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로렌초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가 작은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카테리나는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업고 태어났다.

그러나 영웅의 생애는 비극이나 시련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했던가.

카테리나는 태어나자마자 몇 주 만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성장했다.

 카테리나를 돌본 사람은 작은할아버지였던 교황 레오 10세였지만 교황은 1521년에 임종을 맞이했다.

이후 카테리나는 메디치 가문에서 두 번째로 배출한 교황인 클레멘스 7세를 대부로 모시게 됐다.

카테리나가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며느리로 시집가게 된다.

프랑수아 1세는 당시 관습대로 엄청난 액수의 결혼 지참금을 기대했지만 이 기대는 곧 빗나갔다.

든든한 방어막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테리나가 결혼식을 올린 지 약 1년 만에 임종했고,

로마 교황청은 미지급으로 남아 있던 카테리나의 결혼 지참금 지불을 거절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프랑수아 1세는 “이 계집아이가 완전히 알몸으로 내게 왔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더구나 카테리나는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눈이 툭 튀어나온 외모를 갖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후광이 사라지자 못생긴 카테리나는 프랑스 궁정에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남편인 왕세자 앙리 2세는 카테리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시 왕세자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사람은 연상의 애첩 디안 드 푸아티에였다.

앙리 2세는 프랑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귀부인 디안의 무릎에 앉아서 어리광을 부리면서 자랐다.

앙리 2세는 디안을 자신의 실질적인 아내로 생각했고 카테리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앙리 2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취임할 때 옆자리는 디안이 지켰다.

카테리나는 신하들이 서 있던 자리에 배정되는 굴욕을 당했다.

앙리 2세의 공식 결재 문장(紋章)도 앙리와 디안의 첫 글자를 딴 ‘HD’로 표시됐고

왕실 가족이 이동할 때 카테리나는 앙리 2세와 디안의 뒤에 서서 하녀들과 함께 행진했다.

그러나 시련과 외로움 속에서도 카테리나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천만금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카테리나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조국을 떠났다.

바로 군주론이었다. 카테리나는 힘들 때마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눈물이 더 나오지 않으면 군주론을 펼쳐 들었다. 이 책에서 카테리나는 극한 상황에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지혜를 배웠다.

○ 마키아벨리의 참된 제자

1559년 프랑스의 국왕이 된 앙리 2세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마상 창 경기를 열었다. 

앙리 2세는 축제 참가자들을 즐겁게 하려고 기사(騎士) 놀이를 하다가 눈과 두개골이 창에 찔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말에서 떨어졌을 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두 여인이 앞으로 달려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물론 왕비 카테리나와 애첩 디안이었다.

디안은 쓰러져 있는 앙리 2세의 몸을 세게 흔들었지만 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왕이 사고로 죽게 되면 카테리나가 왕비가 되어 권력을 행사한다.

그동안 온갖 굴욕과 모욕을 참아왔던 카테리나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디안은 두려워했다.

프랑스 왕실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질 것을 직감하며 신하들도 납작 엎드려 섭정왕후 카테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엎드려 몸을 떨고 있는 디안과 신하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카테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프랑스의 섭정왕후가 된 나 카테리나는 디안, 너를 용서하노라.

여기 죽어가는 내 남편이 너를 사랑했기에, 나도 너에 대한 사랑을 변치 않고 이어가리라.”

카테리나는 극적인 순간에 디안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디안의 하얀 목을 잘라버릴 수도 있었지만

카테리나는 여자 한 명을 죽여 과거에 입은 상처를 분풀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업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보복이 아니라 자비를 보여줌으로써 프랑스 국민 전체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테리나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를 갖고 있었다.

섭정왕후가 된 카테리나는 프랑스의 정치와 외교 정책을 평화 공존과 대화로 펼쳐갔다.

카테리나는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 향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언제나 남편을 기리는 의미의 검은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녀는 ‘검은 왕비’로 불렸다.

남편을 사고로 잃고 난 후에도 아들 3명을 차례로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카테리나는 1559∼1589년 30년간 프랑스를 통치했다.

검은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16세기 유럽의 역사를 이끌던 천하 여걸이었다.

카테리나대에 이르러 모직산업과 은행업에서 출발했던 피렌체의 중산층 가문은 마침내 유럽 최고의 왕실 가문으로 거듭났다.

○ 검은 왕비가 남긴 교훈
아키텐 지방의 수석주교였던 브루주 대주교는 1589년 2월 4일에 열린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장례식에서

감동적인 조사(弔辭)를 했다. 브루주 대주교는 카테리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검은 왕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었다고 요약했다.

카테리나의 삶에 대한 적절한 평가였다.

‘지도자의 조건’을 쓴 프란체스코 알베로니는 이렇게 말한다.

 “전략적 사고는 단순화하는 기술이다.

불평불만과 탄식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또 주저앉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 된다.

복수와 시기심은 잊어버려야 한다.

겁이 많거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피하는 게 좋다.

위선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조언자들은 무시해야 한다.

복잡하고 엉뚱한 아이디어는 버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제안은 듣지 말아야 한다.

명료하고 쉽고 기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 글은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전략적 사고를 잘 요약하고 있다.

카테리나가 통치하던 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위기의 시대를 헤쳐가고 있었다.

 ‘왕관을 쓴 괴물’들이 음모와 배신을 일삼으며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허물어뜨리고 있을 때,

메디치 가문의 딸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인내와 끈기의 리더십’이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정리=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