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재운의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저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323456.html)
02. 신라에 정복되 사라진 백제어
03. 일본어에 남아있는 고구려말
04. 민간으로 확산된 불교 어휘들
06. 한자어가 좋은 우리말 밀어내
09. 들어온 경로, 시기 따라 어휘 달라
10. 통일신라 때 한자어 대량유입
14. 일본서 역수입되는 백제어
15. 남사당이 유행어 제조, 유포
17. 민간으로 흘러 넘어 온 궁중어
21. 일상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어휘
23. 신문물과 함께 수용한 외래어들
24.한글을 일으켜 세워준 성경 번역가들
25. 혼동일으키는 일본식 한자어
26. 미국어 홍수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마지막회)
3.고구려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일본어에서 청국장을 가리키는 미소, 된장을 가리키는 미순이 고구려어라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미소와 미순은 우리말에서는 사라졌지만 일본어에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미소와 미순이 사라질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구려 중북부(지금의 중국 동북지대)가 당나라에 강점된 후 고구려 남부인 한반도 북부에서 쓰던 고구려어는 신라말과 충돌하면서, 아마 된장과 간장, 청국장과 싸우다 없어진 듯하다. 고려 때까지는 고구려어가 상당수 살아있던 흔적이 있는데, 조선시대이후 한자중심의 성리학사회가 되다보니 그나마 깡그리 없어진 듯하다.
일본어에 남아있는 말 중에서 이쑤시개를 가리키는 요지도 실은 고구려에서 쓰던 한자어다. 양지라고 하던 말을 우리는 양 치질이라는 다른 말로 바꾸어 쓰고, 일본은 양지를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써왔는데, 그게 요지다. 이걸 일본어라고 하여 우린 이쑤시개로 바꿔 쓰는데, 결국 양지라는 말에서 이쑤시개와 양치질 두 어휘로 갈라진 셈이다. 이쑤시개라는 무지막한 말보다는 양지가 나은데 다시 살려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날 일본어를 보면 우리말이 연상되는 어휘가 굉장히 많다. 아사히신문 같은 경우 하자로는 조일(朝日)이라고 적으면서, 조(朝)는 아사로 읽고 일(日)은 히로 읽는다. 아사가 아사달이나 아시라고 할 때의 그 아사요, 히가 해를 말한다는 것쯤은 금세 알 수 있다. 지난번에 적은 백제어 수사(數詞) ‘밀’(密=3), ‘우츠’(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은 고구려와 똑 같으면서 일본어에도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어는 같은 북방계 언어인 몽골어와 통하고, 같은 고구려백성이던 여진어 역시 고구려어와 상당히 밀접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어가 비록 당나라에 망한 뒤 고구려어의 실체를 들여다보기 어렵다고는 하나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등을 연구하면 그 흔적이라도 거둘 수 있으리라고 본다.
토끼는 고구려어로 ‘烏斯含(발음은 당시한자음대로 읽어야 한다)’ 인데 일본어는 우사기다. 고구려어인 매는 고대 일본어 미두이다. 물을 가리키던 ‘買’, 성(城)을 가리키던 '忽', 우두머리를 가리키던 '加'는 여진어나 몽골어와 비슷하다. 물은 퉁구스어로‘mu', 만주어의 'mu-ke'와 같은데 ‘買’의 발음도 이와 유사했을 것이다. ‘忽’은 오늘날의 골과 비슷한데, 몽골에서는 지금도 쓰인다, ‘加’는 말할 것도 없이 북방어인 칸이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도 국어사를 연구한다는 학자들 중에 여진어, 몽골어, 거란어, 고대일본어 등을 파고드는 분들이 드물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또 중국 동북지방에 고구려의 후예들이 살고 있을 텐데, 상상력을 갖고 더 살펴야 하지 않을까.
24.한글을 일으켜 세워준 성경 번역가들
성경’은 조선말 한글 보급 일등공신
한글은 1443년 세종 이도가 재위 25년째인 음력 12월에 만들었다. 그 뒤 해례본을 만들고, 이어서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짓고, 석보상절·월인석보·금강경 등을 한글로 번역했다. 유교경전도 번역했다.
하지만 유림 및 모화주의자들의 강한 반발로 한글은 공용 문자로 쓰이지 못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법률 칙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조칙이 발표되면서 겨우 우리 문자로 인정받았다. 무려 450년간 사장돼 있던 한글이 쿠데타나 다름없는 개혁으로 겨우 빛을 본 것이다.
이듬해 189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길준은 한글로 쓴 <서유견문>을 발표하고, 1896년에는 순한글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그러나 공용 문자와 생활 문자는 한문이었고, 한글 쓰기를 주장하는 유길준 같은 선구자는 격렬한 저항과 반대에 부딪혔다.
이때 등장한 것이 기독교였다. 원래 정조 이산 시기부터 천주교가 들어왔지만 한문 번역본이나 현토본, 발췌본으로 보급됐기 때문에 한글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회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심양에서 의주 사람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를 만나 전도를 하면서 이들과 함께 성경 번역에 나섰다. 존 로스는 이들을 통해 조선의 지배계층은 비록 한문을 쓰지만 일반 백성은 한글을 쉽게 배우고 익혀 일상 생활에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상륜, 김청송 두 명이 더 가담한 이 의주인들은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요한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까지 차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존 로스 목사는 이듬해인 1874년에는 한영 회화집을 만들고, 낱권으로 번역된 성경을 납활자로 각 3000권씩 찍어 이를 서간도, 즉 남만주 일대 조선인들에게 배포했다. 이로써 서간도 조선인 75명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 존 로스가 직접 세례를 주었다. 1887년에는 신약전서가 출판됐다. 이렇게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일대로 파고들었다. 한문을 읽을 수 없는 여성, 하층민들까지 이 한글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초기 성경 번역자들이 신약성경 27권을 번역한 데 이어 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 39권까지 총 66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낸 사실은 한글 보급 측면에서 보면 비할 수 없이 막중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66권의 책에 1800년대에 쓰이던 거의 모든 한글 어휘가 총망라됐으니 초기 성경은 곧 우리말 어휘 사전집이나 다름없다. 또 초기 성경 번역본이 보급되면서 맞춤법, 띄어쓰기의 필요성이 생기고, 이후 우리가 쓰는 현대 한국어로 다듬어지는 계기가 됐다.
최초 번역본 성경의 영향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번역어인 ‘하나님’(God)이 생겨났다. 원래 중국은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일본은 가미, 우리나라는 천주(天主), 신(神) 등으로 번역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번역자들은 순우리말인 ‘하나님’으로 적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쓰는 평안도의 입말을 그대로 적었던 것이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아래 ‘ㆍ’가 탈락되었지만 초기 번역에서 ‘하B님’으로 표기되던 이 어휘가 나중에 음가에 가장 가까운 ‘하나님’으로 정리된 것이다.
26. 미국어 홍수를 어떻게 견뎌야 하나 (마지막회)
외래어 가려 써 우리말 가꾸자
예전에는 영어라고 하면 으레 영국어인 줄 알았지만, 오늘날에는 미국어가 더 영어 행세를 하게 되었다. 사투리가 표준어를 이긴 셈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 한국어의 표준은 백제어가 차지했지만, 천년 전에는 고구려어가 민족어의 표준이었던 것과 같다.
우리나라가 영어의 홍수에 파묻히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무정부 상태에서 군정청이 들어서고 한국전쟁 때 연합군이 들어와 주둔하면서부터다. 전에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일본식 발음의 영어 어휘를 쓰는 정도였지만 이때부터는 영국어와 미국어가 직접 통용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우리나라는 외국어 중에서도 영어를, 영어 중에서도 미국어를 더 많이 배운 셈이다.
이러다 보니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하거나 징용·징병으로 나가 산 인구 못지않게 많은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나가 살고 있다. 우리말 차원에서 보자면 원나라로 유학하거나 이민한 고려인들, 일본으로 유학·이민하거나 징용·징병당한 조선인들, 20세기부터 미국으로 유학·이민한 한국인들이 외래어를 들여오는 거대한 창구 노릇을 한다.
몽골어는 어휘만 들어왔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어는 언어 자체가 들어와 공용어로 쓰임으로써 우리말 문법을 변형시키고, 이에 따라 갓 쓰이기 시작한 한글은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미국어는 우리나라 공용어가 아님에도 일본어가 우리말에 남긴 상처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언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어를 거침없이 쓰고 있다. 정부의 정책·홍보 분야에서 미국어는 마치 준공용어 수준으로 쓰인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니 하는 영어 문장을 남발하면서 정부 기관에서도 다투어 쓰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도 걸핏하면 시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문장형 영어 슬로건을 걸어놓는다. 언론·방송·광고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말은 한글로 표기된 지 겨우 백년 남짓 되었다. 맞춤법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아 실제 언어생활에서 불편한 일이 많다. 영어의 F는 한글로 적을 수도 없고, 발음도 어정쩡하게 내고 있다.
한글을 닦아나가는 일은 벅차고, 우리말에서 한자어 독을 빼내고, 일본어 독을 빼내는 일도 다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힘들다. 한글이 공용 문자가 된 1894년 이래 백여 년이 지났지만 한자어, 일본어가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어 어휘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한자어와 일본어는 대부분 뜻글자(표의문자)인 한자로 돼 있어서 가려 쓰기나 쉽지, 영어는 한글과 같은 소리글자(표음문자)라서 자칫하면 우리말에 뿌리를 내려 변형될 가능성이 많다. 꼭 필요한 외래어라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받아들여야 하지만 우리말로 표현이 충분한 분야에서도 영어가 쓰이니 문제다.
앞으로 백년 뒤 어원 연구자들은 영어에서 온 우리말을 정리하느라 바쁠 것이고, 미국 중심의 세상이 변한 뒤에는 또 우리말에서 영어 독을 뺀다고 시끄러울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처럼 미국이 망하겠느냐고들 하는 분도 있겠지만, 역사상의 세계제국들도 결국은 망했다. 외래어를 슬기롭게 가려 써서 우리말을 잘 가꿔나가야 한다.
'우리말글. 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늘목동 (0) | 2014.01.28 |
---|---|
고구려어 (0) | 2013.11.16 |
한시 공부(梅泉의 절명시) (0) | 2013.09.27 |
5. 한문의 품사 (0) | 2013.09.27 |
4. 한자의 허사 한자공부 (0) | 2013.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