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를 남 · 북으로 가를 때 永平땅은 북쪽지역에 해당되는 예전의 영평현(永平縣)지역으로, 1914년에 포천과 통합되었다. 광덕현(峴)에서 발원하여 청산면 궁평리에서 한탄강과 합류하는 永平川유역이며, 대체로 지금의 이동면, 일동면, 영북면, 영중면, 창수면이 해당된다. 관인면은 古來로 철원관할이었다.
영평팔경(永平八景)은 ○화적연(禾積淵; 관인면 사정리) ○금수정(金水亭; 창수면 오가리) ○창옥병(蒼玉屛; 창수면 오가리) ○와룡암(臥龍岩; 일동면 수입4리) ○낙귀정지(樂歸亭址; 영중면 거사리) ○백로주(白鷺州; 영중면 금주리) ○청학동(靑鶴洞영중면 금주4리) ○선유담(仙遊潭; 이동면 도평리)을 꼽는다.
창옥병을 字義로 풀면 ‘蒼玉(푸른색 옥) 병풍’이라는 말이다. 농암집(農巖集)에서 창옥병에 관한 詩 두 편을 옮긴다. 농암집은 1709년 간행된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창협의 문집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호가 농암(農巖)으로 이조좌랑·함경북도 병마평사·이조정랑·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으며 말년에 사직하고 영평(永平)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산사에서 돌아오니 金錫龜가 술을 가지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高柳花相映 (고류화상영) 높이 자란 버들에 꽃 빛 비치고
淸池雨細來 (청지우세내) 맑은 못에 가랑비 떨어지는 구나.
微醺山寺酒 (미훈산사주) 산사 술에 발그레 취해 왔는데
更把野人杯 (갱파야인배) 들사람 가져온 술 다시 마시네.
萬事吾何有 (만사오하유) 세상만사 이 몸과 상관없으니
孤襟爾與開 (고금이여개) 외로운 회포 그대에게 열어 보이네.
窪樽明日飮 (와준명일음) 와준에 술을 붓고 마셔보리니
勝約莫遲回 (승약막지회) 그대여 내일 약속 잊지 말게나.
*. 이튿날 김군과 창옥병(蒼玉屛)을 찾아가기로 했는데, 창옥병에
와준(窪尊: 움푹 패여 술을 부어 놓고 떠 마실 수 있는 바위)이 있으므로 쓴 시다.
창옥병(蒼玉屛)
<첫 번째>
牛頭淵下相公村 (우두연하상공촌) 우두연 그 아래는 상공의 마을이라
松岸維舟是廟門 (송안유주시묘문) 배를 댄 솔 언덕은 다름 아닌 사당의 문
蒼蘚蝕題餘古壁 (창선식제여고벽) 이끼 잔뜩 끼인 글씨 옛 벽에 남아 있고
綠波如酒漲窪樽 (연파여주창와준) 술이런가 푸른 물결 와준에 그득하네
神傳蜀像宗臣迥 (신전촉상종신형) 촉나라 종신처럼 초상화 전해오고
屛聳閩山大隱尊 (병용민산대은존) 민산의 대은처럼 창옥병이 드높구나
曠世心期余不隔 (광세심기여부격) 한참 흘렀어도 상공 마음 알겠는데
幽棲況共一溪源 (유서황공일계원) 평천 기슭에 은거함도 똑 같아라
<두 번째>
丘壑巖廊道孰該 (구학암랑도숙해) 은자와 정승 명망 뉘라서 다 갖추리
風標應少漢唐來 (풍표응소한당내) 드높은 그 풍도는 한당 이래 다시 없네
急流身已輕台鼎 (급류신이경태정) 급류처럼 미련 없이 정승 자리 내던지고
窮谷名猶列斗魁 (궁곡명유렬두괴) 외진 골짝 숨었어도 북두처럼 빛났다네
春暮哀鵑還哭墓 (춘모애견환곡묘) 늦봄이라 두견새가 묘소 앞에 울어대고
天空白鶴不歸臺 (천공백학부귀대) 텅 빈 하늘 백학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秪今尙憶風雩興 (지금상억풍우흥) 자연에서 노닌 흥취 상상할 수 있건마는
恨未曾隨浴詠迴( 한미증수욕영회) 상공 따라 노닐지 못했던 게 한이로세
* 배견와(拜鵑窩)와 백학대(白鶴臺)는 모두 고적이다.
* 창옥병(蒼玉屛): 조선 선조 때 정승을 지낸 박순(朴淳)이 은거했던 곳으로 경기도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있는 봉우리다. 이곳에 그의 위패를 모신 옥병서원(玉屛書院)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복구되었다.
* 촉(蜀)나라 종신(宗臣) :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말한다.
* 민산(閩山)의 대은(大隱) : 무이산(武夷山)의 은병봉(隱屛峯)을 말한다.
* 묘소: 박순의 묘소를 말한다.
오가리절벽이 아니고, 옥병서원앞 암각석벽이 창옥병(蒼玉屛)이다.
이 글은 영평팔경의 하나인 창옥병(蒼玉屛에 관하여, 파주시청 문화관광홈페이지에 실린 유적설명과,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유래집에 실린 내용이 잘못되었으니 바로잡아 달라고 관계기관에 요청한 글을 추가로 옮기는 것이다. <2013. 12. 06>
<창옥병 모습>
창옥병(蒼玉屛)의 위치는 어디인가?
‘창옥병’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평천의 북벽(北壁)을 이루는 창수면의 '오가리절벽(절벽을 뚫고 창옥터널이 지난다) 이 ‘창옥병(蒼玉屛)’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에서도 거의가 '오가리절벽'이 ‘창옥병(蒼玉屛)’이라며 사진과 함께 올라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포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에도 ‘오가리절벽’을 ‘창옥병’이라고 하였으니 그럴만도 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가리절벽’이 웅장하기는 하지만 그게 어디 병풍의 모양입니까? 제가 아는 한 어떠한 문헌이나 문서기록에도 ‘오가리절벽’을 ‘창옥병(蒼玉屛)'이라고 기록한 곳이 없습니다. 오로지 국토지리연구원에서 발간한 '지명유래집'에만 그렇게 기술되어 있지요. 포천시 문화관광홈페이지에서는 그대로 끌어다 올렸을 뿐이고요.
그럼 먼저 창옥병(蒼玉屛)에 대한 포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유적설명을 보겠습니다.
【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있는 벼랑이다. 영평8경 중 3경이다. 창옥병이란 이름이 말하듯이 기암괴석으로 된 병풍이다. 『해동지도』에 "창옥병(蒼玉屛)은 영평천(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어 생긴 이름이며 영평팔경의 하나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창옥병은 영평현 서쪽 1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창옥병의 폭이 수마정이요 높이가 40~50자에서 백수십자로 깎은 듯한 절벽으로 절벽에는 굴곡이 있고 고저가 있고 암혈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형태의 동물 모양이 되어 돌출한 바위도 있다. 1931년에 이 암벽을 깎아서 터널을 뚫어 도로를 만들어 통행하였으나 최근에 우회도로가 생겨 현재는 일부 차량만 통행하고 있다. 맞은 편에 옥병서원(창수면 주원리)이 있었는데 1658년(효종 9)에 창건하였다. 『여지도』에는 "창옥병에 박사암서원(朴思菴書院)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다. 『팔도군현지도』에는 옥병(玉屛)으로 표시되어 있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및 '우리나라의 지명' 총론 목차】
위의 안내문은,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지명유래집> 중부편 p431에 실린 경기도 포천시 ' 창옥병(蒼玉屛)'에 관한 내용을 100%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입니다.
지명유래집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해동지도(1750년대 초반) · 여지도(1795년) · 대동지지(1866년) · 팔도군현지도(미상)등의 史料에 근거하여 “창옥병(蒼玉屛)은 영평현 서쪽 10리에 있는 영평천(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어 생긴 이름이며, 영평팔경의 하나이다. 박사암서원(朴思菴書院)이 있으며, 창옥병이 옥병(玉屛)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창옥병(蒼玉屛)은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있는 벼랑으로 영평8경 중 3경이다. 창옥병이란 이름이 말하듯이 기암괴석으로 된 병풍이다. 창옥병의 폭이 수마정이요 높이가 40~50자에서 백수십자로 깎은 듯한 절벽으로 절벽에는 굴곡이 있고 고저가 있고 암혈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형태의 동물 모양이 되어 돌출한 바위도 있다. 1931년에 이 암벽을 깎아서 터널을 뚫어 도로를 만들어 통행하였으나 최근에 우회도로가 생겨 현재는 일부 차량만 통행하고 있다. 맞은편에 옥병서원(창수면 주원리)이 있었는데 1658년(효종 9)에 창건하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은, 옥병서원에서 북쪽으로 영평천을 건너 강의 북벽(北壁)을 이루는, 창수면 오가리의 큰 절벽을 창옥병(蒼玉屛)이라고 단정 지었지요. 그리고 같은 책 p424의 보장산(寶藏山) 지명유래에서【 ...옛 영평군 당시 읍 뒤 주산 불곡산(현 불무산을 말하는 듯)의 내맥으로 많은 전설과 영평팔경의 하나인 기승 창옥병을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백운산으로부터 서류하는 영평천이 보장산 남쪽 기슭을 흐르고 있으며 그 언덕에 창옥병이 자리 잡고 있어 산자수명한 승경 찾아 옛 문인과 묵객들의 내왕이 잦았다는 흔적 또한 남아있다. 이 산이 위치한 지역을 오가리(伍佳里)라 하는데 다섯가지 가경이 있다하여 이름 지었다 할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저는 1931년에 창옥터널이 뚫린 이 절벽을 편의상 '오가리절벽( 또는 '창옥절벽')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치비정이 잘못된 것이지요. '오가리절벽'은 창옥병(蒼玉屛)이 아닙니다. 창옥병은 '옥병서원앞 영평천변의 암각문이 새겨진 암벽(이하 "암각석벽"이라 한다.)을 말합니다. 그러면 근거를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ⅰ해동지도에 "창옥병(蒼玉屛)은 영평천(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어 생긴 이름이며 영평팔경의 하나이다." <지명유래집>
☞검토 의견: '오가리절벽'을 '창옥병'이라고 특정한 설명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동지도를 보면 옥병서원과 창옥병은 같은 언덕에 있습니다.
ⅱ 대동지지에 "창옥병은 영평현 서쪽 10리에 있다. <지명유래집>
☞검토 의견: 여기서도 '오가리절벽'을 '창옥병'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지요.
ⅲ 여지도에 "창옥병에 박사암서원(朴思菴書院)이 있다.
☞검토 의견: 옥병서원이 있는 곳은 '오가리절벽'이 아니라 '암각석벽'입니다.
ⅳ 『팔도군현지도』에 옥병(玉屛)으로 표시되어 있다.
☞검토 의견: 이곳에도 '오가리절벽'을 특정한 설명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지명유래집에서 제시한 1-4까지의 자료에 '오가리적벽'을 '창옥병'으로 단정지을 만한 내용이 없는데도, 왜 그곳을 '창옥병'이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ⅴ 지명유래집에서 제시한 사료보다 이른 시기에 쓰여진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년)의 白雲溪記(백운계기)를 보겠습니다.「백로주를 보고 저녁에 백운계에 이르렀다. 영평 치소 서쪽으로 5리에 있는데, 물은 더욱 느리고 모래는 더욱 평평하며 암벽은 더욱 가팔랐다. 깊은 못과 긴 여울이 위아래로 아득하였고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과 눈이 녹아 있었다. 물새 수십 마리가 울면서 날아갔다. 계곡의 반석에 완상(玩賞)할만한 봉래 양사언(楊士彦)과 석봉 한호(韓濩)의 석각(石刻) 글씨가 있으며 못가에 옛날 金氏(김확복, 金?卜)가 지은 金水亭이 있다. 아래로 몇 리를 내려가면 창옥병(蒼玉屛)이 있는데, 계곡을 따라 이어진 산면(山面)이 모두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박승상(朴丞相, 朴淳)의 별업(別業)이 있으며 시냇가에 승상의 사당이 있다.」고 하였다.
☞검토 의견: 별업(別業) 곧 별장인 배견와(拜鵑窩)가 있었고, 사당인 옥병서원(玉屛書院) 있는 곳은 '오가리절벽'이 아니라, '암각석벽'입니다.
ⅵ [思菴先生文集卷之四]에 실린 <二養亭記>에서 창옥병에 관련되는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 - 1589)선생은 64세인 1586년 가을에 永平으로 내려와 白雲溪에 은거할 집을 짓고 拜鵑窩ㆍ二養亭ㆍ淸冷潭ㆍ蒼玉屛 등의 名號를 題하였으니, '이양정기'는 두 말 할 나위없이 기본적인 史料이며 확실한 고증 문건입니다.
1> 鍾賢東支。至潭作崖。故水底皆布全石。高者露出。詭怪錯陳。有若龜龍曝日。島嶼浮溟。종현산(鍾賢山) 동쪽지맥이 청령담에 이르러 벼랑이 된다. 물 밑에 큰 바위하나가 펼쳐져 있어, 높은 것은 물위에 드러났다. 괴이하게 섞여 늘어서 있는데 거북이나 용이 햇볕을 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섬이 바다에 떠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검토 의견: 종현산지맥이 영평천을 만나 멈춰서며 벼랑이 된 곳, 그 벼랑 앞이 청령담이고, 그 벼랑에 암각문을 새겼으니 이를 '창옥병'이라 하는 것입니다. '보장산 남쪽 기슭 언덕에 창옥병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명유래집의 주장은 근거도 없고 너무 엉뚱합니다.
※ 鍾賢山: 경기도 동두천시의 신북면 덕둔리와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588m). 『대동지지』에 "종현산(鍾賢山)은 영평현 서쪽 2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종현산은 신북면 덕둔리 북쪽에 우뚝 솟아 있으며 청산면 산악지역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동두천 소요산 동록이, 남쪽으로는 왕방산 · 국사봉의 연봉이, 동으로 계류산이 둘러 싸여져 있어 예로부터 산골 중의 산골이라는 뜻으로 이름조차 산안이라 하였다. 종현산 기슭에 삼정골이라는 취락이 있는데 조선 초기 난(亂)을 피하여 세 정승이 이곳에 와 은거하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끊고 산수를 벗 삼아 일생을 살았다 하여 삼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도 있다.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계곡에는 산내천이 서류하여 한탄강으로 흘러 내려간다. 이 유역은 예로부터 청산잣(포천잣)의 명산지이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잣나무가 베어졌었으나 수복 후에 심은 잣나무가 다시 자라 지난날과 다름없이 생산되고 있는 보배로운 곳이다. 『1872년지방지도』 「영평군지도」에는 종현산(鍾懸山)으로 『동여도』에는 종현산(鍾賢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명총람』에는 포천군 화현면 · 창수면 추동리와 주원리 · 신북면 덕둔리 및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와 경계하는 산으로 되어 있다.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12, 국토지리정보원)
2> 大壁倚天。根浸灘淵。極造化之剞劂 曰蒼玉屛라 [큰 벼랑 하늘에 기대고, 밑동은 여울 못에 잠겼다. 매우 잘 어울려 이에 끌 글을 새기고, ‘창옥병’이라고 부른다 - 白首] * 기궐 (剞劂 : 굽은 칼과 굽은 끌로 새기다)
☞검토 의견: 큰 벼랑이 서있고 암반이 철령담으로 뻗어 들어간 곳, 그 벼랑에 글을 새기고 이를 '창옥병"이라 하니, '창옥병'은 '암각석벽'일 수 밖에 없습니다.
ⅶ 금수정 정자아래에는 맑은 牛頭川이 흐르고, 정자를 심을 때 심었다는 수령 400년의 소나무가 있어 늠름한 자태를 과시하였다. 약 100년전 까지만 해도 은행나무로 새로 2평 남짓한 규모의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주춧돌 여덟 개만 남았다. 다행히 콘크리트 건물을 세우지 않아 상상으로나마 옛 모습을 만나게 한다. 그 건너편에 창옥병이 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푸른빛의 구슬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다. 암반이 강 가운데까지 뻗어 있으며 암벽 도처에 시인의 제영이 새겨져 있어, 바위 자체가 하나의 필첩(筆帖)이라 할만하다. <조선의 문화공간 2. p109 - 110>
☞검토 의견: 암벽에 글씨가 새겨진 곳, 즉 '암각석벽'을 청옥병이라 했다는 말입니다.
▣드리는 말씀: 이상 제가 검토한 사항을 보내드립니다. 국토지리정보원과 파주시청이 협의 검토하시어 역사정보를 국민들이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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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리 절벽-창옥(蒼玉)절벽
전곡에서 37번 도로를 타고 철원 쪽으로 다니다보면, 옥병서원이 있는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의 국도왼편으로 한탄강의 가장 큰 지류인 영평천과 북벽을 이루는 멋진 바위가 보인다. 항상 궁금했는데...
오늘 도로 옆에 차를 대놓고 찾아 내려갔다. 강을 건너면 보장산(寶藏山, 555m) 남쪽자락에 자리한 창수면 오가리다. 영평천은 백의리와 궁평리를 지나 ‘아우라지’에서 한탄강과 합류하는데 그곳에는 유명한 베개용암이 있다. 한탄강의 본류가 아니고 지류인 이곳의 바위는 평강의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굳은 현무암이 아닌 다른 기반암으로 보인다.
오가리절벽의 속살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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