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예산군 大興면은 본래 백제의 임존성(任存城) 또는 금주(今州)라고 불리던 고을로 신라의 경덕왕(재위 742년∼765년)이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大興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태조 왕건이 이 일대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치열한 영역다툼을 벌이다가 견훤군을 대파하여 ‘크게 흥한 곳’이라는 의미의 지명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고려현종9년(1018년)에는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에 딸렸다가 고려명종2년(1172년)에 감무(監務)가 되며, 조선태종7년(1407년)에 大興郡으로 승격되었고 태종13년(1413년)에 다시 현감이 되었다. 조선 숙종7년(16841년)에 이 고을 朴山에 있는 현종의 태실을 다시 봉축하면서 郡으로 승격하였다. 고종32년(1895년)에 부제가 실시되면서 홍주부 대흥군이 되었다.
1914년 군ㆍ면 통폐합에 따라 예산군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되고 만 대흥현의 읍치구역에는 50여 칸의 객사(客舍)와 40여 칸의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있지만 현재는 대흥초등학교로 변했다. 객사에는 견사정(見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원래 이름은 포정정(布政亭)이었다. 대흥군의 관아 자리엔 현재 대흥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 너머에는 대흥군의 현청인 임성아문이 있었다. 지금은 역대 수령들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이 18칸으로 복원되었고, <임성아문(任城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관아의 정문인 아문(衙門)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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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東軒)이란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을 말하는데, 생활처소인 내아(內衙, 서헌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헌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수령이 주재하는 관청의 본건물이다. 대흥동헌은 정면6칸(14.4m) 측면 2칸(4.8m) 처마높이 3.3m의 홑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지붕인데 공포는 전체적으로 초익공의 형태이며 5량집이다. ‘여지도서’에‘아사(衙舍)로는 구동헌(舊東軒) 9칸, 신동헌 16칸이라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동헌은 신동헌으로 추축되며, 중앙에 정청인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그리고 전면으로 반칸 넓이의 툇마루가 이어져 있고, 북쪽으로 두 칸 규모의 툇간(대청)이 있는데 중앙의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툇간의 천장은 우물반자형태의 눈썹천장으로 된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대흥현 동헌은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인데 상량문에 永樂 5년(1407)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대흥향교(1405)와 함께 조선태종 때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나, 康熙42년(170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숙종 때에 대흥이 군으로 승격될 당시 중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의 동헌건물은 일제의 강점 후 대흥현이 예산군에 통합되면서 동헌건물을 면사무소로 개조하여 해방 후까지 사용하다가 대흥면사무소를 현 위치로 신축하면서 1979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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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뜰에는 '양이침범 비전칙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라고 적혀있는 척화비가 있다.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전국에 세웠던 비다.비문의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는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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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胎室)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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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를 담았던 돌그릇
주리를 틀고 곤장을 때리던 형틀
보호수로 지정된 대흥동헌 앞 느티나무 수령 218년, 높이 18m, 둘레
4.1m
이곳의 일대가 KBS TV 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농촌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산 넘어 남촌에는` 촬영장이기도 한 곳이라 가족들과 함께하는 주말나들이로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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