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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과 강증산 그리고 김개남과 임병찬

백수.白水 2014. 1. 9. 07:16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과 증산교주 강일순(1871∼1909)은 같은 고부 땅(현 정읍시)에서 살았다. 둘 다 양반이었지만 살림살이는 보잘것없었다. 전봉준은 동네서당 훈장을 하거나 묏자리를 잡아주면서 그럭저럭 끼니를 이었다. 강증산도 어릴 때부터 남의집살이를 하거나 땔나무를 시장에 내다 팔며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강증산은 전봉준의 열렬한 팬이었다. “전봉준은 만고의 영장”이라고 주위에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였다. 나이도 전봉준이 열여섯 위였다. 하지만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살았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만난 흔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이 들떠 일어났을 때, 강증산은 피 끓는 스물셋이었다. 한데 강증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드러내놓고 전봉준의 무장투쟁에 반대했다. 썩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지만, ‘그러려면 땅과 하늘의 질서를 송두리째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증산은 동학군들에게 “겨울에 쫓겨서 죽을 것”이라며 빨리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다. 동학군 지휘부에는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지 말라”고 외쳤다. 실제 강증산의 제자 중에는 공주 우금치 전투 직전 이탈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동학접주 김개남(1853∼1894)과 의병장 임병찬(1851∼1916)은 친구 사이였다. 김개남의 ‘개남(開南)’은 ‘남조선을 개벽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열혈남아로서 불꽃처럼 살았다. 전봉준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는 남원부사 이용헌 등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다. 그의 부대가 가는 곳마다 피바람이 일었다. 당시 양반관료들에게 그는 ‘공포’ 그 자체였다.

선비 임병찬은 김개남과 이웃마을에 살았다. 평소 그들은 밤을 패어가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김개남이 청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매부 집에 숨어들었을 때, 임병찬은 사람을 보내 “자네가 있는 곳보다는 회문산 자락인 우리 집(정읍시 산외면 종송리)이 높고 험하니 더 안전한 이곳으로 와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주감영에 ‘김개남을 잡아가라’고 알렸다.

김개남은 1894년 12월 임병찬의 집에서 잡혀 전주남문 밖에서 목이 베였다. 1905년 의병장 임병찬은 일본군에 체포돼 그의 스승 최익현과 대마도에 유배됐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도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거문도에 유배되자 그곳에서 단식 끝에 눈을 감았다.

강증산은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한 뒤 14년을 더 살았다. 그는 “전봉준은 진실로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 감히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반봉건 반외세의 무장혁명을 꿈꿨던 전봉준, 우주 삼라만상의 후천개벽을 꿈꿨던 강증산, 그들은 방법은 달랐지만, 그 뜻은 같았다.

김개남과 임병찬은 그 뜻부터가 달랐다. 김개남에게 ‘백성은 사발이고, 왕과 조선지배층이 물’이었다면, 임병찬에겐 ‘왕이 사발이고, 백성은 물일 뿐’이었다. 임병찬에게 동학군은 임금에게 반기를 든 ‘동학비도(東學匪徒)’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겐 ‘우정’보다 임금에 대한 ‘충(忠)’이 먼저였다. 선비로서 당연했다. 그가 ‘임실군수와 백미 20섬’의 포상을 사양한 것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1879∼1910)가 ‘동학당 사태는 폭동(동양평화론)’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황해도 동학군 토벌대로 나선 것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안태훈은 당시 황해도 ‘아기접주’로 이름이 자자했던 김창수(백범 김구·1876∼1949)를 치지 않았다. 그는 열여덟 소년접주에게 밀사를 보내 ‘서로 공격하지 말자’라고 제의했다. 그리고 김창수가 해주성 습격에 실패하고 쫓길 땐 그를 상당 기간 숨겨주기까지 했다. 그는 ‘충(忠)’보다는 ‘사람’을 먼저 아꼈다.

1894년 갑오년 그 후 두 회갑. 사람의 길은 참으로 어렵다. 도대체 무엇이 정답인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구한말, 과연 힘없는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어야 했는가. 2014년 갑오년은 그때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가마니 들것’ 위에 호송될 때조차도 당당하고 눈이 형형했던 조선 사내, 녹두장군. 그의 붉은 마음은 아직도 애틋하고 절절하기만 하다. ‘봉준이 이 사람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동아일보/ 전문기자 칼럼/ 김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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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에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봉준이 이 사람아, 더운 국밥 한 그릇 못 말아 먹이고 보내다니. 목이 메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이

 

시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마음 따뜻한 혁명가 전봉준(1855~1895). 가마니 들것 위에 앉아 호송될 때조차도 당당하고 눈빛이 형형했던 조선 사내. 찬바람이 불면 녹두장군의 붉은 마음이 애틋하게 저려온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깜깜한 시대.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구한말.

 

그는 저잣거리 낮은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지 화두를 놓치지 않고, 눈 부릅뜬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남의 묘 자리를 잡아주거나 동네서당 훈장 노릇을 하면서 끼니를 꾸려갔다. 말이 양반이지 보잘 것 없는 살림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기품을 잃지 않았다. 감정이나 시류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강증산(1871~1909)은 전봉준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전봉준과 같은 고부 땅에서 살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걸음에 달려가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동학에 이해가 깊었고 생각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큰 뜻에 조금도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일까. 나이는 전봉준이 열여섯 살 위.

 

강증산도 양반이었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거나 땔나무를 팔아 살았다. 처가에서 훈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1894년 전봉준이 마침내 들떠 일어났다. 전봉준 나이 서른아홉. 하지만 피 끓는 스물 셋의 강증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봉준의 무장투쟁에 드러내놓고 반대했다. 물론 강증산도 이 썩은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데엔 생각이 같았다. 문제는 그 혁명의 끝이 무참한 죽음들로 가득하리라는 것이었다. 피로 물든 강산. 결국 불쌍한 백성들만 죽어날 판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결코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강증산은 세상을 바꾸려면 땅과 하늘의 질서를 송두리째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후천개벽의 세상을 꿈꿨다. 여자들이 하늘같이 받들어지는 세상, 버림받고 천대받던 모든 생명이 하늘같이 대접받는 세상, 벌레 한 마리 풀잎 하나 삼라만상 모든 생명들이 서로서로 위하는 세상(相生), 바로 그런 후천개벽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봉건 반외세의 무장혁명을 꿈꿨던 전봉준. 우주 삼라만상의 후천개벽을 꿈꿨던 강증산. 강증산은 동학군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겨울에 쫓겨서 죽을 것이다라며 빨리 빠져나오라고 설득했다. 동학군 지휘부에는 무고한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지 말라고 외쳤다. 어찌 보면 강증산은 갑오농민전쟁의 훼방꾼이었다. 강증산의 제자 중에는 실제 우금치 전투에서 빠져나온 이도 있고, 가다가 도중에 강증산의 설득으로 그만 둔 이도 있다.

 

전봉준은 1895년 마흔의 나이로 그 핏빛 인생을 마감했다. 전봉준은 교수형에 앞서 마지막 시 한수를 읊었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구나/ 백성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잘못은 없었노라/ 나라 위하는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

 

강증산도 1909년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그가 평소에 늘 말한 대로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위해 이 세상의 병마를 몽땅 짊어지고미륵의 세상으로 갔다. 그의 몸은 알 수 없는 수많은 병으로 진물이 나고 악취가 진동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태연자약했다. 그는 전봉준이 죽은 뒤 3년 동안(1897~1899) 조선 천지를 떠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 그리고 서른(1901)에 모악산 대원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후천개벽의 세상에 대해서 역설했다. 전봉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전봉준은 진실로 만고의 명장이다. 백의한사(白衣寒士)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다. 세상 사람들이 전봉준의 힘을 많이 입었나니 감히 그의 이름을 해하지 말라

 

전주 용머리고개는 전봉준이나 강증산의 발길이 많이 닿았던 곳이다. 전봉준은 18944월 전주성을 점령할 때 용머리고개에서 일자진(일렬종대의 진법)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했다. 감사 김문현 등은 이미 서문 밖 수천채 민가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놓고 도망친 뒤였다. 농민군들이 민가의 지붕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올까 봐 아예 태워버린 것이다.

 

강증산은 용머리고개 주막에서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용머리고개에 사는 신도들의 집에 서 천지공사(증산교의 굿 의식)를 자주 행하기도 했다. 1907년엔 용머리고개 주막에서 장차 서양 기운이 조선에 들어오리라, 조선 강토가 서양으로 둥둥 떠 넘어 가는 구나라고 한탄하기도 하고 이 고개를 몇 사람이나 넘을 수 있으리오. 서북은 살아날 사람이 없고 동남은 살아날 사람이 많으리라6.25전쟁을 암시하기도 했다. 요즘 용머리고개 밖 삼천동에 막걸리 촌이 번성하는 것도 재미있다.

 

녹두로 살래? 숙주로 살래? 최두석 시인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고 물어온다. 녹두는 씨앗이고 꽃이다. 숙주는 나물이다. 어떻게 살래? 녹두장군이 붉은 꽃이라면 강증산은 붉은 씨알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그저 나물같이 한 세상 살다 간 사람이다. <2007년 새전북신문/ 김화성>

 

증산교 [甑山敎]

증산 강일순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 세운 여러 교단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구세제민(救世濟民)에 뜻을 두고 전국을 떠돌던 중, 1901년 김제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에서 깨달음을 얻고 후천개벽(後天開闢)과 후천선경(後天仙境)의 도래를 선포하였다. 동시에 해원(解寃)·상생(相生)·보은(報恩)·원시반본(原始返本:인간과 사회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감) 등의 이념을 바탕으로 후천세계의 건설을 위한 종교의식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하였다. 이 천지공사가 바로 증산교의 기본 교리로, 천상의 신명세계를 통일하기 위한 신도공사(神道公事), 땅의 기운을 통일하기 위한 지운통일공사(地運統一公事),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기 위한 세운공사(世運公事), 새로운 통일종교의 출현을 위한 도운공사(道運公事)로 세분된다.

강일순은 이후에도 계속 천지공사를 행하였으나, 1909년 39살의 나이로 죽은 뒤에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점차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의 부인 고판례(高判禮)가 1911년 흩어진 교인들을 모아 정읍 대흥리에서 다시
교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교단이 일명 선도교·태을교·훔치교 등으로 불리는 증산교 최초의 공식 교단이다.

그 뒤 증산교는 보천교(普天敎)·미륵불교·모악교(母岳敎)·증산대도교·제화교(濟化敎)·태을교(太乙敎) 외에 도리원파(桃李園派)
교단, 문공신과 김병선의 교단 등으로 분열되었다. 또 조철제(趙哲濟)의 무극대도교, 이상호(李祥昊)의 동화교(東華敎), 장기준(張基準)의 순천교(順天敎) 등 강일순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여러 교단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제의 심한 탄압과 1936년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인해 모두 해산되고, 그 가운데 일부가 지하로 들어가 활동하면서 오늘날의 증산교단을 형성하는 모태가 되었다. 대표적인 교단으로는 증산도·대순진리회·태극도 등이 있다.<두산백과> 

 

동학 [東學]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였다.

동학의 발생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 최제우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창시는 지배층의 착취로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19세기 후반의 사회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西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또한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되며 미륵신앙, 도참사상 등 다양한 형태의 반봉건적 민중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유(儒)ㆍ불(佛)ㆍ선(仙)과 같은 기존의 사상들로는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포덕문)을 내기 위해서도 천명(天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겨 당시의 여러 사상들을 정리ㆍ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유(儒)ㆍ불(佛)ㆍ선(仙)이 비록 뜻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 근원은 모두 하늘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학은 이 세 가지 도(道)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점을 버린 것이라고 밝혔다.

동학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동학은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하므로 사람 대하기를 하늘을 섬기는 것처럼 경건하고 겸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동학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 주며,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당시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동학은 1894년 전봉준(全琫準) 등이 주도한 대규모 농민봉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동학과 이 사건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동학이 주체가 되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는 견해에서는 이 사건을 ‘동학혁명’, ‘동학운동’ 등으로 나타낸다. 반대로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았으며 봉건사회와 외세의 수탈에 맞선 농민의 항쟁이 주된 측면이었다는 견해에서는 ‘동학’이라는 표현을 넣지 않고 ‘1894년 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반봉건ㆍ반외세의 농민전쟁이 주된 측면이지만 동학이 조직 동원이나 사상에 미친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서는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나타낸다.

동학의 역사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1824 ~ 1864)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신분 때문에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는 오랜 수도(修道) 끝에 1860년 5월 7일(철종 11년 4월 5일) 깨달음을 얻어 동학을 창시했고, 포교(布敎)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경주ㆍ영덕ㆍ대구ㆍ청도ㆍ울산 등 14곳에 접소(接所)와 접주(接主)를 두고, 전체 교인의 수가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동학의 교세는 매우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최제우는 1864년 1월 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4월 15일에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최제우에게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최시형(1827년 ~ 1898년)은 동학이 불법화되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도 교단 조직을 정비하고 최제우의 글을 모아 경전을 편찬하는 등 조직 확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1880년대에 동학의 교세는 영남 지방을 벗어나 호남ㆍ충청ㆍ경기 지방까지 확대되었고, 1890년대에는 경상ㆍ전라ㆍ충청의 삼남(三南) 지방을 거의 포괄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동학은 포접제(包接制)로 교도들을 조직했는데, ‘포(包)’와 ‘접(接)’마다 포주(包主)와 접주(接主)를 두었다. 일부에서는 대접주(大接主)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포(包)와 접(接)의 운영에는 육임제(六任制)를 실시했는데, 교장(敎長)ㆍ교수(敎授)ㆍ교집(敎執)ㆍ교강(敎綱)ㆍ대중(大中)ㆍ중정(中正) 등의 여섯 가지 직임(職任)으로 나누어 교화와 조직 관리 등을 나누어 맡게 했다.

한편, 1871년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교조신원(敎祖伸寃)을 내세워 동학 교도들을 모아 민란(民亂)을 일으키려 했던 이필제(李弼濟)처럼 당시 동학에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동학 조직을 사회 개혁에 이용하기 위해 입교(入敎)하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1880년대 후반 이후 교세가 급격히 확장된 호남 지역에서는 빈농과 몰락농민의 참여가 많았으며, 전봉준(全琫準)과 서인주(徐仁周)처럼 신앙 경력이 짧은 새로운 지도자들이 교도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종교 활동보다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중단, 탐학한 지방관의 징치(懲治),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의 추방 등 농민의 이해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들어서 최시형, 손병희(孫秉熙1861년 - 1922년) 등의 동학 교단 지도부와는 독자적인 경향과 움직임을 나타냈는데, 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학의 교단 지도부는 북접(北接), 이들은 남접(南接)이라고 불렸다.

북접과 남접의 분화는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의 과정에서 뚜렷하게 진행되었다. 1892년 10월 최시형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만류했지만, 남접의 서인주 등은 공주에서 독자적으로 교도들을 모아 집회를 열어 교조인 최제우의 신원(伸寃, 억울함이나 원한을 품)과 가렴주구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11월에는 북접의 교단 지도부도 참여하여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었으며, 12월에는 충청도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893년 2월 11일부터는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하였다. 당시 손병희 등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고종의 전교(傳敎)를 받고는 3일 만에 서둘러 해산했지만, 서인주 등은 미국ㆍ프랑스ㆍ일본 등의 영사관ㆍ학당ㆍ교회당 등에 ‘척왜양(斥倭洋)’의 괘서를 붙이며 정치운동을 벌였다. 또한 3월 10일 즈음에 충청도 보은, 전라도 원평, 경상도 밀양 등 삼남 지방에서 동시에 집회를 열었는데, 이들 집회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반봉건ㆍ반외세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다. 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한 최시형 등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된 어윤중(魚允中)에게 왕의 윤음(綸音)을 전달받고는 집회를 서둘러 해산시키고 잠적해 버렸다. 그리고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법소(法所)와 도소(都所)를 설치해 교단 조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남접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꾸준히 농민 봉기를 준비하였으며, 1893년 11월에는 고부(高阜,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서 봉기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다. 당시 고부의 이장(里長)과 집강(執綱)들에게 보낸 격문에 따르면, 전봉준은 고부를 점령하여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일삼던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처형하고, 전주 감영을 함락시킨 뒤 한양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옮겨가게 되자 거사 계획은 중단되었으나, 1월 9일 조병갑의 재임이 결정되자 전봉준 등은 1월 10일 봉기를 일으켜 1월 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고부 봉기). 그리고 조정에서 안핵사(按?使)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농민군을 탄압하자, 전봉준은 무장(茂長,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서 손화중(孫化中)과 함께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하며 각 지역에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해 봉기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을 출발하여 3월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했으며, 3월 25일에는 백산(白山)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어 조직과 투쟁방향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3월 27일부터 태인ㆍ금구ㆍ부안 등으로 진격하여, 4월 7일에는 황토현(黃土峴)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1차 봉기).

하지만 전주성에서 농민군과 관군의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조정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여 청군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만에 도착했다. 그러자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출병을 계획하여 나라의 상황이 매우 위급해졌다. 이에 농민군은 5월 7일 관군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전주 화약). 그리고 전라도 53개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6월 21일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 내각을 세우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9월 12일 농민군은 다시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삼례로 집결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시형의 북접 교단은 농민군의 2차 봉기에 반대하여 남접과의 관계 단절을 알리는 고절문(告絶文)을 각 포에 돌리고, 농민군을 토벌하자는 ‘벌남기(伐南旗)’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중도파의 조정으로 북접 교단도 2차 봉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여 농민군은 9월 하순에 한양을 향해 북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1월 8일 공주 우금치(于金峙)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대패하여 농민군은 논산, 금구 등지로 후퇴하였고, 태인 전투에서도 패배한 뒤 전봉준이 이끌던 농민군 주력부대는 해산되었다. 그 밖의 지역에서 봉기한 농민군도 12월을 고비로 대부분 진압되었고, 전봉준도 순창(淳昌)에서 일본군에 사로잡혀 이듬해 3월에 처형되었다(2차 봉기).


동학 본문 이미지 1


농민전쟁이 패배로 끝난 뒤에 동학은 더욱 심한 탄압을 받았고, 살아남은 북접 지도부는 도피 생활을 하며 조직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손병희(孫秉熙)ㆍ손병흠(孫秉欽)ㆍ이용구(李容九) 등의 노력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새로 교세를 넓히기도 하였으나, 최시형마저 처형되면서 존립의 어려움을 겪었다. 1897년 최시형에게 도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교단 조직 정비에 나섰으나, 1901년 손천민(孫天民)ㆍ김연국(金演局) 등의 핵심 지도부마저 관군에 사로잡히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망명중이던 손병희 등은 일본과 협력하여 국내 활동의 기반을 넓히려 하였다.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고, 경의선ㆍ경원선 철도를 부설하는 데 동학교도를 동원했다. 진보회도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나, 일본군의 후원을 받던 일진회(一進會)의 압박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김연국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포교의 자유를 얻었으며, 1904년 12월에는 진보회를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그리고 1905년 12월 1일에는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었으며, 1906년 1월 손병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도주(大道主)가 되었다. 그러나 1906년 8월 교단 내부의 갈등으로 이용구 등에게 출교 조치를 하여 일진회와 분리했으며, 이용구 등은 김연국과 함께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었다.

동학의 사상
동학 사상의 요체는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21자의 한자(漢字)로 표현된다. 동학은 우주 만물이 모두 ‘지극한 기운[至氣]’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에 기초해 있다. 하늘[天]ㆍ땅[地]ㆍ사람[人]ㆍ정신[神]ㆍ마음[心]은 모두 지기(至氣)의 표현일 뿐이므로, 하늘과 사람은 애당초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지기는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사람도 누구나 지기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이처럼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다. 천주를 몸과 마음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처럼 동학은 ‘지기(至氣)’를 중심으로 한 일원론적인 우주관에 근거하여 하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으며 평등하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며, “천심이 곧 인심(天心卽人心)”이다. 특히 동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은 하늘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기의 조화를 깨닫고 마음에 잘 보존하려면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수양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성(誠)ㆍ경(敬)ㆍ신(信)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최시형은 하늘을 모시는 ‘시천주’에서 나아가 하늘을 기르는 ‘양천주(養天主)’를 주장하며 수양을 강조했다. 그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경(敬) 개념과 결부시켜 경천(敬天)ㆍ경인(敬人)ㆍ경물(敬物)로 나누어 구체화하였으며, 하늘과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하늘을 속이지 말라는 무기천(毋欺天), 하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무만천(毋慢天) 등 ‘십무천(十毋天)’을 양천주를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동학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중시하는 사상적 특징을 지닌다. 동학의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은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하며,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로 보았는데,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동학이 지향한 세계는 극락이나 천당과 같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실현되는 동귀일체의 공동체이다. 동학에 입도하여 조화의 이치를 깨닫는 것도 “그 날부터 군자가 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될 것이니 지상 신선 네가 아니냐”(포덕문)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천상’이 아니라 ‘지상’을 지향한 일임을 강조한다.

동학은 이와 같이 각자위심에서 비롯된 사회적 혼란에서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혁명성을 담고 있다. 동학은 이러한 사상적 특징을 기반으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온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포덕천하(布德天下)’를 내세우고 당시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현세지향적인 교리는 동학이 19세기의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서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성리학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구실을 맡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