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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

백수.白水 2014. 2. 28. 19:49

 

회암사지(檜巖寺址) 보기는 ☞ http://blog.daum.net/ybm0913/2711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1976년에는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하였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춧돌의 수가 532개나 된다.

이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물(石物)이 남아 있는데, 길이 12자, 너비 9자, 두께 1자, 깊이 3자이며, 이 옆에는 역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과 기름틀이 있다.

또한 본당 뒤에는 사방 6자의 떡안반이 있다.

이 사지에서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와 보물 제388호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쌍사자석등(檜巖寺址雙獅子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제49호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회암사지부도탑이 있다.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0년부터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회암사지선각왕사비 [檜巖寺址禪覺王師碑]

 

고려 말의 승려 선각왕사 나옹(懶翁, 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하여 왕의 명으로 세운 비이다. 회암사는 고려 공민왕13(1364)에 나옹이 깨달음을 얻어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던 곳이며 공민왕 19년 이후 주지로 머무른 곳이다.

비는 어떤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 내용을 돌등에 새겨 세운 것으로, 불교에서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승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부도와 함께 건립되었다. 비는 아래로부터 귀부 - 비몸 - 이수로 구성된다. 비는 절터 북서쪽 능선에 위치하는데 귀부 - 비몸 -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형태가 섬세하지 못하지만 용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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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 회암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로 1377(우왕 3) 건립되었다. 높이 3.06m, 너비 1.6m이며 196392일 보물 제387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비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석(蓋石:위에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 덮어 얹는 돌)이 없다.

 

즉 이수(螭首; 비의 머릿돌)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비신의 상부에 쌍룡을 깊게 조각하고 그 중앙에 제액(題額: 비의 명칭)을 만들어禪覺王師之碑’6자를 새겼다. 글자의 크기는 22.4, 제목의 크기는 11.2이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권중화(權仲和)가 예서로 쓰고 전액[篆額: 전자(篆字)로 쓴 비갈(碑碣)이나 현판의 제액(題額)]도 하였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비문에 따르면 왕사의 휘는 혜근(惠勤), 호는 나옹(懶翁), 초명은 원혜(元惠)이고,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며, 선각은 시호이다.  1320(충숙왕 7)에 태어나 1344년에 회암사에 입문하였다. 1348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법의·불자(拂子: 번뇌를 물리치는 표지물범서를 받았다.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대사를 연도(燕都)의 광제사(廣濟寺)에 주거하게 하고, 금란가사와 폐백을 하사하였다.  또한, 1358(공민왕 7)에 귀국하여 왕이 가사와 불자를 하사하고 신광사(神光寺)에 주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구월산·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에 들어와 절을 크게 중수하고, 뒤에 1377년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을 행하였다. 후미에는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이 비의 글씨는 예서로서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가 예서인 이후, 고려 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 당시는 중국에도 원(()을 통하여 예서가 쓰여 지지 않을 때였으므로, 당시 우리나라의 예서 또한 연구가 어느 정도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데, 이 글씨는 상당히 예서를 연구한 면이 보인다.  동국금석평에는 나옹비는 팔분서(八分書: 예서 이분쯤과 전서 팔분쯤을 섞어 만든 한자의 글씨체)인데 태정(太整)하나 신채(神彩:훌륭한 풍채)가 없다고 평하였으나, 결구도 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방불하게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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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몸 원형은 2001년도부터  경기도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음.

 

 

天寶山(423m)

 

 

 

 

 

 

 

 

 

 

 

 

 

 

 

 

108바위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최초의 비석에 사용되었던 석재(사각받침석. 연꽃형태의 지붕)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부도)과 쌍사자석등

 

 

 

쌍사자석등 (左: 보물제389호)   무학대사탑(右, 보물388호)

 

 

 

 

 

지공선사부도비(指空禪師浮屠碑)

 

 

 

 

 

 

 

지공선사부도비는 지공선사의 유래를 기록한 비이다. 원래의 부도비는 이색(李穡)이 찬하고 한수가 글씨를 써서 1378(우왕4)에 건립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부도비의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4년무자오월 일립(崇禎紀元後 四年戊子五月 日立)으로 기록되어 있어, 1828년 순조28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도비 옆에는 귀두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지공선사 부도비의 귀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도비 형태는 옥개석. 비신. 비좌. 지대석의 구조이다. 규모는 옥개석이 140×78×50cm이며, 비신이 96.7×27.5×238sm, 비좌가 147.5×78.5×63cm, 지대석이 165×211×19cm로 총 높이는 37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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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대사 석등

 

지공대사석 부도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儺翁禪師浮屠 石燈)

 

 

 

 

 

 

나옹선사 부도

 

나옹선사 석등

 

 

비어있으니 가득하구나 / 회암사지(檜巖寺址)

  생각이 사라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자연의 풍경이었다. 감히 그 정경을 두고 적멸이라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적멸에 다다라본 적은 없지만 내 상상 속에 그곳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적멸은 그저 그것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움직임보다 더 큰 움직임으로 남았던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그친 적멸은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움직임일 터이니 말이다. (이지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   입담 좋은 유홍준 교수는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어머니의 입을 빌려 폐사지를 망한 절이라 했다. ‘망한 절을 망했다 하지 않고 거기서 좋은 것을 찾아 말했으니 복 받을 일이라고도 했다. 불자들께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떨 때는 망한 절흥한 절보다 더 절답게 느껴진다. ‘장하던 금전벽우 잔재되고 남은 터에 쑥대와 방초만이 무성하고, 빈 공간에 염불소리와 목탁소리 대신 산새소리와 낙엽 구르는 소리만 쓸쓸히 흘러 다닌다. 적멸은 아니더라도 적요하기 그지없으니, 이 폐허가 바로 가장 큰 절간인 것이다.  양주의 회암사는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지만 지공화상에서 나옹선사, 무학대사로 이어지며 고려시대 불교를 크게 일으켰던 3대사찰의 하나였다. 조선 건국 후 억불숭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밑에서 그나마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조언자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의 존재로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끝내 소멸의 운을 맞게 된 것은 명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파국의 전야는 외려 화려했다. 불심이 두터웠던 문정대비(중종의 비, 명종의 어머니)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는 회암사에 머물며 불교중흥을 도모했다.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이룩한 보우는 1565(명종 20) 45일 낙성식을 겸한 성대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그러나 이틀 후 문정대비가 서거하니, 때를 기다려온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그는 사월초파일날 제주도로 유배되어 마침내 제주목사 변협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와 함께 회암사도 불길에 휩싸여 폐사되고 말았다.  이이의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에서 보여지듯 조선의 유가(儒家)들에게 보우는 요승이자 적승(賊僧)이었지만, 그는 본디 수도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며 종종 산천을 돌아보는 만행을 즐거움으로 삼던 숨어사는 현자였다. 그를 문정대비에게 천거한 것도 저잣거리에서 그와 어울리던 유가들이었다. 거부할 겨를도 없이 급작스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되면서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간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며 지배이데올로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다.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니/무엇 때문에 문밖으로 달려갈 필요가 있겠나/경계와 마음, 마음과 경계가 다른 경계 아니니/대지에 가득한 산과 강이 무엇인고/적적한 가을 멧부리에 성긴 비 지나가고/바람 앞에 푸른 풀잎 너울너울 춤을 (보우 오도송중에서)  세상과의 치열한 싸움도 끊기고 경계와 경계마저 허물어져버린 지금, 흙으로 돌아간 것과 흙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들이 모여 여기 또 다른 가람을 열었다. 그 폐허의 가람 위에 또다시 계절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눈이 내려쌓이면 그렇게 또 지워지는 것인지 채워지는 것인지 알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다만 비어 있으니 가득할 뿐이다.   늦가을 회암사지는 1만여 평의 빈 터에 적요만이 가득하다. 봄이면 그토록 흐드러지던 벚꽃나무의 잎마저 시들고, 여기저기 흩어진 주춧돌 사이의 잡초들 또한 서리 맞아 누렇게 변해만 갈 때 회암사지는 비로소 폐사지의 미학을 완성한다. 옛 부도전이었을 법한 곳에 남은 키 큰 부도 1기와, 절이 불탄 후 새로 지은 회암사 앞 언덕바지에 자리한 지공, 나옹, 무학 3화상(和尙)의 부도와 부도비, 석등 등이 옛 회암사가 남긴 유물들이다. 특히 조선시대 부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무학대사의 부도와 그 앞에 놓인 앙증맞은 쌍사자 석등이 눈여겨볼 만하다. 돌아오는 길에 소흘에서 고모리 쪽으로 길을 잡으면 늦가을 호숫가의 낭만적인 정취를 거쳐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  <글: 유성문 여행작가 / 뉴스메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