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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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길을

得道하고 싶은가… 소리내어 읽어라

백수.白水 2014. 3. 12. 17:26

 

낭독은 입문학이다/김보경 지음

 

 

 

속에 가지런히 누워있던 글자들이 일어난다. 기지개를 켠다. 목소리를 타고 흐르며 공간을 장악한다.
읽는 행위는 원래 묵독이 아니라 낭독이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쓴 ‘독서의 역사’에는 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를 말없이 읽자 군사들이 당황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한국도 18세기 즈음까지 책 읽는 방식은 주로 낭독이었다. 직업적 소설 낭독자인 전기수(傳奇)가 있었다.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낭독은 묵독으로 바뀌었고 묵독은 ‘개인적 독서’를 탄생시켰다. 이제는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은 교실 밖에선 왠지 어색한 일이 됐다.

저자(삼성경제연구소 사이버포럼 트렌드연구회 운영자)는 독서에 목말랐지만 혼자 하는 독서에 번번이 실패하던 터였다. 조용히 눈으로 읽는 묵독에서 최고의 방해꾼은 ‘딴생각’이다. 눈으로는 글자를 따라가지만 머릿속은 걱정거리와 잡생각이 끼어들기 일쑤. 그는 트렌드연구회 회원 1만5000명에게 e메일을 보냈다. 함께 모여서 소리 내어 책을 읽자고.

보통 독서모임이라고 하면 선정한 책을 각자 미리 읽은 뒤 모여서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 떠오른다. 저자는 그런 방식은 부담감 때문에 잠도 잘 안 오고 결국 이 핑계 저 핑계로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담 없이 독서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낭독 독서였다. 낭독의 장점은? 그저 돌아가면서 읽자는 거니까 미리 읽고 참석해야 한다는 전제가 없다. 누가 한 권만 들고 와도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읽으면 되니까 굳이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첫 모임에 27명이 모였다. 그리고 함께 어울려 낭독하는 독서모임 ‘북 코러스’가 꾸려졌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낭독한 지가 이번 달로 4년 10개월째. 그동안 열여덟 권을 같이 읽었다. 책 선정 기준은 ‘두껍거나 어렵거나 고전이거나’. 회원들의 추천을 받아 다수결로 책을 골랐다.

북 코러스가 그동안 소리 내어 읽은 책의 목록은 묵직하다. ‘화폐전쟁’(쑹훙빙) ‘권력이동’(앨빈 토플러) ‘총, 균, 쇠’(제레드 다이아몬드)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서양미술사’(곰브리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코스모스’(칼 세이건) ‘2000년의 강의’(김원중) ‘돈키호테’(세르반테스)….

낭독은 읽는 사람을 단순한 독자에서 스스로를 제2의 화자이면서 동시에 청자로 만들어준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낭독을 하자 읽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거나 읽다가 시작 부분에서 멈췄던 경험, 혹은 책 읽기가 지루하다는 편견으로 독서를 멀리했던 이들에게 이전과 다른 경험을 안겨줬다. 미래탐험가 박준정은 “빠른 호흡으로 책을 읽어 내리다 보면 어느덧 책 속에 생각이 몰입된다. 문장을 읽어 전해지는 이야기 소리와 눈 아래서 흘러가는 문장의 흐름이 겹쳐져서 리듬과 음률이 어우러진 입체 장면으로 연출된다”고 말한다.

‘서양미술사’는 688쪽, ‘코스모스’는 719쪽, ‘특이점이 온다’는 840쪽으로 내용뿐만 아니라 분량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13주에 한 권 정도를 읽는 느린 독서를 해왔다. 숨 가쁘게 질주하는 현대사회에서 거북이처럼 낭독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억압과 굴레에서 해방돼 스스로 인간다운 삶의 경지를 이해하고 나아가 후련한 자기 통찰력을 얻어 득도하기 위함”이라고 단언한다.

부의 시스템이 미래에 어떻게 변해 갈 것인지 알기 위해 토플러의 저서를, 생태주의와 온전한 정신의 삶을 알고자 ‘월든’을 읽었다. 극단적 미래 예측의 대표적 주장을 이해하려고 ‘특이점이 온다’를 낭독했다. 단순히 글자를 읽은 게 아니라 세상을 읽고 세상을 이해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원들은 달라졌다. 저마다 인문학적 교양인이라는 자각을 싹틔웠다. 당당해졌고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을 힘겹게 읽어가면서 도달한 어느 지점에서 책 속 장면이나 문장이 기억나는 대신에 ‘이렇게 깊이 있게 통찰하는 저자의 노력이란 참으로 위대하구나’라는 감동, ‘인생 함부로 사는 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한다. 노예 같은 삶에 매달리는 대신에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책을 덮고 나면 가까이 있는 아무 책이나 펼쳐서 소리 내어 읽어보고 싶다. “떠벌 떠벌 낭독하면서 사는 즐거운 인생, 이 험한 세상에 우리가 택할 가장 편리한 행복이다. 행복한 낭독자의 삶. 그것이 이 책의 진짜 주제이다.”(‘서문’에서)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