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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지리적위치상 개성, 서울 등 왕도의 목구멍에 해당하여 “咽喉之地”라 한다. 그러기에 전란을 겪을 때마다 전략적요충지로 요새화되었다. 그런데 요새화는 관방시설의 구축도 필요하지만 장기전에 있어 병참기지의 기능이 필수적이다. 고려무신정권(1232∼1270)은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했다. 그때 강화도에 모여든 난민들의 수는 4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급증한 인구를 부양할 막대한 량의 식량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왜란직후 전쟁 중에 떠도는 백성을 안주시키기 위해 농경지 개간에 힘쓰게 된다.이때 해안 저습지의 개간도 이루어 지게 된다. 또한 청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수도권의 주요피난처로 중요시된 강화와 남한산성의 성곽을 보수하는 등 방어체제를 정비하고 이를 계기로 강화도해안에는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고 이를 연결하는 성곽이 해안선 전체를 둘러싸게 되었다.
800여 년간 계속된 간척사업으로 강화도는 전국에서 5번째로 큰 하나의 섬이 되었다. 복잡했던 해안선은 지속적인 간척으로 단순해졌으며, 강화도는 130㎢의 간척평야가 조성되었다.
현재 강화도의 총면적은 424㎢로 경지면적가운데 논 면적이 76%를 차지하여 해발10m이상의 계곡충적지 논을 제외하고 모두 간척지에 조성된 논으로 볼 수 있다.
강화지역에는 강화도,고가도,황산도,송가도,석모도,매음도,교동도 등 수많은 섬들이 있었고 모든 섬들은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하였고 넓은 갯벌이 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장기간의 간척사업의 결과 이 섬들은 대부분 강화, 교동도,석모도 등 3개의 큰 섬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강화도는 별립산(416m) 고려산(436m) 혈구산(466m) 진강산(441m) 길상산(336m) 마리산(472m) 등 300∼600m급 산지가 동서방향으로 발달하고 그 산지사이는 평야지대가 넓게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 평야지대는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던 포구로서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인공평야인 것이다.
고려 말까지 마리산은 고가도(古家島)로 본도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가릉포와 선두포사이로 조수가 통해 선박이 다닐 수 있었다. 화도(華島)는 원래 섬이었는데 간척사업으로 본도에 연륙되면서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하게 되어 하도(下島)라 불렸는데 1937년에 화도로 개칭되었다. 중앙에 마리산이 자리 잡고 있어 그 여맥이 사방으로 뻗어 산지가 많다.
[글 출처] ●국토와 민족 생활사 / 최영준 논문 발췌
< 사진 Locus Solus>
강화도 간척전 지도 & 강화도 간척후 지도
[출처] 강화도 간척전 지도 & 강화도 간척후 지도|작성자 강화도팔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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