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사의 부속암자인 석굴암은 회룡사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절 아래 500m쯤 떨어진 갈림길에서 절과는 다른 길로 올라가야하는 독립된 암자로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선방(禪房)·요사채 등을 갖추고 있다. 1384년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무학대사와 함께 회룡사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선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 한때 피신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1948년 김구 선생은 이곳 석굴암을 다시 찾아 지역 언론인들에게 ‘石窟庵(석굴암) ‧ 불(불) ‧ 戊子 仲秋 遊此 金九(무자 중추 유차 김구)라는 친필을 써 주기도 했다. 석굴암 앞에 있는 큰 바위에 김구 선생 필적 암각문이 남아 있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 주민들은 이곳 석굴암에 위패를 모셨다
.
암석이 만들어 낸 不二門(불이문)
큰 돌로 여닫는 문을 만들었다.
극락전
미륵불
멀리 수리형상의 수락산이 보인다.
산신각
석굴암에서 보는 사패산능선
사패(賜牌)란 조선시대에 왕이 땅이나 노비를 하사할 때 주는 문서다. 사패산(賜牌山)은 선조의 여섯째딸인 정휘옹주(貞徽翁主)가 유정량(柳廷亮)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네이버 두산 백과에 나온 얘기이다. 이에 관한 더 이상의 상세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왕이라도 이런 산을 개인에게 주다니. 하늘이 우리에게 하사한 산이라 해야겠다
.
요사채인 보월당
석굴암에서 내려오는 길 아래로 회룡사가 보인다
회룡사에 관해서 전해지는 두 다지 이야기. 첫째는 설화는 왕자의 난 이후 태조와 태종의 사이가 멀어 졌는데, 끈질긴 함흥차사(咸興差使)들의 노력으로 태조가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가 이 절을 찾았고,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성계가 창업 전에 무학과 함께 이곳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했다. 태조는 근처 석굴암에서, 무학은 무학굴에서 머물렀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잠깐 동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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