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다. 935년(경순왕 9년) 10월 신라는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君臣)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하였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삭령바위와 임진적벽
영단 앞에서 본 장자리 이잔미성 쪽
앞으로 호로고루성이 보이고 멀리 파평산이다.
감악산이 보인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신라경순왕릉으로 가는 길(372번 도로) 우측에 있다. 2014년도에 조성이 되었다.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년~?)는 신라 마지막(제56대) 왕 경순왕의 왕자이다. 성은 김(金)씨, 휘는 일(鎰 또는 溢)이라 전한다. 신라 왕후의 적자임과 동시에 화랑 효종랑의 손자이다. 5남인 김분과 함께 고려에 귀순하려는 아버지 경순왕을 만류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나 금부리에서 충신 지사 일민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숭념을 발의하였다. 후에 개골산(皆骨山)에서 대절을 지켰으므로 그 증손에 이르러서야 대의를 실행한다는 명분으로 나라에 출사하게 되었다.
이찬을 지낸 효종랑의 적자인 경순왕은 사직이 불안정한 때에 대기에 올라 방국 수호의 책무를 지게된 것이다.
서라벌로 쳐들어온 직후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태조 왕건이 몸소 거느리고 온 1만의 기병까지 공산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승승장구하던 견훤은 경순왕 4년(930년) 1월의 고창 전투에서 왕건에게 대패하면서 주도권을 고려에 빼앗겼다. 재암성(載巖城)이나 고창(안동부)은 물론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개의 군현과 동해 바닷가의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에 이르기까지 총 110여 성과 부락이 고려에 항복하는 등 수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모두 상실한 신라는 이미 경주 지역의 지방 정권이나 다름없는 처지였고, 한편으로 고려는 국왕인 왕건이 직접 수도 서라벌을 방문해 경순왕을 찾아 위로하며 "예전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 (王公)이 오니 미덥기가 그지 없다."는 호평을 들을 정도로 서라벌의 민심을 얻었고, 경순왕의 종제 유렴(裕廉)을 질임으로하여 개경으로 데려가는 등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워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순왕 9년(935년) 10월, 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왕건에게 국토를 모두 바치고 항복할 것을 논의하게 되었다. 신하들의 의논도 엇갈리는 가운데 왕자가 나서서 강하게 반대했다.
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 [나라의 존망이라는 것이 천명(天命)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 《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이젠 더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없는데 버텨봤자 죄 없는 백성만 더 괴롭힐 뿐"이라며 끝내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고려에 보냈고, 왕자는 바로 금부리에서 두 아들 그리고 대의지사와 함께 세력을 이루었다가 시간이 흘렀고 개골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거하였다. 11월에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여 경순왕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서라벌을 경주로 고쳐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금부대왕의 얼자인 김은열의 묘지명에 태자공의 휘가 쓰여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아버지와 고려에 맞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마의태자의 행동은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비추어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는데, 오운의 《동사찬요》(東史纂要)를 비롯해, 안정복은 저서 《동사강목》에서 마의태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윤증이나 신흠 같은, 조선의 문인들이 마의태자의 행적에 대해서 읊었던 한시 작품들의 초의(草衣)' 또는 '신라왕자'(《상촌집》)로만 다루어질 뿐으로, '마의태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퍼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이광수가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 「마의태자」를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이 마의태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마의태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속에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부흥운동설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제외하고 마의태자에 관련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태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태자와 관련한 민간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김일(金鎰)이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다(다만 '김일'이라는 인명 자체는 1940년대 이후에야 새로 위패에 추가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자진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로, 마의태자와 그 누이동생 덕주공주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태자 관련 전승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2]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김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정종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석기인들의 눈금자?… 충북 단양서 눈금 새겨진 돌 발굴 (0) | 2014.06.17 |
---|---|
<13>남편을 건국 시조, 장군 만들고 자식들 강하게 키운 고구려 여인들 (0) | 2014.06.17 |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0) | 2014.06.10 |
<12> 바다를 제패한 아시아의 바이킹, 발해인들 (0) | 2014.06.04 |
<11> 바다를 지배했던 고구려 정신에서 배우자 (0) | 2014.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