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백수.白水 2014. 6. 10. 11:49

흐린 날씨 탓에 바다가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신령스러운 마니산의 生氣를 가슴속깊이 호흡한 상쾌한 산행이었다.

오를 때는 화도면사무소가 있는 상방리매표소에서 [5코스: 단군등산로 - 372계단 - 참성단]를 탔고,

내려올 때는 [4코스: 단군계단 - 1004계단(개미허리, 헐떡고개)]을 통해 다시 상방리매표소로 돌아왔다.

 

마리산은 고려 말까지 고가도(古家島)로 본도와 분리되어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 김포시 월곶면 민통선 안에 있는 묘적사에 들려 여공스님과 3시간 넘게 담소를 나눴다.

절을 옮겨야 하나보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렸으면 좋겠다.

 

 

 

 

참성단 사적 제136호

 

 

 

 

마니산엔 하얀꽃을 피우는 산딸나무가 유난히도 많이 자생한다.

 

초롱꽃

 

 

멀리 보이는 참성단

 

 

사진이나 지도에서 앞으로 보이는 곳이 남쪽이다.

 

 

 

 

 

 

 

 

 

마니산에는 팥배나무(위)와 소사나무(아래)도 군락을 이루며 많이 자생한다.

 

 

참성단

 

塹[구덩이 참, 낮을 점]

구덩이, 해자(垓子: 성 밖을 둘러싼 못), (땅을)파다, (해자에)빠지다, 낮다 (), 평평하다()

 

 

 

 

 

 

 

 

 

 

 

내가 '단군의 샘' 뚜껑을 열었더니...

 

마니산 '檀君의 샘'... 서린 뚜껑을 열다.

퇴마록에도 나왔던 마니산 참성단 '단군의 샘' / 역사스페셜

 

지금으로부터 4287년 전,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 참성단. 그 곳에 있는 단군의 샘은 예부터 소원을 이뤄주는 영험한 존재로 숭배되고 있었다. 어 느날 샘에 물이 끊기자, 마을엔 신이 노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기 시작했다.

 

참성단에 있는 '단군의 샘'. 뚜껑이 가려져 있어 하수구인지 샘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 민족의 영산강화도 마니산. 그 곳에 있다는 단군의 샘을 찾아 나선 것은 지난 421일이었다. ‘단군의 샘4287년 전인 기원전 2283, 단군이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해 쌓았다’(강화사·江華史)참성단(塹城壇)’ 인근의 샘이다.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마니산 꼭대기에, 그것도 바위를 뚫고 물이 치솟아 올라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온 곳이다. 신령하다 하는 곳은 으레 그렇듯, 이곳에 대해서도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여럿 전해오고 있다. 마니산 밑자락 화도면 상방리 주민 오명섭(68)씨는 자식 없는 사람이 샘물을 먹고 아이를 갖기도 했고, 정성을 빌어 소원을 이루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곳에 변이 생긴 것은 60~70여 년전인 1930~1940년대. 망해버린 조국을 한탄했기 때문이었을까? ‘감로수(甘露水)’를 뿜어내던 샘이 갑자기 활동을 멈춰버린 것이다.

마을엔 물이 끊어진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 여인이 이곳에서 생리대를 빨아 부정을 탔다는 주장과 똥물을 퍼부어 신이 노했다는 주장. 마을 노인들은 아직까지도 부정을 탔기 때문에 샘이 말라버렸다고 믿는다.

 

강화도 마니산 꼭대기의 참성단. 고려사엔 이곳에 대해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이라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오물을 버려 물이 끊겼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뭔가 다른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살펴야했다. ‘단군의 샘행사를 주관한 민족정기 선양 위원회 쇠말뚝 뽑기 운동본부의 소윤하 위원장은 신성한 장소로 숭배됐던 샘의 물이 왜 갑자기 끊겼는지, 혹시라도 인위적인 훼손의 흔적은 없는지를 살펴보려 한다수십 년간 밀폐된 채 방치돼 왔던 우물의 뚜껑을 열겠다고 나섰다.

 

고려사·강화사 단군이 제사지낸 곳

 

마니산이 있는 강화도(江華島)의 역사는 한반도의 태동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강도(江島)’화도(華島)’ 2개의 섬으로 이뤄진 강화도. 이곳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하점면 장정리 등에서 석기시대 유물이 채집된 바 있고, 하점면 부근리·신삼리 등지에선 고인돌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엔 국조(國祖)’ 단군과의 관계를 전하는 유적이 유달리 많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사적 136호인 참성단이다. 이곳은 절벽 위로 자연석을 쌓아 만든 일종의 신전. 하지만 언제 누가 어떻게 쌓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지 고려 원종 5(1264), 왕이 친히 이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과 강화도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 전한다(江華有摩利山 山頂有塹城壇 世傳檀君祭天壇)’는 고려사(·56, 지리지)의 기록, 고려 원종 11(1270)과 조선 인조 17(1639), 숙종 43(1717)에 단을 보수했다는 참성단 중수비의 비문 등이 전해질 뿐이다. 이 기록들은 1264년 이전에 이미 참성단이 지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마니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가 센 장소풍수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대표적 생기처의 하나.(주간조선 199948일자 참고) 그래서 그런지 마니산엔 기도하는 사람들, 기를 얻으려는 수행자들, 영기(靈氣)를 강하게 하려는 무속인들이 유달리 많다. 그런 마니산에서도 특히 기운이 강한 곳으로 꼽히는 장소는 정상을 300m 가량 남겨둔, 참성단 밑 길목의 반경 10m 내외. 강화군청은 이곳에 표지판을 설치, 등산객들에게 넘쳐나는 생기를 느껴보라고 권하고 있다. 문제는 이곳에서 발생했다.

 

능선 따라 쇠말뚝 박혀 있어

 

여깁니다.” 앞서가던 쇠말뚝 뽑기 운동본부의 권승정씨가 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쇠말뚝이 있는 곳입니다. 이 능선을 타고 연속적으로 발견되고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뽑은 것만 2, 이것까지 치면 3개째입니다.” 권씨가 말을 이었다. “발견하고도 아직 뽑지 못한 것이 하나 더 있고, 저쪽 건너편 능선에도 네댓 개 더 있어요. 다 합치면 마니산에서 지금까지 찾은 것만 10개쯤 됩니다.”

 

능선 옆에 있는 쇠말뚝(왼쪽)과 뽑아낸 말뚝(오른쪽)의 두께는 4~5에 달했다. 권씨가 손가락으로 능선 자락을 가리켰다. 진짜로 쇠말뚝이 하나 박혀 있었다. 말뚝은 산비탈을 향해 끝부분이 자로 살짝 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소윤하씨가 끌과 정으로 말뚝 주변을 쪼아내고 있었다.

이게 잘 안빠지네요. 두어 시간 더 해야 되겠는데. 작키(공구의 일종)를 가져와야 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밑에서 위로 쳐 올려 보세요. 주세요. 제가 해볼게요.” 권승정씨가 비탈로 내려가 해머를 잡았다. 그렇게 30분 가량 지났을까? 권씨가 다시 소리를 높였다. “? 움직인다. 뽑힐 것 같은데요. 나온다. 나옵니다.”

그래요? 봅시다. , 같이 합시다.” 소윤하씨가 거들었다. “하나 둘 셋~.” 소씨가 나무 등걸에 몸을 묶어 고정시킨 뒤 힘차게 말뚝을 잡아당겼다. ‘스윽소리가 났다.말뚝이 뽑혀나온 것이다. 쇠말뚝은 얼핏 보기에도 흉물스러웠다. 오랜 세월을 지낸 듯 거뭇거뭇 녹이 슬어 있었다. 길이는 80정도. 손을 내밀어 쥐어 봤다. 엄지와 중지 손가락이 간신히 맞닿았다. 굵기는 4~5쯤 되는 것 같았다. 소씨가 해머로 쇠말뚝을 두드렸다. ‘~~’ 종소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담금질을 여러 번 거친 무쇠는 이런 소리가 납니다. 들어보세요. 이건 수차례 열처리를 거친 무쇠입니다.”

 

말뚝을 뽑은 뒤엔 주변 흙이나 돌가루로 그 자리를 메워줘야 합니다.” 구멍 주변의 돌을 잘게 부수며 소씨가 말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셈이죠.” 권씨가 말을 받았다. “이쪽을 보세요. 여기 빈 구멍들이 있죠? 큰 말뚝이 있는 곳엔 항상 이런 공혈(空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공혈이 항상 7개란 점이에요. 나름대로 뭔가 의미가 있을텐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네요. 말뚝 뽑느라 경황이 없어서. 소윤하입니다.”

소씨는 1985년부터 전국을 돌며 100여개의 말뚝을 뽑아온 쇠말뚝 대부. 합천 모산재 무지개터, 북한산 백운대·탕춘대성, 여수 앞바다의 백도, 속리산 문장대·입석대, 설악산 수렴동, 진도 녹진 사달바위. 20년간 그가 뽑은 쇠말뚝은 말 그대로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었다.

 

서울대에 쇠말뚝 연대 측정 의뢰

 

소씨는 이 말뚝이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박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다. “증거가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이런 일엔 증거랄 게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말을 하거든요. 말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어김없이, 인근 주민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박은 것이라고요. 한두 곳도 아니고. 주민들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니산 관리사무소의 이희섭씨가 소씨의 말을 반박했다. “20~30년 전에 마니산 계단 공사를 위해 케이블카를 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뚝들은 아마 그때 박은 것일 겁니다. 버팀대로 쓰려고 말이죠.”

소씨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다면 여기 이 공혈들은 뭡니까. 불필요한 구멍들을 왜 7개씩이나 북두칠성 모양으로 뚫었을까요. 버팀대로 쓰려면 쇠말뚝을 외진 곳에 박을 이유가 없습니다. 굳이 생기가 강한 곳을 찾아, 그것도 가파른 곳을 골라, 눈에 안 띄게 박아넣을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주민 박희길(65)씨는 소씨의 편을 들었다. 박씨는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들은 말이라며 일제 때 이 마을에 장사가 나오지 못하도록, 일본 사람들이 혈을 끊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오명섭(68)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어렸을 때 들었습니다. 마을에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기혈을 끊었다는 거예요. 옆 봉우리 만경대 능선에도 쇠말뚝이 몇 개 더 있어요.”

 

오씨는 단군의 샘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참성단 옆에 있는 샘 말입니다. 거기에도 그랬다는 말이 있어요. 일본 사람들이 물이 안 나오게 못된 짓을 했다고.”

 

단군의 샘에서 백회를 발견하다

 

'단군의 샘' 뚜껑을 뜯어내기 전 고사를 지내는 모습. 뒤편에 보이는 소사나무는 분재에 주로 쓰이는 것으로 수m이상 자란 것을 찾기 어렵다. 이곳의 소사나무는 동···북을 행해 각각 2개의 줄기를 뻗어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소씨는 2000~2001년에 걸쳐 서울대에 쇠말뚝 연대 측정을 의뢰했다고 한다. “쇠말뚝 탄소 성분을 조사한 결과, 숯이 아니라 석탄으로 열처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1950년대 전까지 대부분 숯을 이용해 쇠를 다뤘어요. 석탄을 이용했다는 것은 이 쇠말뚝이 국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일본에선 1950년대 이전부터 석탄을 이용해 무쇠를 주조했습니다.”

 

소윤하씨가 말을 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기사(주간조선 2004226일자 참고)가 얼마전에 나왔잖습니까? 그 후 모 방송사에서 그게 말뚝이 아닌 것처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쇠말뚝 행사를 주관했던 일본 종교단체를 찾아가서 이게 쇠말뚝이냐고 물으면, 그 사람들이 쇠말뚝 맞다고 하겠습니까? 일본종교단체 주장을 왜 그대로 내보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보도된 사진을 확대 현상해 살펴봤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쇠말뚝이 아니라 제단의 다리라고 했는데, 사진을 살펴보면 제단 다리는 쇠말뚝과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요.”

 

어쨌든 오늘 이걸 뽑아서 참 다행입니다. 못 빼내면 내일 또 올라와야 했는데. 허허. 오늘 운이 참 좋네요. 이렇게 큰 것을 이렇게 금방 뽑아냈으니.”

일행은 산꼭대기로 걸음을 옮겼다. 정상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단군의 제단참성단을 중심으로, 한편으론 강화도가, 반대편으론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장관이었다. 참성단은 둥그런 밑단과 사각형의 제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둥근 형상은 하늘을 상징하고, 네모난 형상은 땅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고대 우주관을 표현하는 모양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관은 신라의 첨성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샘은 참성단 앞에 있었다. 입구가 나무 뚜껑으로 가려져 있어 하수구인지 우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기 쉬웠다. 고사를 지낸 일행이 뚜껑을 뜯었다.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흙더미와 오물을 치우고 청소하길 수시간. 수십 년간 빛을 보지 못했던 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돌 몇 개가 우물 복판을 떠억 가로막고 있었다.

 

저게 저기 왜 있나? 그 큰돌 말이에요. 그걸 빼낼 수 있겠어요?” 작업을 도와주던 청년에게 소씨가 물었다. 청년이 돌 틈으로 정을 박아 넣었다. “움직이긴 하는데. 빠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밑에 빈 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돌을 두드리면 울립니다. ?”

이야기하던 청년이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이게 뭐죠? 청년이 못으로 뭔가를 긁어냈다. 하얀 가루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백회네요.”

 

일행이 말을 받았다. “백회? 백회가 왜 있지? 어디 봅시다.” 소윤하씨가 손바닥에 백회를 올려놓고 살폈다. ‘백회는 연이어 나왔다. 밀가루같이 하얀 가루였다. 만져보니 매끈거렸다. 돌가루와는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백회인지, 백회라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뿌려넣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흘러들어간 것인지,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생겨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일행은 제각각 추측만 내놓을 뿐이었다.

 

소윤하씨가 결정을 내렸다. “만약 누군가가 백회를 뿌렸다면, 의도적으로 샘을 훼손한 뒤 부정을 탔다고 헛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란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일단 샘을 청소한 것으로 만족합시다. 돌을 치워보면 좀 더 다른 것을 알아낼 수 있겠지요. 지금으로선 어떤 예단도 하지 맙시다.”

 

일행은 소씨의 결정에 따라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했다. 샘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 60여년간 막혀있던 단군의 샘은 과연 다시 물을 뿜어낼 수 있을까? 땅거미가 어둑해졌다. 속절없이 석양만 저물어갔다[마니산=·사진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2004. 05.13]

 

 

 

 

 

 

 

 

 

 

 

 

 

 

 

 

----------------------------------------------------------------

김포 월곶면 용강리 묘적사에서

 

 

 

 

 

 

 

으아리꽃과 씨방

 

------------------------------------------------------------------------------------------------------------------------------------------------------

 강화 마니산길 (문산리~참성단~정수사)

천하명당 생기처(生氣處), 천제(天祭)올려 국태민안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 터뜨리던 날 배낭을 메고 강화 마니산으로 향했다.
강화 마니산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몇 개의 절터가 있다. 대부분이 고려 절터인데 남록(南麓) 흥왕리에 흥왕사(興旺寺)터, 왕륜사(王輪寺)터, 초피산 아래 묘지사(妙智寺)터, 북쪽 상방리에 묘통사(妙通寺)터, 문산리에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에 함께 ‘마니산에 있다(俱在摩尼山)’고 한 선수암(善首庵)과 정수사(淨水寺) 중, 절터는 물론 이름도 잊혀진 선수암 등이다.

오늘은 천제암궁지 길로 들어서서 참성단(塹星壇)과 마니산(摩尼山) 지나 정수사(淨水寺)로 가는 길을 잡는다. 요즈음에는 마니산이 국민관광지가 되면서 화도면사무소 옆 상방리 매표소를 기점으로 참성단에 오른 후 원점 회귀하는 산행을 하거나, 길게 능선 길을 가려는 이는 마니산을 넘어 함허동천으로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인 마니산 산행길이다.

그런데 마니산에 감추어져 있는 옛사람의 흔적을 더듬으려면 조금은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문산리에서 출발하는 산행길이다. 서울 방향에서 초지대교를 건너면 길상면이 되는데 문산리는 여기에서 서쪽 방향으로 직진해 화도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기 전 마을이다. 서울에서는 좌석버스 3100번, 일반 버스 60-2번이 이 길로 운행한다. 3100번은 신촌, 홍대, 합정을 지나 공항로를 통과해 이곳으로 오고, 60-2번은 5호선 송정역에서 이곳으로 운행한다. 운행시간에 간격이 길어 때로는 참을성을 요한다. 매사 튼튼히 하려면 전화로 확인하는 게 좋다. 3100번(032-933-2533), 60-2번(032-934-9105~6).

 

마니산 정상<br />

▲ 마니산 정상

 

마니산 옛사람 흔적 찾으려 문산리서 산행 시작

오늘은 3100번을 타고 와서 문산리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 안내판에는 강화시내버스 41번, 42번, 60번도 이곳을 운행한다는 안내가 있다.

길 건너편으로 나무 빛 신축 조립식 가옥이 보인다. 길을 건너 이 집 앞을 통과하면 이내 산골 계곡물을 만난다. 다니는 이가 없어 두고 온 그 옛날 고향 길 같다. 밭 갈던 늙은 농부가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보내온다.

이 길로 오르는 산객(山客)이 없다 보니 반가우신가 보다.

100여년 전에 불음면 두두미마을에 사시던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선생은 강화 구석구석을 유람하고 여행기를 시(詩)로 묶어 심도기행(沈都紀行)을 남기셨는데 그 때 이곳 문산동을 지나며 이렇게 읊었다.

摩尼東北是文山 (마니동북시문산)  마니산 동북 이곳은 문산리
某某家門在此間 (모모가문재차간)  모모 가문들이 이곳에 살고 있지.
士者先知農業重 (사자선지농업중)  선비는 농사의 중함을 먼저 알아,
時從野外勸耕還 (시종야외권경환)  때맞춰 들에 나가 밭갈이 권하고 돌아오네.

이 시 끝에 선생은 친절하게도 ‘이곳 문산리에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의령남씨(宜寧南氏), 청주한씨(淸州韓氏), 안정나씨(安定羅氏) 가문이 거주하고 있다’고 주(註)를 남기셨다.

 

마니산 금표석<br />

▲ 마니산 금표석

 

지금도 이 후손들이 살고 계시는지 궁금하구나.

이 계곡은 문산리 주민들의 식수원(食水源)이다. 이 물을 오염시키는 이가 있는지 무시무시한 경고판도 세워 놨다. 경고판이 아니더라도 이 길로 가려는 이는 절대로 손 한 번이라 담그지 말도록 부탁드린다. 누군가 손 씻은 물을 마실 다른 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다.

계곡을 따라 10여 분 오르면 오른 쪽 언덕에 ‘禁標(금표)’라고 새긴 큰 바위를 만난다. 근래에 세워 놓은 안내판이 있다. 내용을 보니,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고 마니산에서 벌채를 금하고 관청에서 양목(養木)하는 일을 주관한다는 표시’라고 써 놨다. 그랬을 것이다. 참성단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다 보니 금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강도지(江都誌:1694년 조선 숙종 때 학자 이형상 선생이 저술한 강화도 읍지)에는 이런 사정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마니산에 벌채를 금하고 나무를 기른다(摩尼山禁伐養木), 각 면에서 특별히 금송(禁松:소나무 벌목 금지)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었다(各面别定禁松監官 山直), 나무하기를 금지하여 나무가 뿌리 내리고 벼가 자리잡게 했다(使禁撨牧 而木根禾本)’.

이런 나라의 금령(禁令)들은 민초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을 비추어 보면 마니산 주변마을 민초들은 무슨 연료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겠는가? 땔감은 없고 나무하다 걸리면 곤장을 면치 못했을 그 날의 민초들을 생각하면 지금 아름다운 산길도 어느 땐가는 아픔의 산길이었던 것이다.


언덕에 금표(禁標) 표기된 큰 바위, 신성한 곳 암시

얼마 전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들렸더니 강화 각처에서 60여 개의 비석을 모아다 세워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게 중에는 금표도 하나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가축을 풀어 먹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放生畜者杖一百, 棄灰者杖八十)’. 거름이 귀한 시대였으니 가축 똥이나 재가 귀한 비료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백성을 이렇게 두들겼으니.. 요즘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땡잡은 것이다.

금표에서 다시 계곡을 끼고 오른다. 10여분 지났을까 너른 평탄지에 군데군데 벌목된 나무들이 보이고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본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가고 우측으로 갈라진 길이 산등성이로 비스듬히 오르고 있다.

 

참성단<br />

▲ 참성단

 

우측 산등성이길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넓은 평탄지가 나타나면서 천제암궁지(天祭庵宮址)를 만난다. 좌측은 천재궁이 있던 3단 축대와 4개의 돌기둥이 있고 우측은 넓은 절터와 샘이 있다. 안내판이 서 있는데 지방기념물 24호라고 한다. 안내판 내용은, ‘이곳은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기와 제물을 준비하던 천제암이라는 재궁터(齋弓址)이다. 고려 때 목은 이색의 시판(詩板)이 있었고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내용이 강도지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천재궁(조선시대에는 齋로 썼는데 현재는 祭로 바뀌었다)은 하도면 마니산에 있다. 제관이 재를 지내기 위해 머무는 곳이다. 우리 태종대왕이 고려 말에 대언벼슬을 하고 계실 때 이곳에서 재를 지내기 위해 머무셨다(天齋宫在摩尼山 屬下道面 祭官齋宿之所 我太宗大王 麗末以代言 齋宿于此)’.

이곳에 걸렸다는 목은 이색(李穡)의 시도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실려 전해진다. 다만 천재궁이 아니라 참성단에서 소개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국역본 심도기행에서)

“분향하고 앉았는데 곁에서 시를 읊네 (樊香淸坐側吟頭)
텅 빈 실내는 배(舟)처럼 작구나! (一望虛明小似舟)
기분 좋은 가을 햇빛 문을 열면 들어오고 (最愛秋光開戶入)
산 그림자는 뜰에 가득 머무누나. (更邀山影滿庭留)
몸에는 먼지 없으니 봉황(鳳)을 탄 느낌이고 (身輕無垢思騎鳳)
세상 일 잊은 마음 갈매기(鷗)와 친하려네. (心靜忘機欲近鷗)
연단(煉丹)을 먹지 않아도 신선이 되는 길은 (不用煉丹永羽花)
육정(六情)을 청소하면 저절로 자연의 도를 깨치네(掃除六鑿更天遊)”
목은 이색은 다분히 도가(道家)의 깨침 같은 시(詩)를 읊고 있다.

내용으로 볼 때 이 시(詩)는 아마도 참성단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천재궁은 처음에는 봉천(奉天)을 준비하던 곳이었는데 속수증보강도지를 보면 중간에 제천당(祭天堂)과 천재암(天齋庵)으로 갈려 재직(齋直)과 승려가 각각 관리(1639년 인조 17년)하다가, 1883년 (고종 계미년)에 폐기되었고 천재암에 있던 작은 금동불상들은 전등사로 이관 된 듯하다.


 

정수사 삼성각<br />

▲ 정수사 삼성각

 

고종 때 천재암 작은 금동불상들 전등사로 이관

이제 천재궁을 떠나 산길로 향한다. 천재궁터 샘물 옆으로는 우뚝 선 바위들이 병풍처럼 드리웠는데 희미한 각자(刻字)가 보인다. 탁본(拓本)해야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것 같다. 호젓한 산길은 정상을 향해 이어진다. 이윽고 화도면 상방리 매표소에서 오르는 계단 길과 만난다. 119 소화기가 서 있는데 마니-8 구분 번호가 붙어 있다.

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기(氣) 받는 160계단이라는 표지도 보이고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라는 설명판도 보인다. ‘기(氣)는 만물을 움직이는 그 어떤 근본적인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참성단이 전국 최고의 생기처라고 한다. 상방리 매표소 쪽 안내판에는 기(氣) 측정 결과를 비교표로 작성해 놓기도 했다. 미국 새도나(Sedona)도 기(氣)의 도시라 하니 모르긴 해도 기(氣)가 무언가 있기는 있는가 보다. 그러기에 옛 분들도 ‘기죽는다, 기산다’고 하신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기를 생각하면서 30 여 분 치고 오르니 어느덧 참성단(塹星壇)이다. 塹과 星의 글자 조합이 아무래도 불편하다. 옛분들은 塹城壇 또는 參星壇이라 표기해 조화를 맞추었다. 심도지(沁都誌) 사단(祠壇)조에 참성단이 소개되어 있다.

 

천제암 궁지<br />

▲ 천제암 궁지

 

‘참성단은 마니산 정상에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단군의 제천터라 한다. 우리 조선이 고려를 이어서 여기에서 별에 제(醮星)를 지냈다 (塹城壇 在摩尼山上頂 世傳檀君祭天䖏 我朝仍髙麗之舊 醮星于此). 또 세상에 전해지기를 단군께서 삼자(三子)에게 쌓도록 했다(世傳檀君 使三子築之) ’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제를 지낼 때에는 조정에서 축문(祝文)이 내려 왔다.

국조 단군이 쌓으시고 태종이 재숙(齋宿)하던 곳이었으니 당연히 중시했을 것이다. 이제는 사적 136호로 지정됐고 150년 된 소사나무는 천연기념물 502호로 지정되어 보호돼 있다.

참성단에서는 사방 시야가 탁 트여 있다. 100 여년 전 화남 선생도 이곳에 올라 온 주위 섬들을 바라보았다.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매음도(媒音島), 사도(蛇島),석모도(席毛島), 미법도(彌法島), 서검도(西黔島), 동검도(東黔島), 말도(唜島), 볼음도(乶音島 ; 혹은 望島) 등을 바라보면서 망도서(望島嶼)라는 시(詩)를 남기기도 했다.

주변을 내려다보면 마니산이 불쑥 솟은 화도면(華道面) 주위로 간척을 한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다. 본래 이곳 마니산은 강화 본섬과 떨어진 별도의 작은 섬이었다. 1706년 숙종 때 강화유수 민진원이 간척해 지금처럼 하나의 섬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 화도면(華道面)은 1937년까지 아래 섬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하도면(下道面)이었다.

 

또 다른 절터<br />

▲ 또 다른 절터

 

참성단을 내려오니 거리표지판이 붙어 있다. 정수사 2.8km, 함허동천 2.65km. 앞쪽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로 오른다.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472.1m 고도가 표시된 마니산 정상목이 서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곳 봉우리 높이는 455m로 정상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는 표지목이다. 정상은 동남쪽 전방 1km 쯤에 우뚝 선 봉우리가 469m 정상이라 한다. 아마도 이곳으로 가는 길이 암릉길로 위험하니 이렇게 배려한 것인 듯하다.

정수사 가는 길로 내려선다. 방향은 동남쪽 암릉길이다.


국조 단군왕검 영험이 깃든 전국 제일 생기처

바위에 지방문화재 13호인 참성단중수비(塹星壇 重修碑)가 새겨져 있다. 글자는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는데 다행히도 원문과 번역문을 안내판에 기록해 세워 놓았다.

감사하구나. 중수 기록의 내용은, 참성단이 오래 되어 무너진 곳이 많으므로 숙종 43년(1717년)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별장 김덕하, 전등사 총섭 신묵(愼黙)에게 중수토록 하여 열흘이 못되어 중수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신묵이 바위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길은 암릉길로 이어진다. 다행히 예전과는 달리 안전 로프로 길을 잇고 계단을 설치해 쉽게 암릉을 지날 수 있게 해 놓았다. 심하게 꺼진 부분은 나무로 다리를 놓았는데 칠선녀다리이다.

정상을 지나고 소나무 보호수를 지나 114계단에서 고도를 떨구면 정수사 갈림길이 나온다. 좌로 초피산(椒皮山)이 보이고 함허동천 1.8km, 정수사 0.7km를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우측 정수사길로 방향을 잡는다.

길은 암릉길인데 위험보다는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암릉이 끝나는 지점 다소간의 너덜길을 지나면 고즈넉한 정수사가 나타난다.

정수사(淨水寺). 강화에서 비교적 숨겨져 있는 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시절 회정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으나 기록은 1426년(조선 세종8년) 함허선사가 중창했다 한다. 이 때 법당 왼편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기에 절 이름을 '精修'에서 '淨水'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에 조예가 깊어 그런지 함허득통(涵虛得通)대사의 茶를 주제로 한 선시(禪詩)들은 격조가 깊다.

一椀茶出一片心(일완다출일편심) 한 잔의 차에 한 조각 마음나네,
一片心在一椀茶(일편심재일완다) 한 조각 마음 차 한 잔에 담겼네.
當用一椀茶一嘗(당용일완다일상) 마땅히 이 차 한잔 마셔보시게,
一嘗應生無量樂(일상응생무량낙) 한 모금에 한량없는 즐거움 생긴다네

 

함허대사 부도

▲ 함허대사 부도

 

정수사는 초파일 준비에 한창 바쁘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연등이 가득 달렸다. 이 대웅보전은 보물 161호로 보호되고 있다. 세종5년(1423년) 중창되고 숙종 15년(1689년) 수리한 기록이 있다 한다. 3간의 작은 건물인데 절 대웅전답지 않게 툇마루가 있으며 가운데 간(間) 문을 장식한 만병(滿甁)에 가득한 꽃이 경이롭다. 올려다보면 마주치는 천정의 여러 목조 장식들도 비전문가에게조차 흥미를 끌게 한다.

이제 절 동쪽 언덕에 자리잡은 향토유적 19호 함허대사의 부도(浮屠)를 만나러 간다. 소나무 아래 정좌한 모습이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바다도 시원하게 보인다. 설명안내판이 서 있는데 함허대사가 이곳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대사는 무학대사에게 공부하고 여러 절에서 수행 및 제자를 길렀는데 문경 봉암사에서 입적했다. 이에 그 사리를 5군데로 나누어 봉안하였으니 문경 봉암사, 가평 현등사, 강화 정수사, 황해 연봉사, 인봉사라 한다.


숨겨진 고찰 정수사 인근엔 함허대사의 부도(浮屠)

대사의 부도가 있는 곳에서 동쪽 능선으로 50여m 나아가면 능선 아래로 또 하나의 잘 다듬어진 절터가 있다. 뒤로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렀고 초석 및 장대석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바위에 불상을 그린 선묘(線描)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내력을 알 수 없어 궁금함을 품고 정수사로 돌아온다.

강도지(1694년)에는 예전 안평대군이 사경한 묘법연화경 5권이 정수사에 있었는데 지금 단지 3권이 남았다는 글이 보인다 (舊有安平大君所寫妙法蓮花經五卷 金字輝碧 精妙可珎 二卷見失 只有三卷云). 지금까지 남았더라면 아마도 국보가 됐을 것이다. 이제 정수사를 뒤로 하고 내려간다. 500여m 내려가면 해병상륙공작대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 앞쪽으로 함허동천 넘어가는 숲길이 있다. 기왕 온 길 함허동천을 들려 근처에 있는 한말(韓末) 대학자 이건창 선생 생가를 찾는다. 집 앞 사기리에 400년된 탱자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출처: 이한성 동국대교수의 옛절터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