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지도 크게 보기 ☞ http://blog.daum.net/macgyver/16155034
대부분 양주시청에서 출발하여 주능선을 따라 갈림길 - 삼거리 - 십자고개 - 상봉 - 상투봉 - 420m봉 - 임꺽정봉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420m봉으로 내려와서 남쪽面에 있는 악어바위를 구경한 다음에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길을 택하게 되는데...
나는 대교아파트 - 악어능선(복주머니바위 - 악어바위 - 코끼리바위 - 공깃돌바위) - 420m봉 - 임꺽정봉 - 암봉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임꺽정봉 - 420m봉 - 상투봉 - 상봉 - 십자고개로 내려와서 남쪽面으로 방향을 틀어 백화암 - 임꺽정생가터 - 양주관아터를 둘러보는 길을 잡았다.
양주 불곡산(楊洲 佛谷山)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에 걸쳐 있는 산이다(고도:470m). '불곡산(佛谷山)'이라고도 불린다.
『대동여지도』에 '양주의 진산'으로 나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경표』에는 '한북정맥에 속하는 산'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고을 뒤의 주산(主山)이다. 우음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이다."는 기록이 있다.
산 남쪽 기슭의 유양동은 옛 양주목의 읍치로서, 동헌과 향교를 비롯해 문화유적들이 산재하고 있다.
산 중턱에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백화암이 있다. 백화암은 창건 당시 불곡사라 불렸다고 하며, 절 밑에 있는 약수터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혹한에도 얼지 않는다고 전한다.
다른 지명인 불국산은 불국토(佛國土)로 인식하려는 사상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여지도서』에 불국산으로 표기된 이후 불곡산과 불국산이 혼용되고 있다. 『양주목읍지』의 지도에는 정조가 이곳에 행차하였을 때 옥류산(玉流山)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불국산은 『양주 땅이름의 역사』에 의하면 19세기 말 일본이 제작한 지도에서 불광산(佛光山)으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위에서 나오는 주산(主山)과 진산(鎭山)은 보통 같은 개념으로 쓰이나, 주산(主山)이란 북쪽 산 즉 후현무(後玄武)라는 방위개념으로, 진산은 진호(鎭護)하는 산으로 한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국산(佛國山) 불광산(佛光山)등의 이칭이 있다고 하는데... 불곡산(佛谷山)이 가장 오래된 이름으로 옛날부터 절(신라 때 창건된 백화암)이 있었기에 그 계곡을 절골, 부처골, 한자이름인 불곡(佛谷) 등으로 불러오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불곡산(佛谷山)이라는 산의 전칭(全稱)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대교아파트에서 오르다보면 임꺽정봉과 악어바위로 가는 길이 갈리는데... 악어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 오르니 채석장자리에서 암벽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불곡산은 이렇게 산기슭에서부터 정상까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채석장을 지나니 산기슭에 담장형태의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이 흔적이 고구려보루의 축성흔적인지 아니면 다른 성터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시야가 확 트인 봉우리에 자리 잡은 양주지역 보루는 대부분 100~200m의 작은 규모로, 거리는 500m 간격을 두고 구축됐다. 불곡산 보루는 총 9개소가 있다. 이 가운데 2보루, 5보루, 9보루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됐다. 나머지 보루는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보루 축조형태가 같기 때문이다. <최진연>”
복주머니바위
복주머니바위 아랫부분의 모습
삼층바위
이러한 바위형태를 지질학적으로 ‘토르현상’이라 한다고...풍화작용으로 약한 부분은 다 마멸되었고 단단한 부분만 남은 것이다. 우리가 절에서 볼 수 있는 어떠한 석탑과 문화재가 이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람의 손길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신비스러움! 이것이 '저절로 그러함' 곧 자연인 것이다.
불곡산 삼층석탑(三層石塔, 내가 붙이는 이름)에서 복주머니바위 쪽을 보니 자일을 타고 천길 암벽을 올라온 산악인의 모습이 보인다. 아찔하다.
삼층석탑에서 보는 불곡산 상봉(정상)
오른다. 오르고 또 오른다.
백석동의 너른 들판과 출발지점인 대교아파트가 보인다. 백석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주거지와 농경지가 혼재되어 있다. 흔히 백석동의 이름이 양주산성(대모산성)의 흰돌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나도 산성을 답사했지만 산성에는 흰돌이 없다.
白石이라는 지명은 큰 들판을 뜻하는 우리말 한들이 한들> 흔돌> 흰들> 흰돌로 음운변화를 일으켰고 다시 한자의 훈을 빌려 白石(백석)으로 표기한 것이다. 백석읍 바로 옆의 광적동(廣積洞)은 ‘큰들, 넓은 들’을 바로 한자로 적은 것이고...
악어바위
악어바위에서 보는 임꺽정봉과 암봉전망대(작은 봉우리)
코끼리바위
임꺽정봉을 보다.
공깃돌바위
화강암이 땅속에서 풍화를 받는 과정에서 미처 풍화되지 않은 암괴 즉 핵석이 노출되어 마치 탑처럼 쌓이거나 흔들바위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토르(tor)라 하며, 바위 밑 부분이나 측면에 암굴형태(감실모양)로 구멍이 파이는 것을 타포니(tafoni)라 하고, 바위상층부평면에 돌우물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나마(gnamma)라 한다.
공깃돌바위에서 토르현상과 함께 바위측면에 작은 타포니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상투봉과 멀리 정상인 상봉이 보인다.
이름이 없는 무명바위.
420m봉에서 보는...
임꺽정봉
애기(가는잎)며느리밥풀꽃
상봉이 보인다.
임꺽정봉에 있는 불곡산 8보루
임꺽정봉(449.5m)
조그마한 나무팻말 하나 세우면 되는 것을....육중한 돌표지석이 눈에 거슬린다.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감실(龕室)이다. 석굴·고분 등의 벽 가운데를 깊이 파서 석불을 안치하거나, 묘의 주인공의 초상을 그려 놓은 곳도 역시 감실이다. 석굴암 본존불주위를 둘러싼 십대제자상위에는 10개의 감실을 파서 감불을 안치하였다. 사찰의 법당 안 불좌(佛座) 위에 매다는 작은 집 모양으로 된 닫집도 감실에 포함된다. 가톨릭교에서도 성당 안에 성체를 담은 성합(聖盒)을 넣어둔 곳을 감실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tabernaculum’의 역어이다. 유교에서는 사당 안에 신주(위패)를 모셔 두는 곳을 감실이라고 한다
파노라마
잘려서 잘 보이지 않는 설명문의 차례: 회암고개, 어하고개, 고읍지구, 옥정지구, 회천지구
덕정리와 덕계리 일대
돌우물(알터): 서쪽 암벽 끝(백석마을 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하나, 바위 밑은 끝 모르는 낭떠러지인데...의자바위라고 하여 저곳에 올라앉는 사람도 있다. 바위상부에 돌우물(알터, 용알터)이 있어 옛날 이곳이 기우제터임을 증명한다는 의견도 있다.
백석 · 광적일대의 넓은 땅
암봉 전망대에서 보는...
임꺽정봉
양주산성(대모산성)
광백저수지
물개바위
물개바위 옆에 있는 이름없는 바위인데...암수한쌍이라고 해도 되겠다.
상투봉으로...
불곡산은 바위산으로 암릉(巖稜)이 많아 안전로프나 보호난간시설이 없다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없다. 사지를 다 써야 오르내릴 수 있다.
누리장나무
상투봉에서 보는 풍경
420m봉(앞)과 임꺽정봉(뒤)
상봉
불곡산(425봉) 제7보루
상봉(470.7m) 정상에 오르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봉우리가 보인다.
의정부와 서울 상계동도 보인다
양주산성(대모산성)에 대한 글 보기 ☞ http://blog.daum.net/ybm0913/2706
하산길의 펭귄바위
누가 이름을 새겼는지...보기에 참 고약스럽다.
불곡산 5보루
기둥홈
도기파편들이 발길에 채인다.
십자고개다. 이곳에서 남쪽의 백화암으로 하산했다.
불곡산 백화암 (白華庵)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898년(신라 효공왕 2)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불곡사(佛谷寺)라 불렀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598년 광종(廣宗)이 중건하고, 1868년(고종 5) 축성루(祝聖樓)를 세웠으며, 1923년 주지 월하(月河)가 중창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56년 성봉(性峰)이 복원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1968년 비구니 무상(無常)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요사채를 창건하였으며, 1985년에는 한암(閑庵)이 대웅전과 산신각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2동, 속청(俗廳)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좌우에 협시하여 삼존불을 이루고,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지장탱화가 모셔져 있다. 그밖에 유물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연화사각대좌가 있다. 절 입구에는 수령 3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서 있으며, 절 바로 아래에 있는 약수는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대웅전
원통전
삼성각
설법전(說法殿)인데... 현판을 說法展이라고 달았다.
고쳐야겠다고 주지스님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350년 된 느티나무
牧使徐公念淳永世不忘碑 (목사서공염순염세불망비)
道光二十一年辛丑正月日立(도광21년신축정원일립: 1841년(현종7년) 정월에 세움)
불곡산 백화암 마애삼존불
마애불은 아미타여래좌상, 관음보살입상, 대세지보살입상의 아미타삼존불로 이루어졌으며 유난히 흰 석질을 띠고 있다. 2000년에 조성되었는데 석공이 정성을 들여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기계로 갈고 새긴 듯 깎은 밤처럼 매끈한 모습이 전혀 정겹지가 않고 오히려 예술성을 떨어뜨렸다.
왼쪽 佛
중앙佛
오른쪽 佛
임꺽정 생가 터
임꺽정 [林巨正]
이들의 활동기록이 보이는 것은 1559년(명종 14)부터이다. 본래 황해도는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는 길목이어서 그 비용을 대느라 다른 도에 비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 임꺽정이 활약한 봉산·재령에서는 바닷가에 있는 갈대밭마저 권세가들이 차지하여, 갈대로 삿갓과 삿자리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는 백성들은 갈대를 사 써야 했다. 임꺽정은 본래 경기도 양주에서 버들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 출신으로 갈대밭이 많은 황해도로 옮겨왔다가, 신분에 따른 억압과 권세가들의 경제적 침탈에 분노해 수탈당하는 사람들을 모아 무장했다. 여기에는 노비를 비롯해 양인층도 참여했다. 이들은 황해도 구월산의 험준한 산간에 본거지를 만들고, 황해도뿐 아니라 경기도·강원도 일대에 걸쳐서 활약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황해도 각 고을의 수령을 무관으로 교체해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동원해 토벌에 나섰다. 60년 정부군 500여 명이 평산 어수동에서 임꺽정 무장대를 포위했으나 도리어 패배했고, 이듬해 남치근을 토포사로 하여 대규모 토벌을 감행한 결과 서흥에서 임꺽정을 체포할 수 있었다.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이런 활동은 1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격화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민중의 바람을 드러낸 것이었고, 따라서 민중의 호응 속에 3, 4년씩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임꺽정 자신이 가장 천대받던 백정 출신이고 그의 부대에는 당시 최하층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속해 있어, 봉건지배질서를 깨뜨리려는 성격도 드러나 있다. 임꺽정 무장대는 진압되었으나 이후에도 유민집단의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출처: 한국고중세사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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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장길산과 임꺽정(林巨正, ? ~1562)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궁궐 밖 의적을 만드는 세상
임꺽정의 난은 역대 반란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기적으로 지속되었고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중추부 영사 윤원형등 당대 최고의 실권자가 모여서 황해도를 휩쓰는 도적떼를 없앨 대책을 세운 것이 1559년(명종 14년) 3월 27일이었다. 이후 관군에 의해 소탕된 것이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였으니 무려 3년이 넘게 관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해도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3년 이상 지속된 것에는 여러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임꺽정의 난에 대해 [명종실록] 편찬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정치만 잘했다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이다. 임꺽정을 흉악범으로 기록해 놓은 [명종실록]이지만, 사관(史官)은 그 본질을 읽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무렵 조선사회는 동맥경화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른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였고 이 때의 왕이 명종(明宗)이었다.
실제 명종대의 진정한 대도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였던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임꺽정은 우연하게 출연한 도적이 아닌 것이다. 사실, 임꺽정이 활약했던 황해도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친정붙이들이었다. 임꺽정 난이 기록상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백정출신이 부자들을 향해 칼을 들다
난의 주동자였던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다양했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 아전, 역리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 등 산간지대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들이 일찍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되어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다.
결국 관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이라는 무장을 내세워 추적하게 했지만, 임꺽정과 그의 무리들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들어가고 나간 것을 헷갈리게 만들어 추적을 불가능하게 했다. 결국 추적에 나선 선전관은 구월산에서 임꺽정 무리들의 발자국을 발견했지만, 들어간 것을 나간 것으로 잘못 알고는 화살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임꺽정 무리들의 약탈 대상은 이른바 부자들이었다.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이었음을 말해준다. 민중들이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출세와 현상금에 눈이 먼 관리들
당시 왕이었던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닌 체제도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임꺽정이 잡히지 않자 그에 대한 현상금은 높아만 갔다. [명종실록]에 실려 있는 임꺽정 기사는 상당부분 가짜 임꺽정을 진짜로 둔갑시켜 출세를 해보려는 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1561년 1월 3일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 강원도 순경사 김세한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이 잡은 인물은 형인 가도치였다. 이들은 임꺽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눈이 멀어 가도치를 때려 죽이면서까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발각되어 중형을 받았다.
이사증의 뒤를 이은 인물이 의주 목사 이수철이다. 이수철은 임꺽정과 한온을 붙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했으나 그가 잡은 인물은 윤희정과 윤세공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임꺽정 무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나 고문에 못 이겨 죄를 거짓 자백한 후 사형을 당했다. 당시 의주 목사 이수철도 이들이 임꺽정과 한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온갖 고문을 동원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었고, 늙은 노파를 잡아다가 임꺽정의 아내라 하며 인두질을 해댔다. 사실이 드러난 이후 이수철은 파직처리 당했지만, 이들 외에도 임꺽정을 잡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한 관리들은 넘쳐났다.
서림의 배반으로 체포된 반적의 우두머리
명종은 선전관과 금부 낭청에게 임꺽정을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릴 정도로 두려워했다. 조선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이 진압된 것은 1562년 1월,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서였다. 남치근이 구월산 아래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모아 임꺽정 무리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며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임꺽정 무리 가운데 일찍이 체포되었던 서림(徐林)이 길잡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체포 작전이 시작되었다.
서림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임꺽정은 산을 넘어 도망치고 급기야 한 촌가로 숨어들었다. 촌가를 관군이 포위하자 임꺽정은 집 주인인 노파에게 집 밖으로 뛰쳐나가라고 위협했다. 노파가 “도적이야” 하고 외치며 문 밖으로 나가자 군인 차림으로 변장을 한 임꺽정이 노파를 뒤쫓으며 “도적은 벌써 달아났다”고 외쳤다. 임꺽정을 알아보지 못한 군사들은 일제히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임꺽정은 군사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지만 심한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 못했다. 멀리서 임꺽정을 알아 본 서림이 “임꺽정이다”라고 외쳤고 이후 관군들은 수많은 화살을 그를 향해 날렸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서림이 배반한 것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떻게 투항할 수 있느냐...”
1562년 1월 8일, 임꺽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명종은 “국가에 반역한 임꺽정 무리가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몹시 기쁘다”고 말하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꺽정, 소설 [林巨正]으로 다시 부활하다
임꺽정은 사실은 소설이나 드라마로 더 친숙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전 [명종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물들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을 약탈과 살인, 방화를 서슴지 않는 인간들로 묘사하였다. 의적은커녕 대낮에 민가 30여 곳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살해하거나 심지어 배를 갈라 위엄을 보이는 잔혹한 무리들이었다.
임꺽정이 의적으로 부활한 데는 벽초 홍명희(1888~1968)의 공이 가장 컸다. 사회주의자이자 독립투사였던 홍명희는 신간회 부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분단된 이후에는 북한에서 부수상을 역임할 만큼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홍명희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방편으로 민중의 결집을 원했고 그런 의식 속에서 [임꺽정]이라는 대하소설을 썼다.
"림꺽정이란 넷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밧든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엇슴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의 불낄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엿슴니까." ([삼천리] 1호, 1929)
홍명희가 생각한 임꺽정은 도적이 아닌 민중의 영웅이었다. 실존하는 인물에 역사적 해석을 달리하여 새로운 역사 인물을 재창조한 것이다. 1928년부터 10년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소설 임꺽정은 민족해방운동이자 현실적 저항 운동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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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소설)
《임꺽정》(林巨正)은 홍명희의 장편소설로서 조선 명종 때의 의적 임거정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임꺽정전》이란 제목으로 1928년 11월 21일~1939년 3월 11일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1940년 《조광》 10월에도 발표되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조선시대 최대의 화적패였던 임꺽정부대의 활동상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가장 방대한 규모의 대하장편역사소설로 봉단편 · 피장편 · 양반편 · 의형제편 · 화적편 등 5편으로 구성되었다.
봉단편 · 피장편 · 양반편에서는 화적패가 출몰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혼란상을 폭넓게 그려나가면서, 임꺽정의 일생을 중심으로 하여 그와 연관된 이봉학 · 박유복 · 배돌석 · 황천왕동이 · 곽오주 · 길막동이 · 서림 등 여러 인물들의 이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의형제편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마침내 의형제가 되어 청석골에서 조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화적편은 그 후 이 집단이 벌이는 일련의 활동상이 그려져 있다.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며, 근대 서구소설적 문체가 아닌 이야기식 문체를 통해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재사인 작가가 구연하는 한 판의 길고긴 이야기이다. 18, 19세기에 융성했던 야담(野談)과 민간풍속·전래설화·민간속담 등을 풍부하게 살렸다.
줄거리
이 작품은 한국 근대 역사소설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후, 몇 차례나 연재 중단을 거듭하다가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조광]지로 발표지면을 옮겼으나, 결국은 완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임꺽정>은 미완성 작이기는 하나, 이미 발표된 것만도 원고지 13,000매 이상 되는 방대한 양이며 미완성 부분은 전체의 10분의 1정도라 추측되므로 이를 제외하고도 충분히 그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이다. 신문 연재 당시의 순서에 의하면 이 작품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의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단편은 임꺽정이 태어나기 이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산조 때 유배당한 홍문관 교리 이장곤은 배소를 탈출한 후, 신분을 숨긴 채 함흥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어, 아내 봉단과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동부승지로 승진하게 되는 한편, 왕의 특지로 숙부인에 봉함을 받은 봉단을 정실로 맞아들인다.
본래 학식 있는 백정인 양주팔(봉단의 숙부)은 묘향산 구경을 갔다가 그곳에서 도인 이천년을 만나 천문지리와 음양술수를 전수 받고 돌아온 뒤, 이장곤의 주선으로 재취하여 서울에서 가정을 이루고 소일 삼아 갖바치 일을 하게 된다. 뒤이어 상경한 봉단의 외사촌 임돌이도 양주팔의 주선으로 양주 소백정의 데릴사위가 되어 그곳에 눌러 살게 된다.
피장편에서는 이장곤의 연줄로 대사헌 조광조 등과 교우하게 된 갖바치는 정변을 예견하고 조광조에게 낙향할 것을 권유하나, 망설이고 있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를 당해 사사되고 만다. 임돌이의 딸이 갖바치의 아들과 혼인하게 되자, 누이를 따라 상경한 장사 소년 임꺽정은 한 동네에 사는 이봉학, 박유복과 함께 갖바치에게서 글을 배우면서 이들과 의형제를 맺는다. 그러던 중 이봉학은 활쏘기에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게 되고, 박유복은 창던지기의 명수가 되며 임꺽정은 검술을 배워 뛰어난 검객이 된다.
그 뒤 임꺽정은 입산하여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를 따라 각처를 유람하다가 백두산에 사는 운총과 혼인을 맺고 양주로 돌아오며, 병해대사는 죽산 칠장사에게 생불로 추앙을 받으며 지내게 된다.
양반편에서는 중종의 말년에서 명종대에 이르는 양반 사회의 정쟁을 그리고 있다. 중종의 승하 후 즉위한 인종이 일년이 못 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뒤 이복 동생 경원대군 명종이 즉위하고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실권을 장악한 외척 윤형원 일파는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등 계속 정계에 파란을 초래한다. 한편 중 보우는 불교를 신봉하는 대왕대비의 신임을 빙자하여 불사를 크게 일으키는데, 양주 회임사에서 재를 올리던 그의 앞에 홀연 병해대사가 임꺽정을 거느리고 나타나 꾸짖고 사라진다. 그 사이 장년의 가장의 된 임꺽정은 이봉학으로부터 을묘왜변의 소식을 듣고 함께 출전하고자 하나 백정이라는 신분 때문에 군총으로 뽑히지 못하여 홀로 전장으로 향한 뒤 뛰어난 활솜씨로 군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봉학이 상관을 구하려다 위기에 빠진 순간, 이들을 구출해주고 사라진다.
의형제편은 단행본으로 3권 분량에 해당하는 방대한 내용으로서 '박유복이', '곽오주', '길막봉이', '황천둥이', '배돌석이', '이봉학이', '서림', '결의'의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임꺽정의 휘하에서 두령이 된 주요인물들의 내력과 화적패에의 가담 경위를 다루고 있다.
제1장 박유복이에서는 박유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장년이 된 박유복이는 부친을 무고하게 죽게 한 노첨지를 살해하여 원수를 갚고 관가에 쫓기던 중, 덕적산 최영장군 사당의 장군 마누라로 뽑힌 최씨 처녀를 만나 인연을 맺고 함께 도주하다가 도둑 오가의 수양딸 내외가 되어 청석골에 눌러 살게 된다.
제2장 곽오주에서는 곽오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청석골 인근 마을의 머슴인 총각 곽오주는 장꾼들을 털던 오가를 때려눕힌 뒤, 보복하려 나온 박유복과 힘자랑을 하다가 화해하고 의형제를 맺게 된다. 그 후 주인집의 주선으로 이웃마을의 젊은 과부에게 장가들었다가 아내가 해산 끝에 죽고 말자 동냥젖으로 아기를 키운다. 그러던 중 배고파 밤새 보채는 아기를 달래다 못해 순간적으로 태질을 쳐죽이고 청석골 화적패에 합류하게 된다.
제3장 길막봉이에서는 길막봉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금장수인 천하장사 길막봉은 자형을 불구로 만든 청석골 도둑 곽오주를 때려잡아 관가에 넘기려 하나 평소 길막봉과 안면이 있는 임꺽정이 청석골로 와서 이들을 화해시킨다. 다시 소금장수의 길을 나선 길막봉은 안성 처녀 귀련과 정을 통하여 그 집안의 데릴사위가 되나, 장모의 구박으로 처가를 떠나 청석골에 들어오게 된다.
제4장 황천왕동이에서는 황천왕동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백두산 태생으로 나는 듯이 걸음이 빠른 황천왕동은 매부인 임꺽정의 집에서 장기로 소일하던 중, 장기의 명수 봉산 백이방을 찾아 나섰다가 천하일색인 딸의 배필을 구하려는 백이방의 까다로운 취재를 통과하여 장가를 들고 그 덕분에 봉산에서 장교가 된다.
제5장 배돌석이에서는 배돌석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김해 역졸의 아들로 태어나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배돌석은 뛰어난 솜씨의 돌팔매로 호랑이를 잡은 덕분에 경천역 역졸이 되고, 호환으로 과부가 된 여자를 재취로 맞은 데다가 황천왕동이와 친해져 자주 내왕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부정한 아내를 살해하고 도망하다 체포되었으나, 때마침 황천왕동이에게 와 있던 박유복이 구해주어 청석골로 도피하고, 황천왕동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제6장 이봉학이에서는 이봉학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왜변 후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윤경의 휘하에서 비장이 된 이봉학은 왜선을 퇴치하는 등의 공로로 제주의 정의 현감으로 승진한 위, 전주에서 사랑을 맺은 기생 계향을 부실로 맞아들여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 후 한성 우윤이 된 이윤경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오위부장이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임진별장으로 좌천된다.
제7장 서림편은 서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전 출신인 서림은 평양 감영 수지국 장사로서 진상품을 관장하였으나 본래 교활하여 자주 포흠을 내다가 들키자 도주하던 끝에 청석골 화적패를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평양 진상 봉물의 내막을 알리고 계책을 내어 이를 탈취하게 하는 데 성공한 서림은 그 공로로 청석골의 두령이 된다.
제8장 결의에서는 양주 임꺽정의 집에 평양 진상 봉물이 있다는 것이 탄로나 가족들이 투옥되자, 임꺽정이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임꺽정은 청석골 두령들과 함께 가족들을 구해낸 뒤 화적패에 입당하고 뒤이어 사건에 연루된 임진별장 이봉학과 귀양에서 풀려난 황천왕동이도 이에 가담하게 된다. 청석골에 모인 일당은 아내를 데리러 간 길막봉이 투옥되자, 그를 구해낸 뒤, 칠장사에 들러 세상을 떠난 병해대사의 불상 앞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화적편은 4권 분량으로 간행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마지막 권이 완성되지 못하여 그중 제 3권까지만 출간되었다. 이는 '청석골', '송악산', '소굴', '피리', '평산쌈', '구월산성'의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적편은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화적패가 본격적으로 결성된 이후의 활동을 그린 것으로서, 작품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부분이다.
제1장 청석골에서 임꺽정은 청석골 화적패의 대장으로 추대된다. 그 후 상경하여 서울 와주 한온의 집에 머물면서 기생 소홍과 정을 맺고 빚에 몰린 양반의 딸 박씨를 구해내어 첩으로 삼는다. 게다가 원판서의 딸을 훔쳐내어 둘째 첩으로 삼고, 이웃의 사나운 과부 김씨와 싸운 끝에 그녀 역시 첩으로 삼고 지내다가 처자의 성화에 못 이겨 귀가하게 된다.
제2장에서는 송악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리고 있다. 송악산에서 송도 송악산에 단오굿 구경을 간 청석골 두령들은 그곳에서 납치당한 황천왕동의 아내를 구해낸 끝에 살인을 저질러 관군의 쫓김을 받게 된다. 드러나 서림의 계책으로 치성으로 와 있는 상궁을 인질로 삼고 시간을 끌다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세당당하게 진군한 임꺽정의 구원을 받아 위기를 모면한다.
제3장 소굴에서는 임꺽정 일행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임꺽정 일당은 가짜 금부도사 행세를 하며 봉산군수를 체포하려 한다든가, 신임군수의 도임 행차를 습격한다든다, 황해감사의 사촌을 자처하고 각 읍을 돌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등으로 지방 관원들을 괴롭힌다. 그 후 상경한 임꺽정은 기생 소홍의 집으로 습격해 온 포교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서울을 탈출하나, 그의 첩들은 체포되어 관비로 박히고 임꺽정을 따르려는 소홍은 그의 첩이 되어 청석골에서 지내게 된다.
제4장 피리에서는 단천령의 피리 솜씨가 주를 이룬다. 청석골을 지나다가 화적패에게 붙들린 종신 서자 단천령이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피리를 불러 그들을 감동시키자, 임꺽정은 그 보답으로 단천령이게 자신의 신표를 주어 다른 화적패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제5장 평산쌈에서는 서림의 배반을 다룬다. 청석골 두령들은 신임 봉산군수를 살해하고자 평산 이춘동의 집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서울에서 체포된 서림이 목숨을 보전하고자 그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군읍 군사 오백여 명의 습격을 받게 되나 접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무사히 청석골로 돌아오게 된다.
제6장 구월산성에서는 수세에 몰려 구월산으로 들어간 임꺽정 일당이 관군에게 저항하다가 포살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조선일보와 [조광]지를 통해 발표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청석골 화적패를 소탕하고자 조정에서 관군을 파견한다는 소문 때문에 임꺽정 일당은 오가와 졸개들만을 남겨 주고 해주 재령으로 도피했으나, 거처가 옹색하여 다시 자모산성에 근거를 마련하고 지내게 된다. 한편 고집을 피워 청석골에 남은 오가가 죽은 아내만을 생각하며 적막하게 지내는 가운데 임꺽정에게서 버림을 받은 데다가 관군의 습격소식에 동요된 졸개들은 하나하나 청석골을 버리고 떠나간다는 데서 작품은 중단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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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관아터
양주목[楊州牧]관아터에 대한 다른 글 보기☞ http://blog.daum.net/ybm0913/2709
양주관아 터에는 동헌과 어사대비가 있고 양주부사불망비가 모여 있으며,
근처에 금화정과 양주별산대놀이전시관 및 공연장, 양주향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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