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국내여행. 산행

감악산의 사찰유래 고찰

백수.白水 2014. 8. 27. 09:27

 

 

감악산(紺嶽山)

 

감악산(紺嶽山)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 1121)에 처음 등장한다이후 고려사(高麗史, 145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대부분의 지리서와 읍지(邑誌) 및 관찬(官撰) 문헌에 등장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 1760)에는 감악산(紺嶽山)이라는 이름대신 한자의 획수를 줄여 감악산(甘嶽山)으로 표기한 사례가 있다.

 

감악산의 절

 

감악산에는 원래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범륜사는 옛 운계사터에 1970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범륜사

 

 

운계사는 동국여지승람(1481)에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나 1799(정조 23)에 편찬한 <범우고>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481(성종 12)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불우조를 보면 감악사(紺岳寺)에서 고려 황빈연(黃彬然)이 과거하기 전에 글을 읽었으며, 운계사(雲溪寺)신암사(神巖寺) 둘 다 감악산에 있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안진호 스님에 의해 편찬된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에 따르면 1858(철종 9) 감악사(紺岳寺)터에 창헌(暢憲)이 절을 옮겨지으며 봉암사(鳳巖寺)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원래 감악산에 있었던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등  4곳의 사찰 중에서 감악사(紺岳寺)터에는 지금의 봉암사(鳳巖寺)가, 운계사(雲溪寺)터에는 지금의 범륜사가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래의 범륜사 운림사는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시기에는 이미 폐사되었으며, 절터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대신 동국여지승람에 신암사(神巖寺)가 새로이 등장하는데,  이 또한 옛 어느 절터에 지어진 것인지...

또는 어느 절을 옮겨 지은 것인지 알 길이 없고 현재 신암사 터만 남아있다.

 

신암사(神巖寺)

 

 

 

 

 

신암사(神岩寺)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산187있는 조선시대의 절터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년)에 나온다. [ 정종 2(1400) 太上王(태조 이성계)이 이방석(李芳碩) · 이제(李濟) 등을 위하여 신암사(神巖寺)에서 크게 불사를 베풀었는데, 덕비(德妃, 정종비)와 정빈(貞嬪, 태종빈)이 그 절에 나아가서 구경하였다. 신암사의 간사승(幹事僧)이 갑자기 죽으니, 태상왕이 좋지 않게 여겨 돌아왔다.] 

 

1888년에 편찬된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에도 나오고 있어 최소한 19세기 말엽까지는 절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 절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절터에 고승의 사리를 담은 부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하며, 밑받침은 현재 사리산에 위치한 수월사에 남아 있다.

 

봉암사(鳳巖寺)

 

 

 

 

 

파주 봉암사(鳳巖寺)의 주지는 봉선사의 鳴鼓(명고)스님이다. 3년간의 노력 끝에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사실상 폐사되었던 봉암사의 망실토지 300여평을 2004년에 되찾았다고 한다.

 

 

 

 

 

 

 

현판은 다른 곳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을 주지인 鳴鼓(명고)스님이 찾아냈다고 한다. 글씨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간 것으로 보아 현판의 甲辰오랜 세월이 지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창헌(暢憲)이 절을 옮겨지으면서 봉암사라 이름했던 1858(철종 9)이후로 돌아오는 때는 1904년과 1964년 딱 두차례다.

 

 

 

 

 

 

 

 

 

 

 

[연 혁]

 

 

봉암사(鳳巖寺)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35, 감악산(紺岳山)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신라시대에 창건하였으며 당시에 호국도량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절이 들어선 산 이름을 따서 한때는 감악사(紺岳寺)라 하였다.

 

고려 명종 때(재위:11701197) 황빈연(黃彬然)이 과거를 보기 전에 이 절에서 공부를 했고, 김신윤(金辛尹)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고 한다.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는 절이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799(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오므로 18세기 후반 한때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가 된 감악사(紺岳寺)터에 1858(철종 9)에 창헌(暢憲)이 절을 옮겨지으며 봉암사라 하였다. 重建의 사실은 1926년 당시의 주지 남의(南義)가 큰방의 대들보를 뚫고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상량문에 咸豐八年丁巳閏五月初八日寅時上樑創建主暢憲(함풍8년정사윤5월초8일인시상량창건주창헌)’이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창헌은 부근의 사찰을 옮겨 세웠다고 하며, 본래 주변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주지로 있던 영재(影齋)가 소유권을 포기하여 9백여 정보가 국유림으로 바뀌었다.

 

19506·25전쟁 때 모두 불에 탄 것을 1953년에 학규(學圭)가 작은 암자(초막3칸)를 세우고 복원하였다. 1971년 인법당(因法堂)을 세웠고, 1974년에는 정원순(鄭元順)의 시주로 산신각을 세웠다. 특별한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봉선사본말사략지(奉先寺本末寺略誌), 1977]

 

 

※ 지금의 객현리 봉암사(鳳巖寺)는 최근까지  '구절터'로 불리는 공터로 방치되어 오다가, 2014년 하반기에 준공된 수행공간 한채가 있을 뿐, 1953년에 학규(學圭)가 복원하기 시작했다는 암자, 인법당(因法堂, 1971), 산신각(1974)은 존재하지 않고 옛터와 흔적만 확인된다. 이러한 시설들이 언제 사라졌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유래 요약]

 

-.신라시대에 감악사(紺岳寺)로 창건

-.고려 명종 때(재위:11701197) 황빈연(黃彬然) 과거공부, 김신윤(金辛尹)은거.

-.신경준(申景濬:17121781)가람고(伽藍考)에 절 존재 기록

-.범우고(梵宇攷, 1799)에 폐사된 것으로 - 18세기 후반 한때 폐사된 것으로 보임.

-.1858년 감악사(紺岳寺)옛터에 창헌(暢憲)이 절을 옮겨지으며 봉암사라 함.

-.일제강점기 주지 영재(影齋)의 소유권을 포기로 9백여 정보가 국유림으로 바뀜

-.19506·25전쟁 때(감악산 결사대본부) 소실

-.1953년에 학규(學圭)가 작은 암자(초막3)를 세우고 복원

-.1971년 인법당(因法堂)을 세움

-.1974년 정원순(鄭元順)의 시주로 산신각을 세움.

 

[양주 황방리, 옛 봉암사]

-.1990년 전후로 일봉선교종(1988년 창건)의 봉암사(鳳巖寺)로 창건

-. 후에 대한불교 조계종 봉선사의 말사가 됨. (시설;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신각(외부 노출)

-.2011년 전후로 동광정사(東光精舍, 주지 東光)로 개칭

 

-.2004鳴鼓(명고)스님이 봉암사 망실토지 300여평 되찾음.

-.2014년 수행도량 한 채 준공

 

 

양주 황방리  (옛) 봉암사(鳳巖寺, 현 동광정사)

 

 

 

 

봉암사(鳳巖寺)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 474-1에 있으며, 1990년 전후로 일봉선교종(1988년 창건) 소속의 봉암사(鳳巖寺)로 창건되었다가 후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되었다.

 

시설로는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를 갖추고 있다.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이색적이다.

2011년 현재 주지는 승려 동광(東光)이다.<디지털양주문화대전>

 

청담장학문화재단이사장인 승려 동광(東光)은 도선사 주지를 역임했다. 도선사의 동광(東光)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절 이름이 봉암사(鳳巖寺)에서 동광정사(東光精舍)로 바뀐 것으로 보여 진다.

 

봉암사(鳳巖寺)라는 이름과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지위는 어느 시기(?)에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35에 있는 봉암사(鳳巖寺)’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동광정사의 前身인 봉암사의 이름이 절의 표지석(標識石)에는 峯巖寺인데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서는 왜 鳳巖寺로 썼는지 의문이 남는다.

 

 

  鳳巖(봉암)의 유래

 

鳳巖(봉암)이라는 이름은 현재 감악산 남쪽자락인 양주군 은현면의 한동네 이름으로도 남아있는데, 이는 감악산의 형상에서 나온듯하다.

 

 

고려시인 임춘(林椿)이 감악산을 봉()의 모습에 비유한 시가 나온다.

 

造物小兒眞好弄 조물소아진호롱

博沙戱作千峯象 박사희작천봉상

玆山首尾羌數州 자산수미강수주

天外廻翔如舞 천외회상여무봉

 

조물주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좋아하였는지

모래를 모아다가 많은 산봉우리를 만들었네

이 산머리에서 끝까지 몇 고을을 깔고 앉았는데

그 모습 하늘을 뚫고 나는 봉황과 같도다

 

 

 

일제 초기의 문헌인 조선지리(朝鮮地理, 1918)는 봉암사(鳳岩寺)를 소개하면서 이 절이 바위로 이루어진 굴(임꺽정굴, 설인귀굴)속에 있으며 설인귀가 살았던 곳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이 봉암사를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서는 鳳巖寺, 양주시의 현장안내판에는 속자(俗字)鳳岩寺로 적었다.

 

파주 객현리소재 봉암사(鳳岩寺)1858(철종 9)에 창헌(暢憲)重建했고, 1926년 주지 남의(南義)가 큰방의 상량문을 발견하였으며, 1950년 한국동란 때 소실될 때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볼 때... 일제 초기의 문헌인 조선지리(朝鮮地理, 1918)에 나오는 굴(임꺽정굴, 설인귀굴)속의 봉암사(鳳岩寺)와는 별개의 절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