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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군현 위치

백수.白水 2015. 10. 15. 05:42
한반도 북부냐 요서냐 강단-재야 사학계 동북아재단 역사지도 놓고 갈등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대방 등 한 군현의 위치를 둘러싼 갈등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 군현 위치는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이 47억 원을 쏟아 부어 2008년부터 8년째 진행 중인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의 핵심 쟁점이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와 일부 재야 사학계는 4월 재단이 제작 중인 역사지도를 공개하면서 이 지도가 낙랑군을 현 평양 지역에 그리는 등 한 군현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에 위치시켜 “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 왔다.


○ 동북아재단, 한 군현 위치 병기 계획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재단 국정감사를 하루 앞둔 4일 역사지도 제작을 총괄하는 장석호 재단 역사연구실장은 “한 군현의 위치에 대해 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의견이 통합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는 양측 입장을 지도에 병기한다는 것이 재단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역사지도 연구 용역은 다음 달 20일 마무리된다. 당초 이 지도는 올해 말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한 군현 위치 논란이 불거지면서 검수를 이유로 출판을 3년 늦췄다.

논란이 된 한 군현의 위치는 학계의 통설인 한반도 북부설을 따른 것이다. 일부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낙랑군을 평양 지역에 그린 지도가 실려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평양 지역 고분들에서 한나라 계열의 유물이 출토되고, 2005년 평양에서 낙랑군 속현들의 인구가 적힌 ‘낙랑 목간’이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 일부 학자들은 한 군현의 위치를 중국 동북부 허베이(河北) 성 또는 요하 일대로 보고 있다. 이 소장은 올 8월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를 출간하며 “동북아역사지도는 중국이 동북공정 차원에서 그린 ‘중국 역사지도집’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며 “한반도가 외부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다는 인식을 심기 위해 만들어진 일제 식민사학을 주류 사학계가 그대로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 “고조선 세력 범위에 대한 지적은 수용할 만”

이와 별개로 한과 위(魏)나라의 국경을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연장해 그린 것은 편찬위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낙랑군이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최근 학계의 연구와도 어긋난다. 지도 편찬위원장인 윤병남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문제의 지도는 작업 중인 자료였을 뿐 최종 결론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후기 낙랑군은 토착적 성격이 강했다는 연구 결과 등을 반영할지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역사지도가 고조선의 강역을 축소했다는 비판에 대해 주류 사학계에서도 수용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소장은 “역사지도가 고조선 관련 유물이 쏟아져 나온 요하 서쪽을 고조선의 강역으로 명시하지 않고 ‘고조선 관련 문화’라고 모호하게 설명한 것은 잘못됐다”고 썼다. 고조선사를 전공한 한 대학 교수도 “랴오닝 성 서부 대릉하를 너머 현 랴오닝 성과 허베이 성의 경계지점까지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재단이 당초 동북공정과 관련돼 있어 예민한 사안임에도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지 못한 데다 뒤늦게 학계 통설과 일부의 주장을 병기하겠다는 것 역시 일시적인 봉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지도 편찬위와 재야 사학계에 국회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편찬위가 이를 수용해 11월 중순 양측의 ‘맞짱 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조종엽 기자 / 2015.10.05 동아일보>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중국이 동북공정에 박차를 가하던 1997년 요녕성(遼寧省) 서쪽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고 쓴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 봉니란 죽간(竹簡)이나 목찰(木札) 등에 공문서를 써서 상자에 넣어 묶은 후 끈의 매듭을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것을 뜻한다. 임둔이란 한(漢)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수도 부근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이다.

 

일제는 한국사가 식민지로 시작했다고 강변하기 위해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낙랑군은 평양, 임둔군은 함남과 강원 북부 일대로 비정했다. 따라서 임둔태수장은 함남이나 강원도에서 나와야 하는데, 요녕성 서쪽의 옛 성터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사학계가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정상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다면 “임둔군의 위치가 요녕성 서쪽으로 드러났다”며 일제히 환호했어야 했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한민국에 불리한 사료가 나오면 일제히 환호하고, 대한민국에 유리한 사료가 나오면 일제히 침묵하는 카르텔이 작동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또 하나의 한사군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신문망 등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후한(後漢), 북조(北朝), 당(唐), 요(遼)나라의 묘 등 129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중 북조(北朝) 무덤에서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539) 사망한 ‘한현도(韓顯度)’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 출신이라는 벽돌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그 한국인 후예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대동강 남단의 대동면 토성리(土城里) 일대라고 비정해왔는데, 천안문(天安門) 남서쪽 20여km 지점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식민사학계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대동면 토성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병도 박사가 “일제 초기로부터 일인(日人)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인 (대동면)토성리 일대가 낙랑군치(樂浪郡治)인 동시에 조선현치(朝鮮縣治)임이 그 유적ㆍ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다”(‘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라고 쓴 것을 지금까지 추종한 결과이다. 이병도 씨가 말한 일본인 조사단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뜻하는데, 그가 대동강 남쪽에서 일부 중국계 유적ㆍ유물을 찾았다고 주장하자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이곳을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식민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으면서 낙랑군이 멸망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위서(魏書) ‘세조 태무제(世祖太武帝) 본기’에는 그 119년 후인 “연화(延和) 원년(432) 9월 을묘에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주(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19년 전에 멸망했다는 낙랑군이 119년 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태무제가 고구려 강역 수천 리를 뚫고 평양까지 가서 낙랑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은 이상 낙랑군은 중국 땅에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때 고대 역사서 및 지리지를 토대로 작성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 북쪽 40리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조선성이 낙랑군 조선현을 뜻함은 물론이다.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있던 낙랑군 조선현이 고구려의 잇단 공격으로 약화되었다가 북위(北魏) 태무제가 북경 부근으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다.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위서(魏書)’ ‘북사(北史)’ 같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계속 이름이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북경시 북쪽 순의구(順義區)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적했듯이 지금도 고려진(高麗鎭)과 고려영(高麗營)촌이 있다.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매국의 역사관, 즉 식민사관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한사군이 처음부터 중국 내에 있었다는 문헌사료와 유적, 유물은 무수히 많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2015.3.26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