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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백수.白水 2015. 10. 22. 20:19

국지어음이 이호듕귁하여..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이상한 학자들이 훈민정음 즉 우리의 한글을 창조가 아닌 모방이라고 생각하며 아시아의 고대 문자들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애써 유사점을 찾으려고도 했고 갖다 붙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일본인들 처럼..

우리나라의 훈민정음은 고대 우리민족의 문자 가림토정음(가림토 문자)를 과학적으로 가다듬은 것입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도 비슷한게 발견 되었는데 일본의 대다수 영토도 그렇지만 오키나와는 우리의 섬이고

일본사람들도 오키나와인은 자신들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학대를 해 왔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28년(1446년), 국보 70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며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른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무척 간략해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 있어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해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그것이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드디어 해례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중에게, 그리고 한글학회 간부들에게 공개된 것은 해방 후에

이르러서였다.



첫머리에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한글학자들도 해례본이 없었기 때문에 창제의 원리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대 글자 모방설, 고전

(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화장실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의견이 분분

했다. 이런 것들은 일제강점기의 일본 어용학자들의 주장이었다. 특히 1937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고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 후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전장을 태평양

너머까지 확장시켰다.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을 잠재우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식량배급제가 강화되고 일제의 수탈은 혹독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우리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라고 배웠다.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일선동조론, 신사참배 등 방법도 다양했지만 문제는 그 질이 불량했다는

점이다. 그 중 가장 악랄했던 정책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 정책이었다. 1942년 12월 일본어 사용에 반하여

한글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의 임원 33인을 투옥시킨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발한다. 이때 이윤재, 한징과 같은

사람은 옥사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나라, 하나의 민족정신을 담는 그릇은 바로 그들의 언어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 즉 세계관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일제는 진정으로 우리 말과 글이 사라지길 바랬다. 18세기 조선의 실학

연구자들은 중국의 중화사관으로부터 탈피하여 우리 고유의 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이때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과가 바로 훈민정음 언해본의 발견이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을 한글로 풀어쓴 것이다. 일제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등 언해본 자체의 진위를 허구로 몰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해례본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해례본을 없앤다면 조선초까지 소급되는 세종조의 한글 창제의 신화는 물거품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정신을

담는 그릇의 뿌리와 기원을 허구화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40년대 초기에 이미 우리나라를 넘어 동북아시아에 이름이 알려진 대수장가였다.

간송은 김태준이라는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국문학자로부터 해례본의 실존 소식을 접한다.

당시 일제는 조선에서 발생하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의 발견은 일제로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간송은 문화적 민족주의의 대명사였고 김태준

역시 일제로서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사회주의자였다. 이 둘이 만난다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송은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는 데 사활을 걸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가 발음기관을 상형(象形)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눈물겨운 노력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가 간송의 품으로 왔으며 비밀리에 지켜오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불러 한글 연구를 위해 영인본을 만들며 세상에 공개된다. 이 실체는 우리의 언어가

인체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백성을 위해서 기획적으로 언어를 창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특히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언어로 기록된다. 언어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세계관을 동시에 밝히면서 제작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진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1962년 12월 해례본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된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다.


[출처] 『훈민정음 해례본』|작성자 무인불승 : http://blog.naver.com/skwonh85/120206921817





훈민정음 해례본 1000억원 보상 요구


훈민정음 해례본 의 소유자가 1,000억원을 보상해주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가에 기증 하겠다고 밝혔다.

훈민정음 해례본 현 소유자 가 요청한 금액은 전문가들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평가한 감정가 1조원의 10%에

해당 하는 금액이다.


현재 훈민정음 혜례본은 경북의 모씨가 소유하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조 모씨는

지난 2008년 현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했는데 조 모씨의 주장에 따르면 현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자가 골동품 가게에서 고서적을 사면서 훈민정음 혜례본을 훔쳐갔다고 주장 했고 긴 법정 공방

끝에 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는데요 하지만 현 훈민정음 소유자는 법원에 판결에 불복하면서 훈민정음

혜례본을 내주지 않았다.


이후 법정공방 끝에 현 훈민정음 혜례본 소유자가 승소 하면서 훈민정음 혜례본을 소유하게 되었다.

훈민정음 혜례본은 한글 창제 원리를 풀이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 인데요,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

(세종 28년) 편찬되었다.


1,000억원의 보상을 요구한 훈민정음 혜례본은 현재 서울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훈민정음 혜례본 국

보 70호 와 동일한 판본으로 전문가들은 간송미술관에 소장 된 훈민정음 혜례본 보다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보고 있다.


가져온 곳 : http://blogtoday.tistory.com/595








훈민정음 (訓民正音)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 


시대 : 조선 

성격 : 한문해설서, 목판본, 관판본 

유형 : 문헌 

수량 : 1책, 33장 

별칭 :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원본 

지정 : 국보 제70호 (1962년 12월 20일) 

소장/전승 : 간송미술관 

창작/발표시기 : 1446년 

분야 : 언어/언어·문자 

요약 :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1446년(세종 28)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명으로 설명한 한문해설서.


[개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집필자들은 정인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의 8학자이다.


[서지적 사항]


전권 33장 1책. 목판본. 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1446년 9월 상한(上澣:초하루에서

초열흘까지의 기간)에 완성되었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고(故) 전형필(全鎣弼) 소장본(현 간송

문고 소장)이며,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아직까지는 국내유일본이다.

광곽(匡郭)은 가로 16.8㎝, 세로 23.3㎝이고, 본문(예의) 부분은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의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도 발견 당시 완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 2장이 빠져 있던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었던 것인데,

적을 때 실수하여 세종 어제서문의 끝 자 ‘이(耳)’가 ‘의(矣)’로 되는 등 오자가 있다.


[내용]


먼저,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성내용을 약술하면아래와 같다.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혔다.)

② 예의(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하였다.)


2) 해례

① 제자해(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② 초성해(초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였다.)

③ 중성해(중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설명하고,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하였다.)

④ 종성해(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하였다.)

⑤ 합자해(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⑥ 용자례(단어의 표기례를 제시였다.)


3) 정인지서문

훈민정음의 창제이유,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편찬연월일을 분명히 밝혔다.


다음으로 위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본문(예의)

① 어제서문

    세종어제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가지지 못한 비지식층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세종이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창제목적이 밝혀져 있다.

② 예의

    어제서문에 이어서 중국 36자모표에 나오는 한자를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외래어인 한자어의 전래자음

    (傳來字音)을 이용하여 새로 만든 훈민정음(글자)의 음가를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초성 23자모체계는,

    비록 전래자음을 가지고 음가를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중국 36자모체계의 영향을 받은 체계였으며,

    인위적인 개신(改新) 의도를 가지고 정리하였던 『동국정운(東國正韻)』 23자모체계와도 일치하여,

    15세기 중세국어의 초성체계와 부합되지 않는 면도 조금 있다.



전청·차청과 같은 술어는 제자해에 나오고, 예의편에서는 단지 아음·설음과 같은 오음(五音) 분류만 표시

하였고, 전탁은 병서(竝書)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초성자의 설명을 위하여 이용한 한자들은 중성자와

종성자도 그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고른 것이었다.

중성자는 ‘ㆍ·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로 정하였는데, 분명히 이중모음인 ‘ㅛ·ㅑ·ㅠ·ㅕ’도 기본단위자로

삼은 것이 특색이었고, 종성자는 초성글자를 다시 써서 표시하도록 규정하였다.

예의편의 끝에서는 연서(連書)와 병서·합용(合用) 등의 표기방식과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초성·중성·

종성 글자를 자소(字素)처럼 써서 음절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각 음절마다 방점으로 성조를 왼쪽에

표시하도록 하였다.


2) 해례

해례편은 새로 만든 글자의 제자원리를 주로 밝히고, 그 음가·운용법, 이 문자가 표시하는 음운체계 등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다만,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는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통하여 송학사상

(宋學思想)을 고도로 섭취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해례편의 기술에 있어서도 이러한 송학이론을 적용하여 일종의 언어철학을 전개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① 제자해

제자해에서는 『태극도(太極圖)』·『역학계몽(易學啓蒙)』·『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 송학계통의

서적에서 이론을 섭취하여, 제자해의 첫머리부터 태극·음양(陰陽)·오행(五行)과 결부된 언어관을 제시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도 성음(聲音)에 따라 음양의 이치를 다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가 상형(象形)에 있음을 말하고, 자음자(子音字)의 제자에 있어서는 먼저

조음위치별(調音位置別)로 기본이 되는 초성자(初聲字)를 정하고, 이 기본자들은 각각 그 조음방식 또는

조음위치를 상형하여 제자된 것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각 조음위치에서 발음되는 자음은, 그 발음이 세게 나는(‘厲’로 표현) 정도에 따라 이 기본문자에 획을

더하여 제자한다고 하였다(보기, ㄴ→ㄷ→ㅌ). 계속하여 다시 오행설을 가지고 각 자음을 오행·계절·음계

(音階)·방위(方位) 등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音相)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한 다음, 중국의 전통적인 어두자음(語頭子音) 분류법인 36자모표의 분류방식에 따라

훈민정음의 자음자를 분류 설명하였다.



또한 오행과 결부된 오성의 음상을 발음기관 및 오행의 특질과 연관시켜서 설명하였다.



다음에 전탁(全濁)의 음가는 ‘전청소리가 엉긴 것(凝)’이라고 설명하고, 훈민정음 28자와 따로 제정한

순경음(脣輕音)의 음가는, “가벼운 소리를 가지고 입술을 잠깐 합하고 목구멍소리(숨소리)가 많다.”고 하였다.

중성글자는 초성글자와는 달리 천(天)·지(地)·인(人) 삼재를 상형하여 기본모음자 ‘ㆍ·ㅡ·ㅣ’를 제자하였음을

말하고, 이들 기본모음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세 기본모음자는 중세국어의 7단모음체계를 세 갈래로 인식하고 제자한 것으로서, ㅣ모음을 별도로 보고, ‘ㆍ’모음계열과 ‘ㅡ’모음계열로 나누어서 나머지 모음자들[ㅗ·ㅏ·ㅜ·ㅓ, 이를 초출자(初出字)라고 하였음]을

제자하였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ㅗ ㅜ 입을 오므림[구축(口蹙)]

↑ ↑

· ㅡ

↓ ↓

ㅏ ㅓ 입을 벌림[구장(口張)]

중성 11자 가운데 나머지[‘ㅛ·ㅑ·ㅠ·ㅕ’, 이들을 재출자(再出字)라고 하였음]는 ㅣ에서 시작되는 음으로 보고

(起於ㅣ), 이어 또다시 역(易)의 수(數)나 위(位)를 가지고 중성글자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초성·중성·종성

세 글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② 초성해

초성해에서는, 초성이란 운서의 자모에 해당한다고 하고 한자음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였다.

③ 중성해

중성해에서는, 중성이란 한자음의 개음(介音)+운복음(韻腹音)임을 역시 한자음을 가지고 설명하였는데,

중국음운학에서 음절말음[운미(韻尾)라고 함]으로 다루는 반모음 〔j〕 까지도 중성에 포함시켜, 제자해에서

설명한 11자 이외에, 다음과 같이 여러 모음자가 합용되어 중모음으로 쓰일 수 있음을 말하였다.

기본자 ㆍ ㅡㅣ

초출자 ㅗ ㅏ ㅜ ㅓ

재출자 ㅛ ㅑ ㅠ ㅕ

합용자 ㅘ ㅝ ㆇ ㆊ

일자중성+ㅣ ㆎ ㅢ ㅚ ㅐ ㅟ ㅔ ㆉ ㅒ ㆌ ㅖ

이자중성+ㅣ ㅙ ㅞ ㆈ ㆋ

④ 종성해

종성해에서는 종성이란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말음임을 역시 한자음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고, 중세국어의

성조를 우선 종성만 가지고 설명하였다. 즉, 불청불탁자(不淸不濁字)는 평성·상성·거성의 종성이 되고, 전청자·

차청자·전탁자는 입성의 종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어의 종성은 ‘ㄱ·ㆁ·ㄷ·ㄴ·ㅂ·ㅁ·ㅅ·ㄹ’ 8자면 족(足)

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자음의 입성 가운데, ‘ㄷ’종성음을 일반에서 ‘ㄹ’로 발음하고 있는데, 이를 ‘ㄷ’음으로 발음해야

된다고 하였다.

⑤ 합자해

합자해에서는, 초성·중성·종성 글자를 자소처럼 인식하여, 이들 3요소를 좌로부터 우로, 위로부터 아래로 써서

음절단위로 쓸 것을 규정하였고, 합용병서·각자병서의 서법(書法)을 초성·중성·종성에 걸쳐 설명하였다.

이어 당시의 국어성조를 다시 설명하여, 입성은 중세국어의 성조단위가 아님을 말하였다. 즉, 긷:깁 몯 등이

종성만을 가지고 볼 때는 입성이지만, 성조로서는 평성·상성·거성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반설경음

(半舌輕音) ‘ᄛ’도 반설중음(半舌重音)인 ‘ㄹ’과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중모음 !ㅗ의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⑥ 용자례

용자례에서는 중세국어에서 90단어의 예를 들어, 그 표기법을 보였다. 초성 ‘ㄱ·ㅋ· ㆁ, ㄷ·ㅌ·ㄴ, ㅂ·ㅍ·ㅁ, ㅸ·

ㅈ·ㅊ, ㅅ·ㅎ·ㅇ, ㄹ·ㅿ’의 표기례를 각각 2 단어씩 들었는데, 각자병서와 ㆆ의 표기례가 제외되고, ㅸ의 표기

례를 보인 것이 특징이다.

중성은 ‘ㆍ·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의 표기례를 각각 4단어씩 보였으며, 종성은 ‘ㄱ·ㆁ·ㄷ·ㄴ·ㅂ·ㅁ·ㅅ·ㄹ’의

8종성의 표기례만을 각각 4단어씩 보였다.


3) 정인지서문

정인지의 서문에서는, 제 말의 소리는 있어도 글자가 없어서 한자를 빌려 씀이 아무래도 어거지라는 것,

한자로 씌어진 책의 뜻을 깨치기 어렵다는 것, 한문으로는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것, 이두(吏讀) 사용이 불편

하다는 것 등을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로 들었다.

이어 세종이 1443년(세종 25) 겨울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것, 훈민정음은 간단하여 깨치기 쉬운

글자이면서 여러가지로 응용이 가능하여, 대개의 음(음악, 한자음, 자연음까지)을 표기할 수 있고, 이 글자의

창제로 한문책의 해석도 쉬워졌으며 의사소통도 가능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례본의 저술자가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등 8명이라고 하였다.

이 서문을 쓴 날이 1446년 9월 상한이므로, 이 책의 완성일을 알려준 데도 이 서문의 가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 때는 모든 분야에 걸쳐서 우리 것을 존중하고 밝혀보려는 기운이 충만되어 있던 시대였으므로, 이러한

기운이 국어의 문자화(文字化)를 위한 훈민정음 창제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나라에서도 자기

언어를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훈민정음』 같은 서적을 펴낸 일은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책으로써 1997년 1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805




훈민정음을 예전에 포스팅한 기억인데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한글날 저녁에 다시 올립니다.

일본과 중국은 호시탐탐 우리의 문화를 말살시키거나 자신들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다시는 잃지 않도록 잘 보관해야 할 중요한 유산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누구나도 갖을 수 있는 소장본도 복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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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울의칼`이 출판하는 인터넷 잡지
글쓴이 : 사울의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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