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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제주도

삼성혈과 제주도 신화

백수.白水 2016. 2. 5. 11:06

2016. 02. 03 - 제주도 31일째

 

삼국지위지그리고 후한서동이전등의 고문에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호족이라고 실려 있다. 육조 시대에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자.

 

마한(馬韓) 서해의 큰 섬에 주호족이 있다. 그 인종은 몸집이 작고 언어는 한족과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깎아 선비족과 비슷하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있는데,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배를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한다.그런 주호족을 일부에서는 도서족 계통, 즉 일본의 원주민이었던 고루보그족이나 아이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살았던 종족이었다. 체구는 작고 옷도 상의만 입었고 하의는 입지 않고 생활했는데,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업(主業)으로 삼았던 종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제주도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은 1세기쯤에 있었던 한라산의 화산 폭발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들이 살았던 제주도는 제주 신화의 주인공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제주도에 전해 오는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이렇게 세 을나(乙那)에 의하여 시작된다. 제주의 시조가 되는 세 을나는 독특하게도 제주 1동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의 모흥혈(毛興穴)이라는 세 구멍에서 솟아났다 한다. 가야나 신라고조선부여 등의 다른 나라 시조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시조가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인 점도 다르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세 을나는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나물을 캐서 먹으며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를 타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각자 배필로 맞이했으며, 그들이 가져온 오곡종자와 송아지망아지 등 육축으로 농경생활을 했다.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婚姻池)는 세 을나가 벽랑국의 공주들과 혼례를 올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농업과 목축업을 시작한 뒤 점차 제 몫의 땅이 필요해진 세 을나는 각자 자기가 살아갈 터전을 결정하는 데 화살을 이용했다.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은 각각 일도이도삼도에 떨어졌고, 일도이도삼도동이 여기서 유래했다. 세 을나가 활을 쏘았던 장소가 바로 제주시 봉개동과 아라동에 걸쳐 있는데, 제주도 말로 쌀손장오리(射矢長兀岳, 사시장올악)라고 한다. 세 을나가 쏜 화살이 박힌 돌을 모아둔 곳이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三射石)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제주 시조 탄생 이후 바다를 통해 발달한 외래문화가 유입되었고, 비로소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때까지가 제주도의 신화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제주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삼국시대부터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

백제 문주왕 2(476)에 탐라국이 백제에 토산물을 바치자 벼슬을 주었다. 동성왕 20(498)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려고 지금의 광주에까지 이르자 탐라국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사죄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국의 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그로부터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탐라(耽羅)로 표기된 제주가 당회요(唐會要)100 ‘탐라국(耽羅國)’에 다시 등장한다.

탐라는 신라의 무주 바다 위에 있다. 섬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한다. 북쪽 백제와 배를 타고 5일에 갈 만한 거리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으며 다섯 마을로 나뉘어 있다. 그들의 집은 동굴에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었다. 호구는 8천가량 된다. 활과 칼 및 방패와 창이 있으나 무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항상 백제의 지배 아래 있었고, 용삭 원년(661) 8월에 조공 사신들이 당나라에 이르렀다고 실려 있다. 그 뒤 별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다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숙종 10년에는 탐라군으로 바뀌었다

 

고려사(高麗史)고기(古記)에 제주도에 사람이 살게 된 내력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인물이 없었는데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 진산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는 구멍이 있으니 이곳이 3신인이 나온 땅이다.

 

맏이는 양을나, 다음은 고을나, 세 번째는 부을나다. 세 사람이 궁벽한 황무지에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하루는 보니,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해 바닷가에 떠 있었다. 안에 돌로 된 상자가 있고 붉은 띠에 자주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왔다.

상자를 열자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송아지와 오곡의 종자 등 여러 가지가 나왔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日本國) 사신인데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 ‘서해 가운데 있는 산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는데 배필이 없다고 하면서 신()에게 명하여 세 딸을 모시고 가라고 해서 왔으니 배필을 삼아 큰 업을 이루소서 했다. 말을 마친 후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세 사람이 연치의 차례로 나누어 장가들고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한 곳에 나가서 활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의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 고을나의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하고 번성해졌다.

15대 손()인 고후(高厚)고청(高淸)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닿았으니 대개 신라의 융성한 시대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보였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회할 징조라했다. 후의 무리가 이르매 왕이 가상히 여기어 후에게 성주(星主)란 칭호를 주었으니 객성상(客星像)이 동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청을 자기의 가랑이 아래로 나가게 하고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여 왕자(王子)라고 일컫고, 그 망내를 도내(都內)라고 일컬었다. 고을 이름은 탐라(耽羅)라 하였는데, 처음에 와서 탐진에 닿아서 신라(新羅)에 조회했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와 옷을 주어 보냈다. 이때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신라를 공경하고 섬기매 드디어 고로 성주를 삼고, ()으로 왕자를 삼고 부()로 도상(都上)을 삼았다. 뒤에 양()을 고쳐 양()으로 했다

 

다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제주도의 내력이다.

그 뒤에는 백제에 복종하면서 섬겼다. 백제가 멸망하고서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탐라국주의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20년에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조회하자 신라에서 성주 왕자의 작위(爵位)를 주었다. 숙종 10년에 탁라(乇羅)로 이름을 고쳐서 탐라군(耽羅郡)으로 만들었고 의종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懸令官)으로 삼았다.

 

원종 11년에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제주도 땅으로 들어가 고려와 원나라에 항거했지만 김방경(金方慶)이 평정했다. 충렬왕 3년에 원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충렬왕 20년에 왕이 원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자 원나라 승상 완택(完澤)이 황제에게 아뢴 뒤 다시 고려에 예속시켰다.

이듬해에 이름을 제주로 고쳐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로 삼았다. 26년에 원나라 황태후가 또 그 땅에 말을 방목하다가 31년에 다시 고려에 돌려주었다.

 

충숙왕 5년에 초적(草賊)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켰다. 그때 지방 사람인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난을 평정하고 원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 11년에 원나라에 예속시키기를 청하자 원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로 하여금 탐라만호(耽羅萬戶)를 삼았다.

 

충숙왕 19년에 원나라가 제주를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에 원나라 목자(牧子)들이 광폭하여 여러 번 국가에서 보낸 목사(牧使)와 만호(萬戶)를 죽이고 반기(叛旗)를 들었다.

김유(金庾)를 시켜 토벌하게 하자 목자들이 원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를 두기를 청했다. 왕이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새로 관리를 임명하고 목자들이 기른 말을 가리어 바치기를 전례와 같이 하기를 청하자 원나라 황제가 그대로 좇았다. 그 뒤 원나라 목자 하치가 마음대로 날뛰어 관리를 살해하자 6년 뒤에 임금이 최영(崔瑩)을 보내어 하치를 쳐서 멸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고려가 멸망하고서 조선을 개국한 뒤에도 그대로 따랐다. 태종 2년에 성주 고봉례(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의 무리가 성주 왕자의 호가 참람(僭濫)하였다 하여 고치기를 청했다. 성주로 좌도지관(左都知管)을 삼고 왕자로 우도지관(右都知管)을 삼았다. 세조 12년에 안무사(按撫使)를 고치어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를 삼았다가 뒤에 목사(牧使)로 고치고 진()을 두었다.

 

제주도는 삼별초의 난 이후 대략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때 원나라의 언어와 풍습 등이 제주도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중앙 집권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는데,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까지 써 오던 성주와 왕자의 작호를 거두고 세습되던 제도를 폐지한 뒤에 성주에게는 좌도지관의 벼슬을 주고 왕자에게는 우도지관의 벼슬을 내려서 얼마큼 유지하게 했다. 태종 16년인 1416년에 안무사가 올린 장계를 받아 한라산 남쪽 지역을 동과 서로 나눈 뒤 동쪽에 정의현을 남쪽에 대정현을 두어 삼읍 제도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그 뒤 광해군 1년인 1609년에 3개의 지역에 저마다 4개 안팎의 면과 리를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그 당시 제주도의 호수가 5207호요, 인구는 8324명이고, 군정은 2066명이었다.

 

조선이 역사의 저편으로 물러난 뒤 일본이 36년간에 걸쳐 제주도를 지배했다. 해방이 되고 1948년에 43항쟁이 일어났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 전쟁의 여파 속에 육지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제주도의 고()()()씨의 3시조 격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梁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이 각각 솟아났다는 신화가 전하는 유적이다. 송림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세 개의 구멍이 각각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품()자형을 이루고 있다. 그 깊이가 바다와 통한다는 위쪽 구멍은 둘레가 6자이고 아래의 두 구멍은 각기 3자이다. 3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다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오늘의 제주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三姓穴 神話 (삼성혈의 신화)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主山(주산)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三神人(삼신인)同時(동시)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三神人湧出(용출)하였다 하여 三姓穴(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地穴(지혈)이 있다. 神人들을 이름하여 乙那(을나)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木函(목함)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玉函(옥함)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使者(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玉函을 연즉 靑衣(청의)를 입고 姿色(자색)이 출중하고 稟質(품질)端雅(단아)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整齊(정제)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碧浪國(벽랑국)의 사자 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紫宵閣(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伉儷(항려)의 예식을 갖추어 큰 國業(국업)을 성취 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三神人祭物(제물)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그래서 자주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延婚浦(연혼포)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婚姻池(혼인지)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神房窟(신방굴)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 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 활 쏘은 지역을 射矢長兀岳(사시장올악)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三射石(삼사석)이라 하는데 조선조 영조 11(서기1735) 김정목사가 삼신인의 활 솜씨를 경탄하여 기념코자 三射石이란 비를 세우고 비면에 시를 지어 추모하니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를 받았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고 소규모나마 물물을 교환하는 해상교역 활동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후 수천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 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

그래서 이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三乙那(삼을나)왕께서 湧出(용출)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 또한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오거나 빗물이 수없이 내려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면면이 이어온 수백년된 고목들도 모두 다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들을 팔벌려 감싸 안고 있다.

 

삼성혈에 처음 설단하여 치제한 때에는 서기 1526(중종21) 이수동목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정을 대표하여 제주목사가 홍문과 표단을 설치하여 봉향하였으며 특히 유교국시의 조선조에 와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존숭치적으로 더욱 신성시하였다. 1785년에는 정조대왕이 三姓祠”(삼성사)라는 편액을 친히 하사하시어서 ()에 대한 예우로써 國祭(국제)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제향은 매년 410일에 춘기대제를 10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봉향하고 1210일에는 건시대제라하여 혈단에서 드리고 있는데 모든 제관들은 왕에 대한 예우로써 금관제복을 착용하여 3일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그리고 이 건시대제는 조선시대에는 국제로 모시다가 현재는 제주도민제로 봉행하고 있으며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 종헌관은 덕망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중에서 추천된 인사가 맡고 있다.

 

인류 역사의 변천과 국가 형성 과정을 보면 통치 지역이나 권력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연속인 것이 상례처럼 보이지만 三神人이 세공주를 맞이하여 아무런 다툼이 없이 배필을 정한 것이나 생활의 터전을 활을 쏘아 정한 것이나 분할지역을 정한 후에는 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영토전쟁이 없었던 것은 오늘날 제주인의 평화 존중의 정신이며 수눌음과 조냥 정신 및 자립과 화합정신의 기틀이요, 이러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부를 창조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아니한 강인한 개척의 정신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곰솔. 해송(海松) 흑송(黑松)이라고도 함

 

 

 

 

 

 

 

 

 

 

 

 

 

 

 

 

 

 

 

 

 

 

 

 

 

 

 

 

 

 

 

 

 

  

 

 

 

 

 

이곳은 탐라(耽羅)를 창시한 삼성시조가 용출(湧出)하신 곳이다.

 

 

 

 

 

 

 

삼을나 (三乙那)

 

 

삼을나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의 세 사람을 부르는 명칭으로, 이들은 각각 제주고씨(濟州高氏), 제주양씨(濟州良氏)[후에 으로 바꿈], 제주부씨(濟州夫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의 삼을나와 관련한 기록을 보면,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가죽옷과 고기를 먹고 살다가, 상자에 담겨 벽랑국에서 온 세 여신을 서차에 따라 배필로 삼았다.세 여신은 오곡 종자와 송아지와 망아지를 가져왔으므로 농사를 시작하여 땅이 풍요로워졌고, 세 신인은 1·2·3도로 나뉘어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탐라국 개국의 토대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제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삼성신화와 삼공주신화에는 이들이 모흥혈(제주 삼성혈)에서 솟아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을나라는 뜻은 (良乙那), (高乙那), (夫乙那)의 한자 표기로, 각각 신성, 광명, 통어의 뜻에 인격을 표시하는 가 붙은 것이라는 이은상의 견해가 있다. 현용준은 고을나는 높은이’. 양을나는 어진이’, 부을나는 밝은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장주근은 을나가 얼라·알라·얼레로 남부 지방에 널리 분포하는 소아(小兒)의 방언, 또는 고어를 한자 표기로 옮긴 것이라고 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김알지의 알지는 소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는 곧 신성한 아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탐라기년(耽羅紀年)(1918)에서는 '향언왕(鄕言王)'이라는 정의에 따라 을나가 우리말로 왕 즉 통치자의 의미라고 했다.

 

고을나와 양을나, 부을나의 고··부는 본래 성일 수 없고, 그것 자체가 한자의 차자 표기이거나 후대(고려 시대)에 만들어 낸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선사 시대에서 고대 국가 건설기에 우리나라에는 성씨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족들은 고대 국가 이른 시기에 성씨를 갖게 되었고, 고려 초기까지 지방 세력가인 호족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씨를 붙이고 있지 않다.

 

6세기 중반의 국내외 사료를 보더라도 고, , 부는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耽羅王子 久痲伎耽羅王子 久痲藝의 구마(久痲)는 성씨보다는 이나 의 신적인 존재라 하겠다. 7세기경 일부 탐라 왕자들이 스스로를 구마(久痲)라고 지칭한 것은, 당시 탐라국에 막연한 씨족 개념을 가진 공동 집단에서 혈통 중심의 친족 집단으로 가계가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666년 일본에 파견된 왕자 고여(枯如)9년 후인 675년에 탐라왕으로 다시 일본을 방문하고 있는 것을 통해 일정한 친족 집단 내부에서 왕위가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7세기 즈음에 탐라가 가계 중심의 사회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고려 전기인 현종 대에 고씨가 등장하고, 문종 대에 고한(高漢)과 고협(高叶)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고씨 성은 문종 이후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양씨나 부씨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제사와 행정·군사와 농업을 주재하는 각각의 신격의 의미를 지니면서, 제사 집단·군사 집단·생산 집단이라는 세 기능을 분담하는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 집단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을 추장으로 내세워 함께 연맹 체제를 구축하고 고대 국가를 건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제주 삼성혈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 있다. 세 신인의 묘소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성소에서 매년 410일과 1010일에 춘추대제가 거행되고, 1210일에 건시대제가 행해진다.

 

제주 삼성혈의 성역화 사업은 1526(중종 21)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제주 삼성혈 북쪽에 홍문(紅門혈비(穴碑)를 세우고 돌로 280여 자의 담을 쌓아 고··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穴祭)를 지내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1698(숙종 24) 혈 동쪽에 위패를 모시는 삼을나묘(三乙那廟)[지금의 삼성전]를 세우고, 1827(순조 27)에는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奠祀廳)을 세운 뒤 1849(헌종 15) 숭보당(崇報堂)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