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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내 고향 금산(역사 등) 이야기

1. 금산군 연혁

백수.白水 2022. 1. 21. 11:01

금산 적벽강

 

1) 금산군 연혁

 

-. 백제시대: 진내군(進乃郡) 또는 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다.

 

-. 통일신라경덕왕 16(757) 全州(처음 完山州) 관할 進禮郡으로 개칭. 伊城縣. 丹川懸. 淸渠縣領縣 으로 두었다.

 

-. 고려 성종 2(983) 江南道 南原府 관할의 進禮縣으로 개칭한다.

-. 고려 성종 14(995) 茂豊縣이 속현으로 된다,

-. 고려 현종 3(1012) 錦溪郡으로 승격한다.

-. 고려 현종 9(1018) 江南道全羅道로 개편되면서 全羅道 錦溪郡이 된다.

-. 고려 명종 3(1173) 錦溪郡을 분할 富利縣茂豊縣을 설치 한다.

-. 고려 충렬왕 31(1305) 錦州郡으로 승격하고 知錦州事가 다스리며,

          속현으로 富利縣, 淸渠縣, 朱溪懸, 茂豊縣, 珍同縣을 둔다. (高麗史 57)

 

-. 조선 태조 2(1393) 珍同縣珍洲郡으로 승격하며 分立한다.

-. 조선 태종 13(1413)錦山郡으로 개칭하고

          茂朱縣이 생기면서 朱溪懸, 茂豊縣이 분립하며 淸渠縣龍潭縣으로 개칭하며 분립한다.

-. 조선 고종 32(1895) 공주부 관할변경된다.

-. 建陽1(1896) 금산군과 진산군이 전라북도로 편입.

-. 일제강점기(1914) 행정구역 개편으로 珍山郡을 병합.

 

-. 대한민국(1963)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된다.

 

 

2) 금주군(錦州郡)과 김신(金侁, 1234 ~1307)

 

금산 출신인 김신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자는 윤직(倫直), 호는 낙천재(樂天齋), 본관은 진례(進禮, 현재 錦山의 고대지명)이고, 낭장을 역임한 왕연(王涓)의 사위이다.

고종조에 문과에 등제하여 한림원 직원(直院), 국자감 사업(司業) 등를 거쳐 원종조에 밀직사 밀직(密直), 중서문하성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추밀원 부사(副使) 동정지역(東征之役)에 좌군사(左軍使)가 되었다.

 

원명내비잡사(元明內秘雜史)에 의하면 1274(원종 15) 1차 정동지역에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이 전패(戰敗)를 은폐하고 죄를 대신하여 김신을 인재로 천거하여 벼슬이 정일품 금자광록대부 요양행성 참정(正一品 金紫光祿大夫 遼陽行省 參政)에 이르렀으며, 30여년간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교민의 지위향상과 복지증진에 진력하였으며, 연경(燕京)을 왕래하는 본국사신에 편의를 제공하고 대원외교(對元外交)에 공헌이 지대하였다.

 

1304(충렬왕30)에 원나라 황제 성종(成宗)만리황풍(萬里皇風)”의 친필을 가지고 귀국하니,

이듬해에 충렬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고향인 진례현(進禮縣)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고,

이에 부리(富利), 진동(珍東), 청거(淸渠), 주계(朱溪), 단천(丹川) 5현을 소속시켜 김신을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제수하고 금주군(錦州君)으로 봉하였으며,

지금의 남일면 황풍리(皇風里)와 마장리(馬壯里) 일대를 장원(莊園)으로 하사하였다.

지금도 이 들을 참정평(參政坪, 속칭 참뱅이 들)이라하며, 황풍리라는 동네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금주군(錦州郡)은 遼陽省內 錦州地名에서 由來)

※ 군지사(郡知事)=지군사(知郡事)는 고려시대 도호부 산하의 시장 · 군수급 지역책임자로 1명을 두었다.

 

김신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원에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왜구(倭寇)에 변을 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뒷산에 단()을 쌓고 7일동안 치성치세하였다.

이튿날 눈이 와서 한 가닥 길이 트여 따라가 보니 여러 구()의 시체가 있는데 모친의 시신을 알아 볼 수가 없어서, 다시 치성으로 하늘에 기도하니 백골(白骨)이 청색(靑色)으로 변하므로 거두어 장례를 모시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출천지효(出天之孝)에 감탄하였다.

 

지금도 신대리 뒷산에 수골유적(收骨遺蹟)이 있으니 제천대(祭天臺)와 진악산 아래에 변청동(變靑洞),염골리(染骨里)라 전해온다.

김신이 죽은 후 예관을 파견하여 무주군 안성면 공진동에 장례하였다.

1617년 성곡서원에 배향되고, 그 뒤에 무주군 안성면 죽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 성곡서원, 금산군 최초의 사액서원 이안눌이 건립 | 작성자 참마음>

 

 

3) 금산군(錦山郡)은   2천년이상 전라도에 속했던 지역. 광복 후 1963년 충청도로 편입.

 

금산군은 삼한시대의 마한(馬韓)지역인데 마한54소국 중에서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백제시대에는 진내군(進乃郡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고

-.통일신라경덕왕16(757)全州(처음 完山州)관할 진례군(進禮郡)이 된다.

-.고려성종2(983) 진례현(進禮縣)으로 개칭되며 江南道 南原府 관할이 되었고

-.고려현종9(1018) 강남도가 全羅道로개칭되면서 全羅道 錦溪郡이 된다.

-.조선고종32(1895) 체제가 23부 체제로 바뀌면서 公州府 (그 당시 충청도 전라도가 따로 없었다)로 관할변경되나,

-.이듬해인 建陽1(1896) 금산군과 진산군이 다시 전라북도로 편입되고

-.광복 후(1963)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된다.

 

그러나 현재 금산군지역 중 병합되기 이전의 진산군(珍山郡:진산면, 추부면, 복수면)지역

-.백제시대에는 熊川州관할 黃山郡(논산군 연무지역)의 속현(屬縣)으로

-.고려시대는 옥계부(玉溪府)

-.조선시대는 진주군(珍州郡)·(珍山郡)으로 개칭되면서 2천년 넘게 충청도관할지역으로 유지되다가

-.1,914(일제강점기) 금산군으로 병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