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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내 고향 금산(역사 등) 이야기

2. 錦山郡의 지명유래

백수.白水 2022. 1. 22. 17:45

금산향교에서 보는 진악산

 

 

1. 역사기록(고대지명)

 

○進禮郡, 本 百濟 進仍乙郡, 景德王 改名,今因之. <三國史記 券 第36>    

○進乃郡[一云 進仍乙] <.三國史記 券 第37 >

○進禮縣 百濟 進乃郡【進仍乙縣이라고도 함】신라 景德王이 進禮郡으로, 고려에서 縣令官으로 삼았다.(高麗史 地理志)

○본래 백제의 進乃乙郡이었는데, 신라에서는 進禮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縣令으로 강등하였다 (世宗實錄地理志)

○본래 백제의 進乃郡이며 일명 進乃乙郡이다. 신라에 와서 進禮郡으로 고쳤다(新增東國輿地勝覽)

           

2. 錦山의 고대 역사

 

 三韓시대 馬韓은 대략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을 지칭하는데 마한지역에 54개의 小國이 있었다. 

이 54소국 중의  하나였던 백제가 점차 세력을 키워 마한지역을 아우르는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삼국사기에 백제의 기원을 BC 18년으로 적고 있으니 이때를 백제가 마한의 땅에서 소국을 세운 시기로 본다.

進乃는 54소국 중 어느 소국에 속한 지역인지 알 수  없지만, 백제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 큰 나라를 세울 때 進乃乙郡이 되었으니 進乃라는 이름의 시작은 서기 기원전이었을 것이다.

進乃郡은 백제시대 王都인 부여 사비성의 동남쪽에 위치하므로 백제가 지방행정구역을 5方으로 나눌 때 中方이나 혹은 南方에 속했을 것이다.

백제는 郡 37곳, 縣 200여 곳 인바 그 37개 郡중의 하나로 進乃郡이라 불렸고 이시이현, 물거현, 적천현 등의 영현을 관할했던 것이다.

 

 

 3. 옛 지명 어원 탐구 (進乃 · 進仍乙 · 進禮)

 

현재 통용되는 訓에 따라 해석하려들지 말고 옛 시절의 用例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 進/나아갈 .

-. 禮/예도 예(례), 두음법칙 상 進禮는 진예가 아니고 진례로 읽어야 한다.

-. 奈/어찌 , 어찌 .

-. 乃/이에 , 노 젓는 소리 .

-. 仍/인할.

-. 乙/새. 보통 단어의 뒤에 붙어 ㄹ음을 나타낸다

 

나는 처음 進仍乙(진잉을)에 대하여 ‘乃乙’이 어떻게‘仍乙’과 대응되는 건지?

그리고 이를 ‘진잉을’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진내을’로 읽어야 할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進仍乙을 쓰다가, 후대의 세종실록지리지부터는 모두 進乃乙로 적고 있으니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수집한 사료의 전사과정의  오기(誤記)일까...?

아니면 의 中古音이 '내'는 아니었을까...?  고심을 많이 했는데...

漢韓大辭典에서 의 여러 용례 중  ‘乃也’ 를 발견하면서 "仍와乃"는 같은 말임을 알게 되었다.

 

 

4. 先學의 연구 소개

 

[梁柱東의 古歌硏究]

進乃乙. 進乃를 긴느리, 진느리로 보았다.  구개음화현상에 따라 ‘긴(길다)’ 이  ‘진’ 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내'와 '내을'을  '느리' 즉'ᄂᆞ리' 로 본 것은 卓見이다. 

 

[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이병선)]

乃와 仍乙의 대응관계를 살피고 進乃를 大邑. 長邑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고대 국명과 지명을 6개의 語系로만 한정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지명과 전래지명 / 김정균] =============

 

김정균은 학술논문에서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시내와 관련되는 지명을 뽑아 그 대응관계를 살피고

‘날’과  ‘내리’ 중 선행관계는 알 수 없지만 '날, 내리, 내, 나, 나리, 나이' 가 모두 시내라는 것을 밝혔다.

에 대해서는 살피지 않았으나 관련되는 시내로 錦川을 들었다.

 

-. 시내를 의미하는 의 음차표기로 , , , 那利(일본서기), 怒利(일본서기)’ 등이 사용되었고,

신라향가에서 川理나리를 표기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라나리또는의 훈차표기로 보는 것은 문제가 없다.

 

-. 김영일은 을 재구하고 , , 의 어형발생 선후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나리(첨가) ] / [(말음 탈락)],

 

-. 김종택은 ᄂᆞ리(仍利) ᄂᆞ리> / ᄂᆞᆯ(內乙, 乃乙, 於乙)>

               ᄂᆞ리(仍利) ᄂᆞ리> / ᄂᆞ이(, 內爾) > ᄂᆞ>

 

-. ‘/ ᄂᆞᇀ을 재구성한 점은두 견해가 같고 나리 가운데 어느 것을 선행형태로 보았는가

      하는 점에 차이가 나지만 의 선행형태로 나리,나이,, ,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그리고 삼국사기지리지의 차자(借字)표기를 확인을 통해

 

  ㄱ.旌善縣 本 高句麗 仍買縣<35> 乃買縣 <75>

  ㄴ.進禮郡 本 百濟 進仍乙郡<36> 進乃郡 一云 進仍乙<37>

  ㄷ.伊城縣 本 百濟 乃利阿縣<36>

  ㄹ.汝渭縣 本 百濟 仍利阿縣<36> 仍利阿縣 一云 海濱<37>

  ㅁ.泗川縣 本 高句麗 內乙買縣<35> 內乙買 一云 內?<37>

  ㅂ. 本 百濟 奈已國<35>

  ㅅ.知禮縣 本 知品川縣<34>

 

 ▶가 동일한 음을 표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와 함께 시내를 의미하는의 음차표기로 사용되었다.

 ▶仍乙이 대용되는데 이들은 시내를 의미하는의 음차표기이다.

 ▶乃利나리의 음차표기로 볼 수 있는데, 의 음이 동일하므로

   仍利乃利와 마찬가지로나리의 음차표기라 할 수 있다.

 ▶內乙와 대응되므로 사는 모래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무조건 동일시하는 건 위험하다.

 ▶內乙과  乃利는 동일한 의미이며 각각 나이의 음차표기이다.

 ▶의 의미와 연관이 있다.

 

進禮郡은 현재 금산군 금산읍지역으로 錦川이 흐르며 伊城縣, 汝渭縣, 泗川縣, 등은

모두 내가 흐르는 지형적 특성의 공통점을 보아도 추정이 그릇되지 않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5. 진내는 본래 긴내

 

위의 결과에 비춰보면 進乃는 읽는 그대로 진내(긴내)의 音借표기임을 알 수 있다.

進乃는 진내고  進乃乙(進仍乙)진ᄂᆞᆯ이니 선행관계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길게 흐르는 내(川)를 표기한 것이다.

 

그러면 로 변화하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서라벌은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 사라(斯羅) 사로(斯盧)  新羅 등 여러 이름으로 적고 있다.

대체로 지명은 세월이 흐르면서 구개음화, 두음법칙, 자음과 모음의 탈락과 첨가 등 음운의 변화를 거치게 된다.

진내는 세월이 지나면서 발음이 편한 진래, 질래, 질내, 질례 등으로 불렸음은 자연스러운 음운변화다.

따라서 진내의 발음이 변해 진례로도 발음하는 것 또한 당연하니 진례 또한 진내인 것이다. 

 

진내는 본래 긴(長) 내(川)라는 시내의 이름이다.

그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으니 진내는 마을 이름이 되었고,

그 마을이 현의 중심이 되니 진내현이 되고, 郡의 중심이 되니 진내군이 된 것이다.

 

지금도 사용되는 지명으로

천안시 목천읍 덕전리에 진내들용현 저수지에서 중리까지의 들과 내가 길다고 하여 진내들이라고 부른다.

경남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 신방촌 진내골이 나온다.

③박완서의 소설에 어느 곳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네 집 긴내골이 나온다.

 

 

6. 진내는 지금의 어느 내 (川. 시내. 강) 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누각 영벽루(映碧樓)편에“영벽루(映碧樓)는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남수문(南秀文)의 기에 ”영벽루(映碧樓)는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서대(西臺)는 북쪽의 진수(鎭守)요, 진락(進樂)은 남쪽을 가리고 있으며,

서쪽은 대둔(大芚)의 여러 산들이 빙 둘러 높이 솟아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거기에 금천(錦川)의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서 누각의 뒤에 와서는 물을 끌어 소지(沼池)가 되니....라고 나온다.

 

한국지리지에 보면 여지고서에 조선시대 읍치의 명당은 錦川이라 불리고 錦川은 성 남문밖에 있다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99년에 완성되었으니 그 시대에 이미 錦川을 진내로 보았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금천은 어느 내를 지칭했을까. 예로부터 지금의 금산천을 錦川이라 했으니 지금의 금산천임을 알 수 있다.

 

"대전일보 2009-07-15 멋과 여유로움의 강" 글에서 금산 적벽강 푸른 물결… 불타는 산그림자… 노 젓는 사공은 어디로 갔는가. 예로부터 이 강에 배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금강 본류중 상류지역인 부리면의 적벽강도 한때 錦川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 금산에 봉황천의 상류하천을 金川으로 표시하고 있고

金川리가 ‘구한국행정구역일람’에 上金川과 下金川이 확인된다고도 하니

옛 지명을 살펴보면 金은 錦과 용례가 다른지만 鳳凰川도 錦川으로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론은 옛날에 처음 郡治所를 흐르는 현재의 錦山川을 처음 진내라 불렀을 것이다.

 

 

7. 진내계 지명(進乃·進仍乙·進禮)에서 錦溪로 개칭

 

고려현종 3년(1012년)에 進禮縣을 錦溪郡으로 승격시키게 된다.

오래도록 사용되던 우리말 進乃계통의 지명(進乃乙 →進乃→進禮)이 갑자기 바뀌는데

이후 錦溪, 錦州, 錦山 등 錦字 지명을 사용하면서 오는 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진내, 진내을, 진례는 우리말 이름을 소리대로 표기했고

錦溪는 지세가 비단같이 아름다운 계곡이니 그 뜻을 표기한 한자식 지명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에 따른 주목 할만한 연구가 없으니 금계 지명을 탐구해 보자.

 

먼저 우리나라 지명 중 錦溪가 들어간 지명을 찾아보니

全南 長城郡 西三面 錦溪里 全南 羅州市 錦溪洞, 慶北 安東市 豊川面 錦溪里 세 곳이 나오는데...

풍천면 금계리만 '마을을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 마치 비단과 같이 아름다워 금계리(錦溪里)라 하였다' 는 유래가 나온다.

 

[허재영 건국대강의교수 칼럼  / [땅이름] 금산과 진내을] 

금산은 본래 백제의 진내을군(進乃乙郡)이었다.

금산은 ‘경양’ 또는 ‘금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진내을’이 ‘금계’로 불린 까닭은 ‘진’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는 덮어두더라도

‘내을’이 ‘시내’를 뜻하는 ‘내’ 이기 때문인 것은 쉬 짐작할 수 있다.

溪는 끊이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이니 ‘진내을’의 ‘진’은 ‘긴 냇물’이 변한 ‘진 냇물’이다. 」라고

錦溪가 아닌 進溪로 풀이하고 왜 진내가 금계를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이병선/1982)]

"花園縣 - 舌火縣 - 錦城으로 변하며 錦은 15세기에 고로라 하고 語形은 koro로 생각된다고 했다.

금계는 골시내라는 말인데 이 또한 우리 고대지명을 6개의 語系로만 한정해야 할지 의문이다.

 

언젠가  “중국의 수조우에서는 45Km. 상하이에서는 60Km 쯤 떨어진 곳에 진시(錦溪)라는 마을이 있는데

진시(錦溪)는 물의 마을”이라는 글을 읽고 혹시 금계군 개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재 중국어는 錦溪라 쓰고 [진시]로 읽는다. 곧  錦溪 [ jin  xi ] 이다.

[jin]이고  [xi]가 된다. 그런데 進의 발음도[jin]이다. 

進乃[jìnnǎi] = 錦溪 [jin xi]

 

進乃[jìnnǎi] = 錦溪 [jin xi]을 대용(代用)관계로 가정해 본다면...

, 길마등이 구개음화(口蓋音化)가 안 된 상태로 굳어져 

, 질마와 같이 사투리로 굳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길다는 의미의 형용사 으로 변화된 사례도 이에 속한다.

 

혹시 고려 초기우리나라 한자 中古音이  錦은 진, 溪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명을 바꿀 때 아름다운 비단 錦을 택한 것은 아닐까?

여기서 進乃는 진 + 내(시내의 뒷말)의 합성이고, 진시(錦溪)는 진(錦) +시(시내의 앞말)의 합성이 아닐까? 

아니면 錦은 진의 음차표기이고 溪는 시내의 뜻을 취한 표기가 아닐까?

 

  

8. 금산군으로 개칭

 

태종 13년(1413년)에 錦溪를 錦山郡으로 개칭한 것은,

그해 유수부(留守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관(牧官)을 제외하고

그밖에“주(州)”자가 붙는 단부(單府)와 군(郡)·현(縣)은 모두 산(山)이나 천(川)자로 고쳤기 때문이다.

충청남도는  山자와 川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9. 錦川과 錦江

 

금강의 명칭은 웅진(熊津)과 함께 '(곰)' 계열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감·곰)은 '짐·검·금·가무' 등으로 전음(轉音)되며 '儉·錦·今·金·金馬·蓋馬' 등으로 차음(借音)되기도 하는데

'강' 또는 '나루'는 '강 - 금강 - 錦江'으로 '나루-곰나루-熊津'으로 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금강하류인 웅진을 語源적으로 분석하여 지명유래를 설명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국토지리연구원/한국지리지의 금강에 관한 기록이 유래를 찾기에 훨씬 용이해 그대로 옮긴다.

錦江은 전북 장수군 용계리 일대의 水分峙에서 발원하여 오랫동안 충청도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길이 굽이치며 흐르는 것이 비단결 같다는 뜻으로 지명이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 외에 湖江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발원지부터 종점까지 금강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 이후부터다.

삼국사기에 ‘남쪽은 熊川을 경계로 삼고라는 기사에서 웅천은 당시 금강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리지의 泗沘河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즐기고 놀았다는 기록에서 볼 때 부여일대의 금강은 사비하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이후 白江 ,白村江의 지명 등은 금강의 일부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 초 웅진이 공주라는 명칭을 갖게 되면서 公主강 公主河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 금강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금강 지명을 사용하나 아직 유로 전체의 지명은 아니었고 공주일대의 유로만 해당되었다.

조선후기사료인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웅천대신 금강발원지부터 서천까지 서술하여 지명이 部分 稱으로부터 전칭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인다.

成海應 이 편찬한 硏經濟全集에서도 장수군 수분치 부터 서천포에 이르는 유로를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전칭으로서의 금강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동국문헌비고에서도 금강지명은 전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전기까지 전칭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발원지에서 최 하류까지를 하나로 인식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들어 산줄기 인식처럼 금강은 한줄기로 이해하면서 전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명(地名)은 소지명(小地名)으로부터 대지명(大地名)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독특한 뜻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런데 지명의 대소(大小)관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

랜 역사 속에서 어떤 지명은 보다 작은 단위(單位)로 격하(格下)되기도 하고, 어떤 지명은 보다 큰 단위로 승격(昇格)되기도 한다.

대전의 지명도 처음 한 마을에 큰 밭이 있어 한밭이라 하다가 대전리가 되고  점점 커져 대전면 대전시가 되었다,

금강도 처음에는 상류의 이름인 진내(錦川)에서 점점 하류로 내려가 큰江을 이루니

이 강을 하나로 보는 인식이 생기고 길다는 의미가 확대되어 錦江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