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잘 노는 인생
안빈낙도-채수철. 그림 제공 포털아트
회사생활 30년을 넘긴 중역이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퇴임식장에서 감사패 하나 받아들고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아들이 물었습니다. “퇴임을 하셨으니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셔야죠. 회사생활 하시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게 뭐죠?”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평생 회사생활 하며 머릿속으로는 항상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나게 놀고, 원 없이 놀고, 질리게 놀고 싶다는 생각… 이제 퇴임을 했으니 그걸 실천할 생각이다.” 평생 마음으로 꿈꾸던 놀이를 일삼겠다는 아버지의 선언에 아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무조건 놀겠다고 선언한 이후 아버지는 거의 매일 외출했습니다. 아들이 어디 가시냐고 물으면 항상 놀러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외출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의 표정에는 즐거움이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뭘 하고 노셨냐고 물어도 “묻긴 뭘 물어!”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아버지의 외출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3개월이 지나지 않아 아예 두문불출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 노시라는 아들의 권유에도 아버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노는 것도 놀던 놈들 몫이지, 평생 일만 하던 놈이 무슨 수로 놀아….”
놀고 싶어도 놀 줄 몰라 놀지 못한다는 아버지가 걱정돼 아들은 주변에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떻게 노는 것이 잘 노는 것인가, 뭘 하고 노는 것이 제대로 노는 것인가. 숱하게 많은 사람에게 놀이에 대해 자문했지만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 아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때 주변에 있던 후배 하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놀이를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놀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안 놀아져요. 집중하고 즐기면 세상만사가 다 놀이인데 놀이를 어디 가서 따로 찾겠어요.”
후배의 말에 아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놀이의 반대말이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놀이가 곧 일이고 일이 곧 놀이라는 게 후배의 생각이었으니 놀이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대한민국의 걷기 좋은 길을 안내한 책을 선물하며 후배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걷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하면 몸이 고되고, 그걸 놀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심심해질 터이니 그저 취미 삼아 걸어보라고 권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으나 그때부터 아버지는 걷는 일을 취미 삼아 전국의 걷기 좋은 길을 찾아다니며 삶의 활력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래, 내가 살아온 평생이 놀이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말고 너도 일체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즐겁게 살아라.”
21세기, 진정한 놀이의 요소가 사라진 세상에서 현대인은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놀이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은 노는 게 아니라 문명의 이기에 둘러싸인 채 자의사와 무관하게 ‘놀아나는’ 형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공부하라, 일하라, 돈 벌라, 출세하라고 무한 강요하는 세상을 놀이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놀이하는 마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은 가장 인간다울 때 놀고, 사람은 놀 때 가장 인간답다’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을 되새겨봐야 할 시간입니다.
< 작가 박상우의 그림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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