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살이, 그거 ‘패키지 딜(일괄 거래)’이다.
기쁨·슬픔·즐거움·괴로움… 한 묶음으로만 팔지, 따로따로 살 수 없더라.”
김희근(65)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의 말이다. 인생의 곡절을 서너 번쯤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다. 그는 벽산그룹 창업자인고(故) 김인득 명예회장의 셋째 아들이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혼자 힘으로 뭔가 이뤄보겠다며 젊은 시절 11년을 열사의 사막에서 보냈다. 이 중 절반은 아버지 회사가 아니라 세계적 무기 중개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부호 아드난 카쇼기 밑에서 일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엔 벽산건설 경영을 맡았다. 12년간 한 차례도 적자를 내지 않았지만, 외환위기로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경영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연애 시절 2년간 700번 데이트를 했을 정도로 사랑했던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고, 또 한 번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현재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현대미술관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소문난 예술 후원자이기도 하다. 그는 “어떤 인생이든 들여다보면 건질 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인생 패키지’에선 뭘 건질 수 있을까. 꾸러미를 하나하나 풀어봤다. <글=김선하 기자

“여러분의 일은 여러분의 삶이 아니다. 일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세상을 떠날 때 사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혼자가 아닌 삶을 찾아라. 여러분이 사랑할 사람과, 여러분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라. 전화를 해라. 편지를 쓰고, 메일을 보내라.” 2002년 김 회장이 자신의 모교인 미국 마이애미대 졸업식장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한 연설 내용이다. 그가 벽산건설 경영에서 물러난 뒤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다.

●본인의 경험이 담긴 얘기였나.
“너무 절실하게 느낀 것이었다. (벽산건설) 경영을 하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했다. 걸핏하면 새벽 두세 시에 집에 들어가면서 ‘오늘도 열심히 일했다’고 뿌듯했었다.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아마 계속 그렇게 잘난 척하고 돌아다녔겠지. 밤낮 회의나 하고, 결재에 쫓기고…. 벽산건설 떠나는 과정에서 7~8개월 정도 사외이사로 근무한 기간이 있었다. 며칠 전까지 내가 하루 스무 시간 가까이 일하던 곳이었는데, 관점을 조금 바꿔 보니 두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경영이 되겠더라. 기업 오너의 역할이 뭔지 잘 몰랐던 거지.”
●뭘 몰랐었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 들었다. 아랫사람들 일하는 게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착각이었지…. 기업 오너인 내 친구들에게 ‘너희들 은퇴 안 하느냐’고 물으면 ‘내가 지금 은퇴하면 안 된다’고 답하는 친구가 대부분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내가 지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벽산엔지니어링(벽산그룹에서 계열 분리)에 있지만, 내가 결재 안 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어떤 때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요즘은 기업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것이 없는지를 가장 많이 고민한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도 그래서 맡았다. 보람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보람을 알리고 싶다. 돈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다. 한국 사람들, 벤치마킹의 귀재 아닌가. 작은 회사지만 벽산엔지니어링이 좋은 일을 하면 파급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한 가지를 놓고, 더 많은 걸 얻었다는 얘기 같다.
“근사한 말이긴 한데… 솔직히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또 즐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착각이었던 거지만. 그래도 그런 시절을 겪었으니 현재 이렇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당시 벽산건설이 무리한 재개발 사업 투자로 위기를 맞았다는 분석도 있었다.
“위기 관리를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거지. 회사를 키우는 데 너무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엔 반대로 너무 안 키우려고 하고 있지만…. 그때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너무 잘못된 생각이었지. 지금? 사람들이 좋은 기업으로 기억하는 회사, 종업원들이 사랑하는 회사가 덩치 큰 회사보다 훨씬 값어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는 건가.
“물론이지. 누굴 탓하겠나. 최고경영자(CEO)가 외롭다는 말이 그런 뜻 아니겠나. 자기 혼자만의 책임인 거지…. 난 아랫사람 탓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 그러려면 자기가 오너, CEO를 하지 말든가.”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개인적 고충도 많았을 텐데.
“아버지가 복이 있으셔서… 그룹이 어려워지기 직전인 1997년 7월에 돌아가셨다. 내가 참 불효자식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이… 그걸 안 보고 가셔서…. 우리 집안이 자유당 때부터 따져봐도 ‘먹고살 만한 집안’ 중에선 제일 화목하다고들 했다. 그런데 내가 일을 너무 벌여서 그룹 전체가 흔들렸다. 나야 그렇다 쳐도 아무 죄 없는 형님들이나, 형수님들은…. 막내 녀석 때문에 집안 어려워졌다고 생각하셨겠지. 나도 속상하고 서운한 것이 없진 않았지만 주식부터 다 내놨다. 둘째 형(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이 술도 사주고, 많이 달래주셨다.” 아버지 얘기를 하는 김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픈 기억을 너무 들춘 것 같았다. 화제를 바꿨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 끊임없이 공부하셨다. 영어 공부를 하시고, 녹음 테이프를 통해 경영학 강좌 들으시고….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갑자기 불러서 ‘경영의 3대 원칙이 뭔지 말해 보라’고 하시기도 했다. 담배 한 모금, 술 한 잔도 안 하셨다. 뭐, 흠 잡을 게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롤모델’로 삼기엔 너무 멀리 있는 분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은 어땠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다. 50년대에 아버지가 단성사·피카디리·중앙극장을 포함해 수십 개 극장을 경영하셨다. 제법 컸던 우리 집 응접실에서 종종 ‘시사회’가 열리곤 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지상에서 영원으로’ ‘십계’ 등이 아버지가 수입한 영화였다. 전쟁이 끝난 뒤엔 우리 집 마당에 55년식 초록색 쉐보레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우리 차가 의전용으로 차출되기도 했다.”
●고등학교만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갔는데.
“경기중·고를 나와 서울대 떨어졌다. 어찌나 창피하던지…. 그래서 떠난 미국 유학이었는데 거기서 철이 들었다. 누구 아들, 누구 동생으로 불리는 것보다 홀로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 안 계신다’라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다. 웨이터, 펜싱 강사, 정원사 등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던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외국에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업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1990년대 말 모교인 미국 마이애미대에 100만 달러를 지원해 ‘희근 킴 아시아 비즈니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문화를 알리는 프로그램이다. 미국 학생들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를 방문할 수 있도록 지원도 한다. 내가 미국 유학할 때 제일 서러웠던 게 친구들이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5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인기가 제법 많다고 한다. 학점이 4.0 만점에 3.65는 돼야 지원할 수 있다더라. 나도 마이애미대에 가 여러 차례 특강을 했다. 학생들이 매긴 수업 평가 점수가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보다 높았다고 학장이 귀띔해주더라.”
김 회장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젊은 시절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냈다. “사막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게 그의 말이다. 뭘 배웠다는 걸까.

●사우디아라비아엔 어떻게 가게 됐나.
“군대 제대하고 73년 벽산건설 전신인 한국건업에 입사했다. 스물일곱 혈기 왕성한 나이에 50대의 관료적 임원들과 같이 일하기가 참 힘들더라. 그래서 ‘해외공사를 꼭 따오겠다’고 큰소리치고 말레이시아로 갔다. 해외 유학생 출신이 ‘노가다’ 판에서 손에 흙 묻히는 게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아홉 달을 공들여 3000만 달러짜리 공사를 따냈는데 아버지가 칭찬은커녕 ‘포기하라’고 하시더라. 속이 많이 상했다. 그런데 나중에 일본 미쓰이건설이 그 공사를 맡았는데, 예상보다 공사비도 많이 들고 철근 파동까지 겹쳐 큰 손해를 보고 철수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던 거지. 그때 만난 말레이시아 사업 파트너와 사우디에 처음 가봤다. 도로조차 제대로 안 깔려 있더라. 하지만 내게는 그곳이 바로 기회의 땅이었다.”
●카쇼기와는 어떻게 일하게 됐나.
“사우디에 다녀왔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만나보라며 명함 한 장을 건네주시더라. 그때는 카쇼기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 줄 몰랐다. 알고 보니 정말 무지무지한 거상(巨商)이더라. 시사잡지 타임의 커버스토리에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는 무기·자동차·비행기 등 각종 중개업을 했는데, 동남아 시장에 대한 정보를 얘기해 줬더니 함께 일하자고 했다. 카쇼기 회장의 트리아드 홀딩스에서 일하면서 각국의 대통령·총리부터 대기업 CEO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 건설사들도 사우디 공사 딸 때 대부분 내 손을 거쳐갔다.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한번은 일본과 중요한 거래를 하는데 점잖은 파트너가 한 명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야쿠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모험’도 많았다던데.
“한번은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자동차 냉각수까지 빼서 마셨는데 만 하루가 지나도록 지나가는 차 한 대 없더라. 천만다행으로 차 한 대를 만났고, 그 차가 무전을 쳐줘서 인근에 있던 한 회사의 경비행기가 우리를 구조해 줬다. 알고 보니 조종사가 빈 라덴 가문의 아들이더라. 빈 라덴 그룹 회장에게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하러 갔다. 남들은 ‘빈 라덴’이라고 하면 테러리스트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내게는 생명의 은인으로 기억되는 이름이다. 내가 올라가 있던 기중기가 넘어지면서 10m를 날아간 적도 있다. 골반 뼈가 조각이 나서 꼼짝 없이 석 달간 병원 신세를 졌다.”
●사막에서 배운 것을 한 가지만 꼽는다면.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내가 아직까지 먹고사는 것도 여러 경험을 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한다. 우리 회사 임직원들과 비교해 봐도 내가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한 것 같다.”
●건설사를 경영하면서 워크아웃 이외에 겪었던 어려움이 있다면.
“92년 벽산건설이 시공을 맡았던 신행주대교가 무너졌다. 직원 한 사람이 아파 문병을 가던 길에 얘기를 들었다.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실 설명하기 힘든 아주 긴 ‘스토리’가 있지만… 어떻게 하겠나, 이미 무너졌는데. 누구 책임이 더 큰지 따져서 뭘 하겠느냔 말이다. 최선을 다해 복구부터 해야지…. 욕먹을 일 있으면 먹고, 벌 받을 일 있으면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 분석 잘 못한다.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아내가… 암이란 걸 알았을 때도 그랬다. 당장 병원 가고, 수술 받고, 최선을 다해 간호해야지.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김 회장은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아내를 2년 전 췌장암으로 먼저 떠나 보냈다. 최근 재혼한 그에게 먼저 간 아내에 대한 기억을 조심스레 물었다.
●아내를 극진히 간호했다고 들었다.
“만 4년간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냈다. 그때 내가 정말 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엔 의사도 손을 놓고 5개월 정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느낌… 그게 가장 힘들었다. 마지막에 아파했던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힘들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재혼할 때 망설임은 없었나.
“떠난 사람을 끌어안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산다는 게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되더라. 남은 인생은 또 그것대로 씩씩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재혼한 아내와 함께 가끔 산소에 성묘도 가고 그런다.”
김 회장은 ‘지속 가능한’ 좋은 일터 만들기가 자신이 기업인으로서 해야 할 남은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같은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해야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을까.
●세계 경제 상황이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위기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후배 경영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기본으로 돌아가라. ‘펀더멘털’에 치중해야 한다. 일단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다. 교과서적인 얘기라고? 교과서 무시하면 안 된다. 책을 하나 쓰려면, 그것도 교과서를 쓰려면 얼마나 열심히 사례 연구를 하고 분석을 했겠나. 재능보다는 기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설업계만 예로 들어도 과거에 기라성 같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매년 30%씩 성장하던 기업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지금 남은 사람, 남은 회사 별로 없다. 대부분 이미 사라졌다.”
열성적 문화예술 후원자 “기업들이 더 지원해야죠 ”

벽산건설 전신인 한국건업 중동본부장으로 일하던 시절의 김희근 회장(왼쪽).
김희근 회장은 이름난 예술 애호가다. 사실 ‘애호가’ 단계는 이미 오래전 넘어섰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이사장을 비롯해 각종 예술단체를 맡고 있고, 지금껏 수집한 그림이 700여 점에 이른다.
●예술가 지원은 어떻게 하게 됐나.
“내가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를 나왔다. 친구 중에 음악·미술 쪽으로 진출한 사람이 제법 있었다. 처음엔 친구들 콘서트 표 사 주고, 그림도 사 주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니 야구·축구·농구 같은 스포츠는 기업들이 많은 지원을 하는데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더라. 세계에서 클래식 음악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가 어디인 줄 아나? 바로 한국이다. 하지만 지원이 없으면 결코 계속 성장할 수 없다. 기업들이 좀 더 지원을 해야 한다.”
●꼭 기업이 나서야 하나.
“정부가 다 하려면 국민이 세금을 좀 더 많이 내야 할 거다(웃음).”
●고가의 바이올린을 젊은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빌려 주고 있다. 1686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와 1758년산 과다니니 크레모나라던데.
“값은 내가 샀을 때보다 두 배 조금 더 넘게 오른 것 같다. 악기는 안 쓰면 망가진다. 소유자는 악기를 관리할 수 있고, 연주자들은 좋은 악기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과거만큼 큰 기업을 경영하는 건 아닌데 어떻게 후원하나.
“전보다 시간이 많아졌으니 몸으로도 많이 하고(웃음)….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긴 돈 30억원으로 벽산문화재단을 세웠다. 그 사람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다. 세종솔로이스츠·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한국페스티발앙상블 등을 지원하고 있다. 벽산희곡상도 만들었다. 14일에 시상식을 하는데 당선작 한 편에 상금 1000만원과 공연 제작 때 보조금 2000만원 이상을 지급한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끝까지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다. 세상을 떠난 아내 속을 많이 썩였지만 그 사람 떠날 때 내가 옆에서 손을 잡아줘서 많이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야 그 사람이 내가 떠날 때 손을 잡아주지 않겠나. 아들? 에이, 자기가 잘 알아서 하겠지. 나도 이만큼 하고 살았는데···. 회사 직원들? 그들이 스스로 더 좋은 회사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내가 ‘멍석’만 깔아주면 되지 않을까?”